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는 화초나 나무를 화분에 심어 가꾸는 원예 기술이다. 분재의 본질은 작은 분 속에 오묘한 자연의 운치를 꾸며내는 것이다. 고려 말엽에는 소나무, 매화나무, 대나무가 분재의 주종을 이루었다. 인위적으로 수형을 꾸미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원예고전인 『양화소록』이 출현한다. 조선 후기에는 분재가 크게 성행하여 분재를 가꾸는 취미가 널리 보급되었다. 분재에 어울리는 화분이 생산되었으며 분재의 기술을 서술한 책자도 간행되었다. 보통 분재는 사랑방의 탁자 위나 책상머리에 놓고 즐겼다.
이와 같은 행위를 일반적으로 분가꾸기라고 한다. 나무를 분에 심어 가꾸어 즐기는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분가꾸기의 경우와는 달리 몇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그 하나는 가꾸어지는 나무가 자연스럽고 고목다운 운치를 풍겨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창작성이 가해짐으로써 비록 나무는 작으나 웅장한 느낌과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분재는 회화(繪畫)나 조각처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또한 분재는 나무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며, 그 나무를 바라볼 때 대자연이 그려내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 연상되고 그 운치와 정서를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즉, 작은 분 속에 오묘한 자연의 운치를 꾸며내는 것이 분재의 본질(本質)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전기 문신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이 나오기 이전에는 화훼나 식물 재배에 관한 전문서적이 전혀 간행된 바가 없다. 다만 예로부터 분재는 주로 문인 · 묵객이 애완하는 대상이 되어 왔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문집에 수록된 시 속에 분재와 관련된 내용이 보일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분재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면 이러한 문집들을 참고해야 하는데, 그것도 고려시대 중기 이전에 저술된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는 물론 고려 초기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중국의 경우, 711년에 세상을 뜬 당나라의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의 무덤의 벽화 속에 분재가 그려져 있다고 하므로 600년대 말에 이미 분재를 가꾸어 즐기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에서는 사절유택(四節遊宅)이라 하여 지체 높은 이들이 철에 따라 돌아가면서 수려한 정원을 즐기는 놀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정원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분재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미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고려시대 중기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분중육영(盆中六詠)」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사계화(四季花)를 비롯하여 석류나무 · 대나무 · 석창포(石菖蒲) · 국화 · 서상화(瑞祥花)가 나온다.
최자(崔滋)도 그가 지은 문장 속에서 분죽(盆竹)과 석창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석창포는 수반(水盤)에 백사(白沙)를 담아 심어 가꾸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을 보면 고려 중기에는 석창포와 대나무 등 창작(創作)을 가할 필요가 없는 초본식물(草本植物)을 소재로 삼은 분재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에 간행된 문집에서 분재에 관한 시나 문장이 보이는 것으로는 전녹생(田祿生)과 이색(李穡) · 정몽주(鄭夢周) · 이종학(李種學) 등의 저작이 있다. 전녹생은 「영분송(詠盆松)」이라는 시를 남기고 있으며, 이색 역시 분에 심은 소나무를 읊고 있는데 그 속에 왕피(枉被)라는 말이 나온다. 왕피는 굽힘을 당한다는 뜻을 가진 말로서 이 무렵에 이미 인위적으로 수형(樹形)을 꾸며내는 기술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정몽주는 「분종송죽란매시(盆種松竹蘭梅詩)」라 이름하여 소나무와 대나무 · 난초 · 매화나무의 네 가지 분재에 대한 연작시(連作詩)를 남기고 있는데 소나무에 대한 시 속에 규번(虯蟠)이라는 말이 보인다.
규번이란 용이 서린 모양을 형용하는 말이다. 왕피나 규번 등의 말이 쓰인 것을 볼 때 이 무렵의 소나무분재는 굴곡이 심한 생김새를 가진 것을 높이 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이색과 이종학은 각기 몇 편의 분매시(盆梅詩)를 남겨 놓았다.
