창극은 전통 예술인 판소리를 주요 매체로 사용하는 한국 고유의 음악극이다. 대한제국기에 분창 무대극으로 형성되었고, 이후 한 소리대목에서 역할을 나누어서 창을 하는 대화 창극, 한 대목만을 극화하는 토막 창극 형태를 띠었다. 1930년대 중반 조선성악연구회에 의해 각 창자가 고정 역할을 맡아 하며, 전체를 다 공연하는 전막 창극 형태가 수립되었다. 1940년-50년대 여러 창극단들이 지방 순회로 인기를 얻었고, 여성 창자가 남성역을 맡는 여성국극이 번성했다. 1962년 창단된 국립국 극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레퍼토리가 개발되고 있다.
창극은 대한제국기(1897년1910년)에 판소리 창자들의 무대 공연에서 시작되었다. 1902년 한국 최초의 실내 극장이자 영리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설립되었고, 협률사에 고용된 판소리 창자들은 소리 대목을 나눠 부르는 분창 공연을 시작했다. 1908년 개화 지식인인 최병도와 봉건 세력인 정감사의 갈등을 다루며 성황리에 공연된 ‘신연극 <은세계>’ 공연에 판소리 창자들이 배우로서 참가했다. 일제 강점과 도시화가 진행된 1910년1920년대에 기생조합과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 그리고 광월단이 주최한 공연에서, 전체 스토리의 한 대목을 극화한 토막 창극이 공연되었고, 김창환, 이동백, 심정순, 이화중선, 신금홍, 김추월 등이 활동했다.
1934년에 발족한 조선성악연구회는 주2 무대를 갖춘 동양극장에서 공연했고, 한 작품 전체를 공연하는 전막 창극 시대를 열었다. 유기적 구조와 정교한 장면 표현이 강조되면서 정정렬이 연출가로, 김용승이 각색자로 부상했다. 무대 장치나 의상, 분장, 소도구 등을 갖추었고, 대사와 성격에 맞는 연기를 지향했고, 설명에 해당하는 부분을 맡아하는 도창자의 배치 등이 고려되었다. 전승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작품 외에도, 실전 판소리로 알려진 <숙영낭자전>, <배비장전>, <옹고집전> 등을 레퍼토리로 개발했고, <유충열전>을 연쇄 창극으로 공연했다.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이 도창을 담당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37년~1945년에 일제는 전시 체제에 맞춰 공연 단체들을 조직하고 동원했다. 조선성악연구회 직영 극단 창극좌, 화랑창극단, 조선창극단, 동일창극단, 반도창극단이 창단되었고, 이들 창극단은 중앙 공연보다 지방 순회 공연을 대규모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창자로는 김연수, 오태석, 임방울, 정남희, 조상선, 박록주, 김소희 등이 주도적으로 활동했고, 이서구, 이운방, 김건, 박진 등 극작가협회 소속 작가들이 신작을 창작 · 연출했다. <장화홍련전>, <추풍감별곡> 등의 전통 소재 창극과, <고란사의 종소리>, <백제의 낙화암> 등 부여와 백제 소재 창극을 공연했고, <일복장군>에서는 장군 역을 맡은 박귀희의 남장 연기가 인기를 끌었다.
광복과 함께 시작된 미군정기에 전통 예술인 단체인 국악원 산하에 국극사가 창단되고, 창극은 국극으로 불렸다. 국극사가 <선화공주>, <만리장성>(일명 맹강녀) 등을 공연했고, 조선창극단은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논개>를, 국극협단은 <고구려의 혼>(일명 일목장군) <탄야곡> 등을 공연했다.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된 1948년 박귀희, 김소희, 박록주 등이 ‘여성만이 출연하는 창극’이라는 기치로 내걸고 여성국악동호회를 창단해 <햇님과 달님>을 공연하고, 이듬해 임유앵, 박초월 등이 조직한 여성국극동지사가 <황금돼지>를 공연하며 여성국극의 위세를 떨쳤다.
