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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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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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창을 기본으로 하는 우리 나라 고유의 음악극. 국극.
이칭
이칭
국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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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창을 기본으로 하는 우리 나라 고유의 음악극. 국극.
내용

넓은 의미로는 판소리와 그것이 분창(分唱), 사실극화된 것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판소리와 창극은 서로 구별된다.

판소리가 창자(唱者)와 고수(鼓手) 두 사람이 소리를 중심으로 펼치는 음악 위주의 일인극형태인데 비하여, 창극은 작품 속의 주인공들을 여러 창자들이 나누어 맡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많고, 대사와 연기·무대장치 등이 보다 사실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창극은 판소리의 극적인 성격이 부각되고 들을 거리 위주에서 보고들을 거리로 바뀐 종합적인 무대예술이다.

창극은 아름다운 음악과 연극뿐만 아니라 무용, 화려한 무대, 관현반주 등 여러 가지 종합예술형태를 고루 갖춘 서양의 오페라나 오페레타와 비교될 수 있는 극음악양식이다. 창극도 오페라나 오페레타처럼 음악·연극·무용·의상·예능 등이 혼융된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오페라나 오페레타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비롯되어 중세의 농촌축제와 신비극의 요소, 문예부흥시대 유럽 여러 나라의 궁정극까지 받아들여 형성된 것처럼, 창극도 오랜 역사 속에 다양한 요소가 곁들여져 형성되었다.

즉, 창극의 모체인 동시에 선행형태라 할 판소리의 경우도 그러하였으니, 판소리는 아주 오랜 옛날에 무의(巫儀)로부터 싹이 터서 민요라든지 불가(佛歌)·잡가·민간전설, 심지어 양반가사까지 흡수하여 형성된 민족 최고의 종합예술이다.

창극이 오페라나 오페레타와 다른 점은 오페라나 오페레타는 작곡가들의 대본에 의한 창작음악에 기본을 두고 있으나 창극은 자연발생적인 소리가 기본을 이룬다는 점이다.

또한, 오페라와 오페레타의 대본과 음악이 주로 바로크시대에서 낭만시대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졌다면 창극의 본래형태인 판소리는 설화와 같은 자연발생적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상과 같이 창극은 오페라나 오페레타와 닮은 점이 많으면서도, 이 둘처럼 창작성이 강하지 않고 민중 속에서 오랫동안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어왔기 때문에 더욱 민속적이고 동시에 민족적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창극의 음악적 수법이 판소리의 창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판소리가 창극을 탄생시킨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다.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부터 판소리가 창극으로 발전되기 위한 내재적 요인과 외부적 충격이 있었다. 판소리에서 너름새(연극성)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과 청나라 사람들을 따라 들어온 창희(唱戱, 京劇)의 영향이 그것이다.

즉, 19세기 후반에 와서 신재효(申在孝)는 창과 너름새를 일치시키려 하였고, 그의 영향을 받은 김세종(金世宗)은 판소리에서 창과 연극을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려 놓았다. 그리고 신재효가 여류명창 진채선(陳彩仙)을 키웠듯이, 김세종도 허금파(許錦波)를 대성시켜서 창극의 한 모퉁이를 열었던 것이다.

마침 그러한 시기에 청계천2가 청국인거리에 창희를 전문적으로 하는 청국관이 설립됨으로써, 판소리명창들로 하여금 다창(多唱) 또는 분창의 가능성을 터득하게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와서 창극발전에 절대적 구실을 하였던 강용환(姜龍煥)·이동백(李東伯) 등은 창희의 고정관객이었고 다른 명창들도 창희를 관람하였다.

그러므로 강용환 같은 인물이야말로 신재효·김세종을 이어 판소리의 내재적·외재적 계기를 통합하여 창극을 탄생시킨 공로자라 볼 수 있다. 실제로 1900년대 초에 접어들어 개화의 파고가 높아감에 따라 연극의 경우 판소리에 매달려 있던 명창들에게 가해지는 시대적 압력도 가중되었다.

따라서, 고수와 함께 펼치는 일인극 형태인 판소리는 대중의 변화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판소리명창들은 시대적 요구에 맞는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창극이었다. 그러나 창극도 판소리에서 바로 탄생한 것은 아니고, 대화창(對話唱)이라는 과도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체창(立體唱)이라고도 불리는 대화창은 1902년 황실에서 설립하였던 최초의 황실극장인 협률사(協律社)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대화창은 명칭 그대로 창을 대화형식으로 주고받는 창극의 초기 형태이다.

가령 <춘향가>를 예로 들어 보면, 이도령과 방자의 소리대목은 두 사람이 무대에 등장하여 한 사람은 이도령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방자가 되어 창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도령과 춘향의 소리대목은 남녀 명창이 등장하여 남창은 이도령, 여창은 춘향이 되어 창을 주고받았다.