또, 이 무렵의 분재의 생김새를 보여주는 자료로는 자수박물관(刺繡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말기에 제작된 병풍이다. 네 폭 짜리 병풍의 첫째 폭에는 네모진 분에 심어진 노송(老松)이 수놓아져 있다. 괴석(怪石)이 곁들여져 있는 구도인데, 노송의 가지의 배치와 생김새가 자연스럽고 이상적이다.
두 번째 폭에는 깊은 사각분(四角盆)에 심어진 매화나무를 수놓았다. 셋째 폭에는 세 가지 식물을 수놓았는데, 그 하나는 넓은 분에 심은 꽃나무이고 양가에는 각기 둥근 분에 심은 연(蓮)과 난이 보인다. 마지막 폭에는 포도나무분재와 함께 난을 곁들인 소나무가 깊은 사각분에 심어져 있는 모양을 수놓았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고려 말엽에는 소나무를 비롯하여 매화나무와 대나무가 분재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병풍에 나타난 노송의 수격(樹格)이 꽤 높은 것을 볼 때 고려 말엽에는 인위적으로 수형을 꾸미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원예고전(園藝古典)인 『양화소록』이 강희안에 의하여 저술된다. 이 책에는 노송을 비롯하여 만년송(萬年松) · 오반죽(烏班竹) · 매화나무 · 석류나무 · 사계화 · 산다화(山茶花) · 자미화(紫薇花) · 철쭉나무 · 귤나무 · 석창포 등을 다루어 놓았다.
나무마다 그 생김새와 특징, 그리고 번식하는 방법은 물론 어울리는 수형까지도 설명해 놓았다. 그 내용을 음미해 보면 이 무렵 분재를 가꾸는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희안은 시 · 서 · 화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진 인물로서, 그가 남긴 그림 가운데 「분재도(盆栽圖)」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네모진 큰 분에 마치 괴석과도 같은 괴이한 생김새의 큰 고목이 심어져 있는 그림으로 옆에는 두 동자가 나무를 돌보고 있는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동자의 키보다 나무를 월등히 크게 그려놓은 것을 보면 조선 초기에는 오늘날보다 몇 갑절 큰 분재를 즐겨 가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청나라로부터 들어온 고증학과 서양의 과학적 사고방식의 영향을 입어 실학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하여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 서적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영농(營農)에 관한 백과전서인 『산림경제(山林經濟)』 등이 있다.
홍만선(洪萬選)이 지은 『산림경제』에는 분재로 가꾸어지는 식물로서 노송 · 만년송 · 대나무 · 매화나무 · 국화 · 산다화 · 치자나무 · 서향 · 석류나무 · 철쭉나무 · 월계화 · 해당화(海棠花) · 배롱나무 · 석창포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가꾸는 방법이나 관리상의 주의사항 등에 관한 내용은 강희안이 지은 『양화소록』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한편, 박세당(朴世堂)의 『색경증집(穡經增集)』에는 매화나무 · 철쭉 · 월계화 · 옥잠화 · 추해당(秋海棠) · 미인초(美人蕉)의 여섯 가지 식물의 재배요령이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조선 중기의 분재는 나무의 종류나 가꾸는 기술에 있어서 초기에 비해 별로 진전된 것이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산군 때를 시발점으로 하여 길게 계속되었던 사색당쟁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색경증집』에는 종분취경(種盆取景)이라 하여 고목의 운치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서 분토(盆土)에 이끼를 생겨나게 하는 요령이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과 종분취경이라는 제목을 보면 분재 관상의 참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서유구(徐有榘)의 저작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113권이나 되는 방대한 가정백과전서로서 분재는 이운지(怡雲志)의 화석공(花石供)의 항에 분경(盆景)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 놓았다. 그 내용은 분경통론(盆景統論)과 분경품제(盆景品第), 그리고 분품(盆品)의 세 가지이다.
분경통론에는 분재와 자연과의 관계 및 분재의 예술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분경품제는 분재의 품위를 논한 것으로서 노송과 매화나무 · 대나무의 세 가지를 삼우(三友)라 하여 최고로 손꼽았다. 끝으로 분품은 분재에 쓰이는 다양한 분의 종류를 평하였다.
