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암살폭파사건 (Bur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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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아웅산 테러 합동국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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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버마(현재의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재의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폭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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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버마 암살폭파사건은 현재의 미얀마인 버마에 있는 아웅산 묘소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에 의해 일어난 폭파사건이다. 1983년 10월 9일에 발생했으며,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비상국무회의에서의 비상경계태세 결정, 북한만행규탄대회, 대북보복론의 대두 등 남북한 관계가 위기를 맞았다. 미얀마 정부는 북한에 대한 외교단절 및 정권승인 취소 조처를 취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제3세계의 지지기반이 흔들렸고 우리나라는 제3세계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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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버마(현재의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재의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폭파사건.
내용

1983년 10월 9일에 발생했으며,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하였다. 사고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희생된 17명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徐錫俊), 외무부장관 이범석(李範錫), 상공부장관 김동휘(金東輝), 동자부장관 서상철(徐相喆),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咸秉春),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상우(沈相宇),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김재익(金在益), 재무부차관 이기욱(李基旭), 주 버마대사 이계철(李啓哲),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하동선(河東善), 대통령 주치의 민병석(閔炳奭), 농수산부차관 강인희(姜仁熙), 과학기술처차관 김용한(金容澣),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재관(李載寬) 등의 공식 수행원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 이중현(李重鉉), 경호원 한경희, 정태진 등도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합참의장 이기백(李基百), 공보비서관 최재욱(崔在旭), 외무부 의전국장 최상덕(崔尙德), 한국일보 기자 윤국병(尹國炳), 중앙일보 기자 송진혁(宋鎭赫), 동아일보 기자 최규철(崔圭徹), 연합통신 기자 김기성(金基成), 코리아헤랄드 기자 김기석(金基石), 연합통신 사진부장 최금영(崔琴煐), 문화공보부 직원 임삼택(林三澤) · 김상영(金相榮), 경호원 김상태 등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을 순방중이었으며, 첫 방문지에서의 이같은 사건에 따라 나머지 순방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는 비상경계태세를 결정했으며 10월 13일 희생된 17위에 대한 국민장 거행 후 연일 벌어진 북한만행규탄대회를 고비로 대북보복론까지 대두되었다.

그러나 10월 20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한 대북한 경고와 더불어 자제론이 천명됨으로써 고조되었던 남북한간의 위기국면은 진정되었다. 한편, 미얀마 정부는 사건발생 즉시 5인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고 암살범 추적수사에 총력을 기울여 10월 11일과 12일 사이에 북한에서 온 강민철과 진 모 등 2명을 체포하고 1명을 사살하였다.

뒤이어 미얀마 정부는 외무장관을 진사조문사절로 파한했으며, 10월 17일 이 사건이 북한의 특수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을 공식발표하고, 11월 4일 북한에 대한 외교단절 및 정권승인 취소조처를 취하였다.

이 조처에 따라 미얀마 주재 북한공관원들이 이틀 뒤 미얀마를 떠났으며, 다음날인 11월 7일 일본 정부가 대북한 제재조처를 취했으며 잇따라 미국 등 우방국들의 대북한 제재조처가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이 암살사건과 무관함을 강변했으나 11월 22일 미얀마 검찰당국에 체포된 범인들이 죄상을 밝힘으로써 북한에서 전대통령과 수행원들을 살해하기 위해 인민군 장교들로 구성된 암살단을 애국동건호에 탑승, 밀파했다는 사건전모가 공개되었다.

그 뒤 12월 9일 랭군지구 인민법원 제8특별재판부에서 두 테러범에 대해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국제여론의 비난 속에 제3세계의 지지기반이 동요되었으며, 우리나라는 남남협력(南南協力)을 내세운 제3세계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진척을 보게 되었다. 이후 2007년 4월에 이르러서야 북한과 미얀마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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