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집 ()

난설헌집
난설헌집
한문학
문헌
조선 전기의 시인, 허초희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92년에 간행한 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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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난설헌집은 조선 전기 시인 허초희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92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1606년(선조 39) 허난설헌이 별세한 후 동생 허균이 친정에 보관되어 있던 허난설헌의 작품들을 편집하였다. 이후 명나라 사신 주지번·양유년에게 보여주고 중국에서 출간하게 하였다. 『난설헌집』에는 시가 총 210수이고 기타 사(辭) 1수, 「몽유광상산시서」 1편, 「광한전백옥루상량문」 1편이 있다. 부록으로 주지번의 서문, 양유년의 「난설헌집제사」가 있다. 『난설헌집』에 실린 작품과 관련한 위작 시비가 있기도 하다.

정의
조선 전기의 시인, 허초희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92년에 간행한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606년(선조 39) 허난설헌이 별세한 후 18년 뒤에 최초로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허난설헌의 작품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임종 때 그의 유언에 따라 모두 소각되었다. 다행히 동생 허균(許筠)이 친정에 보관되어 있던 작품들을 편집,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 · 양유년(梁有年)에게 보여 출간하게 함으로써 처음으로 중국의 문사들에게 허난설헌의 시가 소개되었으며, 『열조시집(列朝詩集)』 · 『명시종(明詩綜)』 등에도 허난설헌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간행된 초판본은 같은 해 선조 경진활자(庚辰活字)로 인쇄한 개주 갑인자본(改鑄甲寅字本)이나 희귀본이다. 그 뒤 1692년(숙종 18) 동래부(東萊府)에서 중간한 중간본이 있는데, 이 중간본은 일본에 건너가 인기를 끌었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 분다이야(文台屋次郎)에 의해 간행되기도 하였다. 현재 통용되는 문집은 대부분 동래부 중간본인 『난설헌집』이며, 민족항일기에 『소설헌집 小雪軒集』과 합책하여 간행된 『난설헌집』이 있다.

내용

『난설헌집』에 수록된 작품은 시가 총 210수이고 기타 사(辭) 1수, 「몽유광상산시서(夢遊廣桑山詩序)」 1편,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 1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부록으로 주지번의 서문, 양유년의 「난설헌집제사(蘭雪軒集題辭)」가 있다.

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독서강사(讀書江舍)」와 「채련곡(采蓮曲)」이라는 칠언절구 2수, 『동양여시선(東洋女詩選)』에 「빈녀음(貧女吟)」이라는 오언절구 1수가 실려 있으며, 가사 「규원가(閨怨歌)」 1편이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의 『고금가곡(古今歌曲)』에, 「봉선화가(鳳仙花歌)」 1편이 『정일당잡지(貞一堂雜識)』에 수록되어 있다.

1972년 문경현(文暻鉉) 편역주의 『허난설헌전집(許蘭雪軒全集)』은 1692년의 동래부 중간본을 대본으로 하면서 문집에 유루되었던 이상의 작품들을 모두 보충하였고, 여기에 유성룡(柳成龍)의 발문을 『서애집(西厓集)』에서 첨가, 수록하였다.

『난설헌집』에 기재되어 있는 작품들이 실제로 모두 그의 소작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된 바 있다.

첫째로 이들이 중국시의 표절이라는 주장이 있다. 신흠(申欽)은 『난설헌집』에 실려 있는 작품, 예를 들어 「유선시(遊仙詩)」 같은 것은 태반이 옛 사람의 시이며, 일찍이 그의 근체시 두 편을 보았는데 이것은 고인의 시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둘째는 『난설헌집』에 중국 시인의 작품이 유입되어 있다는 설이다. 김만중(金萬重)은 허균이 누이의 명성을 높이고자 잘 알려지지 않은 원나라와 명나라 시인의 아름다운 시구를 집어 넣었다고 한탄하였다.