대화창은 협률사를 주도하였던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 등 국창과 허금파·강소향(姜小香) 등의 여류명창이 담당하였다. 이러한 대화창형식은 1908년 원각사(圓覺社)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본격적 대화창이란 창극을 의미하는 것으로 강용환과 이동백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재래의 판소리에 만족 못하는 당시의 대중을 위하여 판소리의 변형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화창은 일보전진하게 되었는데, 그 전진된 형식이라는 것도 겨우 백포장의 배경막에다가 조명으로는 천장의 백전구가 고작이었고 도구도 거의 없었다.

<춘향전>의 경우 사실적인 연기 없이 순전히 창으로만 불렀음은 물론, 전편을 다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앞과장과 뒷과장으로 나누어 연행하였다. 물론, 남녀 역을 남녀 명창이 맡은 것이라든지 의상을 갖춘 것 등은 관객의 시선을 끌 만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차차 사실적 연기가 강조되고, 도구도 갖추어지기 시작하였으며, 무대장치도 점점 나아져 갔다. 이때의 공연작품은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 등 전래의 판소리 다섯마당 중 네 마당이 주였다. 그만큼 공연작품이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관객은 곧 식상하였고 새로운 내용을 요구하였다.

이에 창극 주도자들은 창작에 접근하게 되었다. 우선 창극이 될만한 실화를 찾았다. 그 첫번째 작업이 탐관오리의 횡포와 양민의 고난에 얽힌 실화인 최병도(崔丙陶) 이야기를 창극화한 <최병두타령 崔炳斗打令>(후에 ‘은세계’라 불렸음.)이다.

그 다음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천인봉>도 창극화한 것이고, 평안감사 민영휘(閔泳徽)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소송을 제기하였던 평안도 안주 이소사(李召使)의 억울한 사건도 창극화하려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면, 한말 관리의 부패는 창작창극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던 것 같다.

원각사 중심의 창극운동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즉, 일제강점을 앞두고 원각사가 일단 문을 닫음으로써 원각사에 몰려 있던 창극인들도 흩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주동인물과 출신지역에 따라서 몇 갈래의 창극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즉, 전라도 출신의 명창들은 김창환을 구심점으로 하여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였는데, 강용환·유성준(劉聖俊)·신용주(申用柱) 등 50여 명이 단원이었다.

같은 전라도 출신이면서도 송만갑은 자기대로 광무대(光武臺)를 근거지로 삼아 창극단인 송만갑협률사를 조직하였는데, 이동백·유공렬(劉公烈)·한성준(韓成俊)·허금파·강소향 등이 단원이었다. 김창환협률사는 지방순회공연을 많이 하였고, 송만갑협률사는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이들 두 창극단 외에도 조금 뒤에 김채만(金采萬) 문하생들이 전라도 광주에서 김억순(金憶淳)·안영환(安永煥)·성용태(成龍泰)·박화섭(朴化燮)·김정문(金正文) 등의 명창들을 중심으로 광주협률사를 조직함으로써 세 개의 창극단이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창극단들은 경술국치와 때를 같이하여 들어온 일본 신파극에 밀려 주로 지방에서 활동을 벌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대개 몇 년씩 공연활동을 벌이다가 흩어지고는 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창극은 조금씩 발전하여갔는데, 그것은 신파극의 외형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초기에는 배경으로서 백포장을 두르고 하였던 창극이 1910년대에 들어서는 태산준령을 그린 화폭배경의 무대장치가 등장하는가 하면, 간단한 가옥도 세워지고 도구도 제법 갖추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일본인 소유의 극장이 세워지면서 공연무대도 넓어졌다.

그러나 창극은 인재가 양성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적으로도 발전을 기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1910년대 창극단의 활동도 부진하여 광무대를 근거로 활약하였던 송만갑협률사도 흐지부지되고 송만갑도 낙향했다. 박봉구(朴奉九)에 의하여 광무대를 본거지로 광월단(光月團)이라는 창극단이 명맥을 이었지만 그 활동은 유명무실하였다.

지방순회공연을 주로 하던 광주협률사도 근근이 이어가는 정도였다. 서울의 광월단은 1920년대 후반 광무대극장이 일본인에게 넘어가면서 호성좌(虎聲座)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때의 단원들은 이동백·김창룡(金昌龍)·박춘재(朴春載)·이일선(李日善)·임명옥(林明玉)·임명월(林明月)·홍도(紅桃)·보배(寶貝)·이소향(李素香)·김옥희(金玉姬)·이금향(李錦香) 등이었다. 그러나 광무대마저 불타 없어지면서 호성좌도 거점을 잃고 흩어지게 되었다.

그 뒤를 고수 한성준(韓成俊)이 이끄는 연예단과 송만갑·이동백·김창룡·이화중선(李花中仙) 등의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가 이었으나 여전히 낙후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시기에 1933년 호남재벌 김종익(金鍾翊)이 재정 후원을 하여 창극인을 집결시킨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가 탄생되었는데, 송만갑·이동백·정정렬(丁貞烈)·김창룡·한성준·오태석(吳太石)·김여란(金如蘭)·박녹주(朴綠珠) 등 당대 최고의 명창 40여 명이 단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에서 활약하던 130여 명도 가입하였다. 이들은 때마침 연극전용극장인 동양극장(東洋劇場)이 세워지자, 1935년 봄에 창립공연으로 정정렬이 편극한 <춘향전>을 무대에 올렸다. 호화진용에다가 충분한 제작비를 들였으므로 무대는 화려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성악연구회는 이듬해 전속극단으로서 창극좌(唱劇座)를 두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들이 무대에 올린 작품은 <춘향전>을 비롯하여 <심청전>·<흥보전>·<별주부전> 등이었다.

