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 종사관 황호(黃㦿, 1604~1656)가 1636년(인조 14) 10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5개월간 일본에 사행으로 다녀온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정사는 임광(任絖)이고, 부사는 김세렴(金世濂) 등으로, 이들은 각각 『병자일본일기(丙子日本日記)』, 『해사록(海槎錄)』을 남겼다. 일본 기행 기록을 집대성한 『해행총재(海行摠載)』 제16책에 수록되어 있다.
이 사행은 앞서 1624년(인조 2) 사행 때 일본이 조선에 보낸 서계(書啓 : 외교문서) 가운데 대마도주 소오 요시나리[宗義成]가 임의로 국서를 위조한 사실을 변명하고, 관백(關白)이 조선의 마상재(馬上才 : 말을 타고 달리며 부리는 무예)와 악공의 연주를 관람하기 위해 조선에 사행을 요청해 와서 이에 응한 것이다.
조선 측 사행의 임무는 이 밖에도 임진왜란 때 잡혀간 우리나라 백성의 쇄환(刷還 : 귀환하게 함)과 유황(硫黃) 무역에도 있었다. 그러나 쇄환 문제는 임진왜란이 지난 지 34년이 지나 자손을 두고 사는 등의 이유로 귀환을 원하는 자가 없어 전혀 성과가 없었다.
유황 무역은 오랫동안 계속되어오다가 중지되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군기(軍器)에 관한 물건 매매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마도주가 “조선에 유황이 떨어질 걱정은 없게 하겠다.”고 말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마도주의 주선으로 밀무역이 이루어진 듯하다.
이 책 본문의 내용은 「일기」, 「문견총목(聞見總目)」, 이식(李植)이 왜인문목(倭人問目)에 답한 글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일기」는 주로 행로의 지형, 이정(里程), 일본인의 복색, 거동, 습속, 접대, 향응, 일본인과의 대화, 어떤 지명에 대한 내력 등을 기록하였다.
「문견총록」에는 주로 일본에 대한 기록으로, 분도(分道), 주현(州縣), 형승(形勝), 물산(物産), 의관(衣冠), 음식, 기명(器皿), 연향(宴享), 형법, 가취(嫁娶), 상장(喪葬), 제사, 속상(俗尙), 관제, 분록(分祿), 군액(軍額), 전제(田制), 시전(市廛), 음악, 신사(神祠), 관백의 사람됨과 시정(施政) 및 정세 등을 기록하였다.
이식이 왜인문목에 답한 글에는 왜인들의 물음에 답한 내용으로, 1년의 원일(元日)로부터 제일(除日)에 이르기까지 17개 절일(節日)에 대해 설명하고 조선에서는 어떻게 지내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17세기 전반 한일 양국의 외교 현안과 일본의 풍물을 이해하는데 기본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유황 등 군사적 품목의 교역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