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盧禛: 1518~1578)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 · 칙암(則庵)이다. 기대승(奇大升) · 노수신(盧守愼) · 김인후(金麟厚) 등의 학자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옥계집(玉溪集)』은 원집 7권 4책, 속집 4권 2책의 목판본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원집 7권 4책, 속집 4권 2책으로, 권수에 정온이 지은 서(序)가 실려 있고 이어서 목록이 있다.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목록과 동일한 순서대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목록에는 세계와 연보가 권6에 들어 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목록 다음에 바로 수록되어 있다.
권1에는 시, 부(賦), 표(表), 전(箋), 조(詔)가 실려 있다. 시는 오언절구, 칠언절구, 오언율시, 오언배율, 칠언율시, 칠언배율, 오언고시, 칠언고시가 시체(詩體)별로 편차되어 있다. 권2에는 제문, 권3에는 행장과 묘비지(墓碑誌)가 실려 있다. 권4는 소(疏), 계(啓), 장(狀), 서(書) 등이고, 권5는 잡저, 주(奏), 논, 기(記), 서(序) 등이다. 이어서 세계도(世系圖)가 실려 있고 저자의 연보가 실려 있다. 권6부터는 외집(外集)으로서 권6에는 저자에 대한 묘도문자, 권7에는 제문이 실려 있다.
속집 권1은 시와 가(歌)이다. 시는 원집과 마찬가지로 시체별로 편차되어 있다. 권2에는 제문, 묘비지, 계, 장이 실려 있고, 권3에는 서(書), 잡저, 논, 책(策)이 수록되어 있다. 권4는 노진과 교류했던 인물들이 지어준 시와 만장, 묘표 등이 실려 있다. 권말에는 1873년 기정진(奇正鎭)이 지은 발문과 1871년 이교익(李喬翼)이 지은 발문이 실려 있고, “옥계선생 속집사편 세재계유 후천신간(玉溪先生續集四編歲在癸酉後川新刊”이라는 간기가 적혀 있다.
「기몽중작(記夢中作)」은 건강이 좋지 않은 노진이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으로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경을 노래한 것으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지 못해 갈등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야음(夜吟)」은 어지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현실 정치권을 떠나지 못해 고단한 노진의 심경이 잘 드러난 시이다. 「경부(敬賦)」는 자신을 지키는 길은 경(敬)에 마음을 두고 주1하는 데 있음을 천명한 내용이다.
노진은 여러 편지글에서 학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답이구암강이서(答李龜巖剛而書)」는 이정(李楨)에게 격물치지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글이고 「답강중보소독(答姜仲輔小牘)」은 강익(姜翼)과 『논어』의 주2에 대해 논한 것이며, 「여노과회서(與盧寡悔書)」는 노수신과 인심도심에 대해 논한 글이다.
「균전의(均田議)」는 그의 경제사상을 잘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당시 가장 큰 병폐가 빈부 격차와 토지겸병(土地兼倂)에 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균전제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또한 「사병무양의론(死病無良醫論)」은 ‘죽을병에 좋은 의원이 없는 상황’은 ‘나라가 위태로운데 훌륭한 재상이 없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며, 충신은 있는 힘을 다하여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책은 노진의 학문과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