이어서 박석기(朴錫紀, 朴錫基)·김여란·김소희(金素姬) 등이 창극단 화랑(花郎)을 조직하였고, 지방에서는 임방울(林芳蔚)·박초월(朴初月)·박귀희(朴貴姬) 등이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이 무렵에 반도창극단이 생겨났으나 활동은 미진하였고, 1942년에는 창극좌가 화랑과 합쳐져서 조선창극단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의 공연작품은 전래하는 판소리 다섯마당 외에 <장화홍련전> 등 고전소설과 근대소설을 창극화한 것이었다.

창극의 예술성은 무대장치라든지 의상과 소도구가 조금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구태의연했으며 신파극처럼 상업주의화한 것이 조금 달라진 정도였다. 이러한 창극도 1940년대의 암흑기에 들어와서는 크게 위축되었고, 따라서 명맥유지마저 위협을 받았다.

광복과 함께 창극도 새로운 활기를 찾게 되었고, 1945년 10월에는 함화진·박헌봉 등이 국악원을 창립함으로써 창극재건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국악원은 산하에 국극사(國劇社)·국극협회(國劇協會)·장안사(長安社) 등의 창극단을 두고 공연활동을 벌였다.

이듬해 1월에 <대춘향전>으로 기치를 올린 국극사에 이어, 김연수창극단(金演洙唱劇團)·조선창극단·국극협단(國劇協團) 등이 생겨났다. 그리고 주목을 끈 것은 1948년 9월에 여류국악인들이 따로 여성국악동호회(女性國樂同好會)를 결성한 사실이다.

박녹주를 회장으로 한 여성국악동호회가 창단공연으로 <옥중화 獄中花>를 공연하여 호평을 받은 뒤로, 전국에서 여성국극단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김주전(金主傳)의 햇님국극단을 비롯하여 이일파(李一波)의 낭자국극단(娘子國劇團), 김원술(金洹述)의 여성국극협회(女性國劇協會), 임춘앵(林春鶯)의 여성국악동지사(女性國樂同志社), 삼성국극단(三星國劇團) 등 여러 단체였다.

광복 후 한때를 풍미하였던 여성국극단들도 내적인 발전을 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시대변천에 따라 1960년대에 들어서 급속도로 쇠퇴하였으며, 일반 창극단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창극인들이 시대 추세를 따를 만한 예술적 소양이 없이 상업주의로만 흘렀기 때문이었다. 진부한 창극이 새시대를 호흡하는 대중을 붙잡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창극의 기본은 판소리 다섯마당이며, 그밖에 고전소설이 창극화된 것과 근대소설을 창극으로 만든 것 등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고전소설이 창극화된 것은 <장화홍련전>·<유충렬전 劉忠烈傳> 등 여러 편이고, 판소리계 소설로는<배비장전>이 많이 공연되었다.

근대역사소설로서 창극화된 것은 이광수(李光洙)의 <마의태자>·<황진이>·<백제의 낙화암>·<재봉춘 再逢春> 등이고, 역사소재로서 창극화된 것은 <아랑애화>·<선화공주>·<만리장성>·<왕자사유>·<예도성의 삼경>·<논개>·<왕자호동>·<임진왜란과 계월향> 등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창작창극대본으로 쓰여진 <최병두타령>을 비롯하여 이서구(李瑞求)의 <대관흥아> 같은 작품이 많이 공연되었다.

6·25전쟁 후에 잠깐 활기를 찾다가 쇠퇴하였던 창극은 1968년 국립극장에서 창극정립위원회가 발족됨으로써 조금씩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고, 1973년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신축됨으로써 본격적인 발전을 기하게 되었으며, 최근의 창극 원형복원공연은 대중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의미의 창작창극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 완전한 무대극의 체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 점, 아직도 신파조의 영향이 창극의 한구석에 남아 있는 점 등은 극복하여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지금까지의 창극에 관한 연구는 음악적 관점보다는 주로 연극적 관점으로 이루어져왔다.

특히, 음악양식적 접근을 통한 창극의 실제음악에 대한 연구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리고 창극연구도 창극에 대한 단일 연구목적이 아닌 연극사의 일부로 이루어진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음악사의 일부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판소리

참고문헌

『한국신극사연구』(이두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5)
『창극사연구』(박황, 백록출판사, 1976)
『한국연극산고』(유민영, 문예비평사, 1978)
『민속극과 동양연극』(장한기, 우성문화사, 1983)
『전통극과 현대극』(유민영, 단국대학교 출판부, 1984)
「개화기의 창극운동과 은세계」(최원식, 『판소리의 이해』, 창작과 비평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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