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성종의 부마였던 맏형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 1477~1507)에게 학문을 배웠다. 23세 때인 1513년(중종 8) 진사가 되었고,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나, 같은 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주1되었다. 1521년(중종 16)에는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장흥에서 17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후 양주(楊州)로 이배되었다가 편의를 받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했다. 1543년(중종 38) 다시 등용되어 태인현감과 간성군수를 거쳤고, 상주목사를 지내다가 사망했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고 평가받았다. 특히 연작 형식의 묵죽도 병풍이나 화첩을 많이 남긴 문인화가로 이름이 높았다.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 2권에서 “묵죽(墨竹)에 뛰어난 인물로 현감 신잠이 있다[墨竹有縣監申潛].”라고 했고,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도 인용되었다.
전해지는 작품으로는 「심매도(尋梅圖)」, 「사계화조도(四季花鳥圖)」, 「묵죽도(墨竹圖)」 등이 있다.
상주목사 재임 중 청렴하고 근신하는 외임(外任) 관리로 뽑혀 주2 1습을 하사받았고, 상주 백성들이 덕성비를 세우기도 했다. 1668년(현종 9)에는 장흥 예향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