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조선공산당이 성립되었고, 1926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설치되어 민족주의 진영의 좌경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이념 운동으로 승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시대 조류에 발맞춰 종래의 투쟁 형식으로는 독립 쟁취가 요원하며, 혁명을 위한 이념 무장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이에 1926년 3월부터 정의부(正義府)의 양기탁(梁起鐸) · 현정경(玄正卿) · 고할신[高轄信, 일명: 고활신(高豁信)] · 오동진(吳東振) · 곽종대(郭鍾大) 등과 소련에서 돌아온 이규풍(李圭豊) · 주진수(朱鎭洙) · 최소수(崔素水), 천도교혁신파 · 형평사(衡平社) 인사인 김봉국(金鳳國) · 이동락(李東洛) · 이동구(李東求) · 송헌(宋憲) 등이 모여 논의를 거듭하여 4월 5일 창당하였다.
위원장에 양기탁, 책임비서에 이동구, 위원은 정이형(鄭伊衡) · 현정경 · 고할신 · 오동진 · 이동락 · 김봉국 · 현익철(玄益哲) · 이규풍 · 최소수 · 주진수 · 곽종대 외 4명이었다. 당원수는 정당원 · 준당원을 합하여 1,500명이었다.
당은 정의부의 민족유일당 형성 운동의 일환으로 형성되었다. 정의부는 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당의 정치 이념을 실현하는 행정 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의부 소속 독립군은 당군(黨軍)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당 내부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하는 인사들이 많아 내부 분열이 잦았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과 분열을 시도하는 간계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을 간파하고 대부분 탈당하였다. 그리고 정의부도 당과의 인연을 끊고, 주진수 · 이규풍 등이 소련으로 돌아가 버린 뒤에, 단체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더욱이, 1926년 12월 이동락이 체포될 때 고려혁명당 서류를 가지고 있었고 서류에 관계자 이름이 있었다. 일제는 이를 토대로 대대적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이듬해 12월까지 당 간부 이동락은 장춘(長春)에서, 정이형 · 이동구 · 이원주(李元柱) · 유공삼(柳公三)은 하얼빈에서, 송헌 · 장지필(張志弼) · 홍병기(洪秉箕) · 이동욱(李東郁) · 오승환 · 서광훈(徐光勳)은 국내에서, 김봉국은 봉황성(鳳凰城)에서 체포되는 등 국내외 20여 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정의부 군사위원장을 겸한 오동진이 일제의 주구 김종원(金宗源)에게 속아 길장선(吉長線) 흥륭산역(興隆山驛)에서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정의부와 고려혁명당에 큰 영향을 끼쳐, 결국 고려혁명당이 해체되고 말았다.
정의부는 유일당 운동을 주도하여, 1929년 4월 참의부(參議府) · 신민부(新民府)와 3부를 통합한 국민부(國民府)를 결성하였다.
당은 사상적 이념을 초월한 단체로서 신간회보다 앞섰으나, 성립 후 내부의 이념적 차이로 와해되고 말았다. →국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