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해서장(大慧書狀)』은 1책이며 11행 20자, 책 크기는 25.2x15.5cm이다. 광곽은 사주 단변이며 계선은 없다. 1166년 송나라 항주 묘희암에서 간행할 당시의 간기와 1387년 고려에서 간행하면서 작성한 간기 및 이색(李穡)이 쓴 발문(跋文)과 시주자 명단 등이 수록되어 있다.
대혜 종고가 입적한 뒤 30권으로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이 편찬되었는데, 이 가운데 권25~권30만을 따로 뽑아 『대혜서장』으로 편찬하였다. 『대혜서장』의 편찬은 종고의 제자 혜연(慧然)과 거사 황문창(黃文昌)이 주관하였으며, 황제의 명으로 1166년 항주 경산 묘희사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후기에 전래되어 유통된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1387년(우왕 13) 승려 지담(志淡)과 각전(覺全)이 보조국사 지눌의 뜻을 추모하며 간행한 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승려뿐만 아니라 우왕의 왕비 근비 이씨(謹妃 李氏), 환관 강인부(姜仁富), 판사 이세진(李世珍) 등 왕실과 중앙 관료들이 간행에 참여했으며 이색이 발문을 썼다. 조선 전기 국립중앙박물관본과 동일한 판본을 여러 사찰에서 복각하여 간행했고, 조선 중기 이후 새로 판하본을 만들어 간행하였다. 조선시대 간행본으로는 다음이 있다. 1537년(중종 32) 경상도 지리산 신흥사(神興寺)본, 1545년(인종 1) 함경도 홍원 묘봉암(妙峰庵)본, 1546년(명종 1) 황해도 학봉산 석두사(石頭寺)본, 1568년(선조 1) 전라도 장흥 천관사(天冠寺)본, 1574년(선조 7) 황해도 문화 월정사(月精寺)본, 1576년(선조 9) 전라도 대웅산 안심선원(安心禪院)본, 1604년(선조 37) 경상도 산청 능인암(能仁庵)본, 1630년(인조 8) 평안도 성천 영천사(靈泉寺)본, 1633년(인조 11) 함경도 안변 석왕사(釋王寺)본, 1728년(영조 4) 평안도 영변 보현사(普賢寺)본 등이 있다.
승속의 제자 및 신도들과 교환한 서신 6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승려 2인과 여성 1인을 제외하면 모두 사대부들과 교환한 서신으로, 내용은 이들의 질문에 대한 종고의 답신이다. 대부분 종고의 답신만 수록되어 있지만 참정(叅政) 이한로(李漢老)에게 보낸 편지 등처럼 종고가 받았던 질문도 함께 수록된 경우도 있다. 대개 일념으로 화두(話頭)를 참구하고 대원(大願)을 세울 것, 정식(情識)을 놓아 버릴 것, 단상이견(斷常二見)에 떨어지지 말고 활구(活句)를 참구할 것, 조용한 곳에서보다 시끄러운 곳의 공부가 더 효과가 있으며, 방편(方便)을 좇아 도(道)에 들어간 뒤 방편을 버릴 것, 깨달음을 조속히 이루려고 하지 말 것, 도를 깨친 사람은 반드시 보임(保任)을 할 것, 지해(知解)에 끄달리지 말 것 등 화두참구나 수행과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둔한 사람이 총명에 사로잡힌 사람보다 공부를 착실히 할 수 있는 이유를 밝히고, 도의 깨침은 신심(信心)에 달려 있음을 밝혔으며, 묵조선(默照禪)에 빠져들지 말 것을 당부하고,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는 방법을 지도하는 등 간화선을 강조하고 있다.
대혜의 사상은 고려시대 이후 한국 선종의 전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고려 후기 수선사를 개창한 보조 지눌은 『육조단경(六祖壇經)』‚ 『화엄론(華嚴論)』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깨달음을 얻은 뒤 마지막으로 『대혜어록』을 통해 그의 깨달음을 완성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이력에서 사집과(四集科)의 하나로 채택되어 승려들의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인악의첨(仁岳義沾)이나 연담유일(蓮潭有一) 등이 서장사기(書狀私記)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 책은 고려시대 이후 한국 선종 사상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