셋째는 허균의 위작설이다. 이수광(李晬光)은 허난설헌의 일가인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과 정랑(正郎) 허적(許積)이 항상 말하기를 허난설헌의 시는 2, 3편 이외에는 모두 위작이라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광한전백옥루상량문」 역시 허균과 이재영(李再榮)이 편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문집은 허균에 의해 간행된 것이 아니라 중국 시인이 출간한 것이므로, 지나치게 중국 시를 모방한 작품이나 중국 시 자체는 출간 당시에 이미 삭제되었을 것이다. 허난설헌의 작품이 기구나 시재(詩材)에 있어 중국시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작가가 동일 소재를 변형하여 재창조한 과정은 오히려 허난설헌의 작가적 능력을 재확인시켜 주는 자료가 된다. 또한, 허균의 위작설은 그의 사람됨으로 보아 능히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두 사람의 시의 풍격이 다르기 때문에 위작 여부는 어느 정도 가려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남용익(南龍翼)도 허난설헌의 시격이 허봉(許篈)보다도 높아 허균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허난설헌의 시는 첫째로 당시(唐詩)를 변형하여 재창작한 것이 많다. 허난설헌은 특히 이백(李白)의 시를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그의 악부시(樂府詩)를 소재로 한 의고적인 시를 대부분 변형하여 창작하고 있다. 예를 들면 「소년행」 · 「장간행」 · 「대제곡」 · 「강남곡」 · 「축성원」 · 「출새곡」 · 「입새곡」 · 「상봉행」 · 「죽지사」 · 「고적사」 등은 한(漢) · 위(魏) 시대에 유행하던 악부시들인데 당대에 다시 의작된 것으로, 허난설헌도 이 시들의 시의 · 관점 · 격조를 변형시켜 새로이 작품화하였다.

둘째는 규원(閨怨)을 읊은 시이다. 허난설헌은 혼인 초에 공부하는 남편 김성립(金誠立)과 떨어져 살아야 했을 뿐 아니라 금실도 좋지 못했고, 시집 식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으며, 두 자녀마저 연차로 잃게 되었다. 「독서강사」 · 「규원」 · 「감우」 · 「춘일유회」 · 「추한야좌」 등은 이렇게 불행했던 그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셋째로 육친애의 뜨거운 정을 읊은 시이다. 「곡자」 · 「기하곡」 · 「기하곡적갑산」 등이 이에 속하는데, 사랑하는 자녀를 잃고 몸부림치는 모성을 그린 「곡자」는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어 온 시이다. 허난설헌은 여섯 남매 중 특히 동복인 허봉 · 허균과 우애가 깊었는데, 『난설헌집』에는 허봉에게 부치는 시가 두 편 실려 있다. 「기하곡」은 멀리 산사에 있는 오빠 허봉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의 정을 읊었고, 「기하곡적갑산」은 갑산으로 귀양가는 허봉을 한나라의 현신 가의(賈誼)에 비하면서 조정에 대한 측면적 공격을 암시하고 있다.

넷째로 「유선사」 87수와 「보허사」 · 「망선요」 · 「상현요」 · 「동선요」 · 「광한전백옥루상량문」 · 「몽유광상산시서」처럼 가혹한 현실로부터 초탈하여 선경의 이상향을 그린 선시들이다. 이들 작품들은 대부분 허난설헌이 혼인 생활의 불행과 함께 가장 사랑하던 오빠 허봉이 계미삼찬(癸未三竄)으로 귀양간 지 5년 만에 객사하는 등의 충격과 슬픔을 겪어야 했던 말년의 현실도피적인 작품들로 보인다.

신선사상은 허난설헌의 유일한 사상적 배경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도교를 가학(家學)이라 할 만큼 조예가 깊었던 친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선시들은 허난설헌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중 「몽유광상산시서」는 그가 죽기 전 마지막 꿈속에서 본 십주(十洲) 전경 중 가장 아름다운 선계에서 선녀의 황홀한 인도를 받아 노닐던 광상산의 선경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일곱 살 때에 지은 것이라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은 옥황상제가 살고 있는 궁전 중에서 가장 장려한 백옥루의 상량문으로, 이 문장 가운데에는 유명한 신선과 시선 이백, 그리고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짓게 하기 위하여 상제의 사자가 데려갔다는 이장길(李長吉)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선계(仙界)를 현실을 완전히 초월할 수 있는 영역으로 묘사하지 않고, 결혼이 있고 실망 · 질투 · 불면, 그리고 외로움과 기다림이 있는 등 현실과 연관된 세계로 그리고 있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참고문헌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지봉유설(芝峯類說)』
『서애별집(西厓別集)』
『열하일기(熱河日記)』
『호곡시화(壺谷詩話)』
『난설헌집』(오해인 역, 해인문화사, 1980)
『허난설헌연구』(허미자,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1984)
『허난설헌시론』(이숙희, 새문사, 1987)
『허난설헌의 문학』(김명희, 집문당, 1987)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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