중국분(中國盆)과 함께 국내에서 구워낸 갖가지 분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조선 후기에는 분재가 크게 성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임원경제지』의 예원지편(藝畹志篇)에는 분재가꾸기에 관련되는 갖가지 기술적 사항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치수영로기법(治樹令老奇法) · 안분법(安盆法) · 배분법(排盆法) · 교장법(窖藏法) 등의 항목이 보인다.
치수영로기법은 고목다운 운치를 가꾸어 내기 위한 방법을 설명한 것으로, 오늘날 실시되고 있는 방법과 다를 것이 없다. 안분법에는 가꾸는 자리에 관한 문제가 다루어져 있고 배분법은 관상을 위한 분재의 배열 요령이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교장법은 겨울철의 보호와 관리 요령에 관한 것이다.
한편, 분재로 가꾸어졌던 나무의 종류도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한층 더 다양해지는 경향을 보이며 그와 함께 서대초(書帶草)나 길상초(吉祥草) · 석창포 등의 초본식물도 적지 않게 가꾸어진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분재를 가꾸는 취미가 널리 보급되어 수종(樹種)이 다양해지는 한편, 분재에 어울리는 화분의 생산이 시작되며, 그와 함께 분재 가꾸기의 구체적인 기술을 서술한 책자도 간행되었다.
분재는 수려한 자연의 경관을 연상하고 그 운치를 즐기기 위하여 가꾸어지는 것이므로 그 대상이 되는 나무의 생김새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고려 때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전녹생이나 정몽주의 시 또는 고려 말기작으로 전해지는 자수(刺繡)와 강희안의 「분재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줄기의 굴곡이 매우 심한 이른바 번간(蟠幹)이라고 불리는 수형을 높이 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러운 생김새를 가진 문인목(文人木)을 즐기는 취향이 나타나면서 크게 바뀐다. 문인목이라는 것은 줄기가 약간의 굴곡을 보이되 비교적 밋밋하게 신장하여 상단부에 약간의 가지를 치는 수형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러한 명칭은 문인이나 묵객들의 기호에 들어맞아서 생겨난 것이다. 고려와 조선을 통하여 소나무와 매화나무가 분재의 주종을 이룬 것도 이 두 나무가 번간이나 문인목의 어느 수형에도 잘 어울리기 때문이며,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하나의 분 속에 세 그루,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모아 심어 산림의 원경(遠景)을 꾸며내는 방법이 있다. 즉 오늘날 모아심기분재라고 부르는 기법도 개발되어 있었다. 서유구는 이러한 분재를 앞에 놓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언덕이나 산봉우리 위에 올라앉아 있는 듯하여 여름의 더위도 잊을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랑방의 탁자 위나 책상머리에 놓아 즐겼으며 문갑(文匣) 위도 감상을 위한 좋은 자리가 되었다.
또한, 궁궐에 있어서는 침전(寢殿)의 후정(後庭)에 꾸며진 화계(花階) 위에 분재를 놓아 감상하기도 하였다. 화계는 풍수설(風水說)이 가리키는 바에 따라 집터를 잡는 경우 주건물의 배면(背面)에 생겨나는 사면을 평지화하기 위하여 고안된 방법이다. 다듬은 돌을 쌓아 계단과 같은 외모를 갖추게 하고 그 자리에 괴석이나 석련지(石蓮池)를 앉히고 꽃나무 등을 심는다.
그 가운데 알맞은 자리에 화강암을 네모지게 다듬어 꾸민 받침대를 놓고 여기에 분재를 앉혀 즐겼던 것이다. 경복궁의 침전이었던 교태전(交泰殿) 자리의 뒤에 꾸며진 아미산(峨嵋山)이라 이름한 화계 위에는 지금도 분재를 올려놓고 즐겼던 정교한 받침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의 분재는 잔가지에 이르기까지 철사를 감아 판에 박은 듯한 이상적이고도 정교한 생김새를 꾸며내는 것을 특징의 하나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분재는 그와는 달리 지나친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씨의 발로라 할 수 있으며 있는 그대로를 즐기자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정원에 심어놓은 나무에 대한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