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교란 청계천 하류로부터 여섯째 다리, 곧 광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 곳 주위에는 의(醫)·역(譯) 중인의 집단적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참가동인은 강위를 비롯하여 변진환(邊晉桓)·백춘배(白春培)·김재옥(金在玉)·이명선(李鳴善)·성혜영(成蕙永)·배전(裵㙉)·이용백(李容白)·박승혁(朴承0x9381)·유영표(劉英杓) 등이었는데, 이들은 특정한 시회장소를 가지지 않고 동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시회를 열었다.
그 중심처는 변진환의 해당루(海棠樓)로서, 시회를 가지고 나서 만든 시축(詩軸)인 『해당루상원첩(海棠樓上元帖)』을 남겼다. 강위는 그들 시회에서 읊은 시를 『육교연음집(六橋聯吟集)』이라는 시집으로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 때의 시회는 전 시대의 중인시사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사회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신분상의 질곡과 그 한계에 따른 울분과 자포자기적 심사를 토로하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보다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지식과 정보를 함께 나누는 장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후 개항기를 맞아 개화파로, 실천적 지식인으로의 변모를 보이게 됨으로써 오랜 세월에 걸친 위항인(委巷人)이라는 신분적·경제적 질곡에서 벗어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