한국전쟁이 다소 소강 상태에 놓인 1952년 전후,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재건된 여성국극은 환도하는 정부를 따라 서울로 입성하며 공연계를 장악했다. 햇님국극단, 임춘앵과 그 일행, 진경국극단, 삼성국극단 등 수없이 많은 단체가 주3을 거듭하며 번성했다. 여성국극은 여성이 남자 역할을 하는 데서 오는 매력과 이국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적 시대물 개발 등을 기반으로, 전후 사회의 혼란 속에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1962년 국립국극단이 국립극장 산하 전속 단체로 창단되었다. 1967년 국극정립위원회를 설치해 창극의 극본 정리와 연출의 방향 설정 등을 모색했고, 1970년 이미지 쇄신을 앞세우며 국립창극단으로 개명했다. 국립창극단은 1973년 장충동에 신축한 국립극장으로 이전하면서 대소극장용 음악극으로 정비되었고, 반주 음악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1987년부터 기악부가 설치되었다.
김연수, 박동진, 박귀희, 박후성, 강한영, 전황, 안숙선, 최종민, 정회천, 유영대, 김성녀, 유수정 등이 예술 감독을 역임했다. 남성 창자로는 은희진, 조통달, 조상현, 왕기석, 김형철, 남해웅 등이, 여성 창자로는 오정숙, 김영자, 김동애, 안숙선, 유수정, 박애리, 김금미, 서정금 등이 창극 무대를 빛냈다. 작창은 판소리 창자들이 맡았고, 작곡에는 박범훈, 백대웅, 김영재, 황호준 등이 참여했다.
레퍼토리로 전승 판소리의 소리 대목을 살려낸 완판 창극들, 고전소설을 각색한 <윤지경전>, <가로지기>, <박씨전>,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황진이>, <논개>, <광대의 꿈 >, <윤봉길의사>, 그리고 외국 작품을 재구성한 <제비>, <로미오와 줄리엣>, <멕베스 부인>, <코커서스 백묵원>, <트로이의 여인들>, <오르페오전> <메디아> 등이 공연되었다. 연출가로는 김연수와 박진(1960년대), 이진순과 이원경(1970년대), 허규(1980년대), 김홍승, 정일성, 김명곤, 임진택, 한태숙, 김아라(1990년대), 이병훈, 정갑균, 이윤택(2000년대), 아힘 프라이어(Achim Fryer), 안드레이 서반(Andrei Serban), 옹켕센(Ong Keng Sen), 서재형, 이소영, 고선웅(2010년대) 등이 활동했다. 연출가에 따라 서양식 오페라나 뮤지컬다운 특성이 강조되기도 하고, 마당극이나 마당놀이다운 공간 활용이 중시되기도 하고, 첨단 미디어와 장치 등을 활용한 감각적 연극성이 확대되기도 했다. 창극 소재와 관객 개발 차원에서, 어린이 창극 <토끼와 자라의 용궁여행>(2001)과 청소년 창극 <내 이름은 오동구>(2013)가 기획되었다.
1990년 전후부터 남원에 개원한 국립민속국악원, 전주의 전북도립국악원, 광주의 광주시립국극단 등이 혼성 창극을, 한국여성국극협회 등이 여성 창극을 간헐적으로 제작 · 공연하고 있다.
창극의 음반 발매와 방송도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 유성기 음반이 대중화되면서 발매된 일축조선소리반 춘향전(1926), 시에론판 춘향전(1934), 콜롬비아판 춘향전(1934), 포리돌판 심청전과 화용도(1935), 빅타판 춘향전(1937) 오케판 춘향전(1937), 오케판 흥보전(1941), 오케판 심청전(1942) 등 총 9종의 음반 창극은, 녹음 · 발매된 시기의 무대 창극과 조응했다. 일축판(1926)은 도창 비중이 높은 분창 형식인데, 시에론판(1934)은 연극배우가 대사를 맡는 식으로 참여했다. 빅타판(1937)은 극적 구성이 균형감 있게 잘 짜이고 정정렬제로 소리가 통일되어 극적 완성도가 높고, 오케판은 기악 반주와 합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32년 라디오 이중 방송이 실시되면서 조선 음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토막 창극을 방송했고, 동양극장에서 공연 중인 무대 창극이 중계되기도 했다. 해방 후 침체되었다가 1970-1980년대에 <장화홍련전>, <콩쥐팥쥐>, <이차돈> 등 새로운 레퍼토리가 엘피(LP) 음반으로 발매되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창극이 제작 · 방송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