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구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하와이에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한인 국민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윤병구(尹炳求)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949년
출생지
경기도 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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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하와이에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한인 국민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 독립운동가.
개설

일명 윤병구(尹炳求). 경기도 양주 출신. 개항 이후 일제 침략이 가중되자,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한인들의 단결과 친목을 도모하는 활동을 벌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3년 8월에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홍승하(洪承夏) · 박윤섭(朴允燮) · 안정수(安定洙) 등 예수교 감리교도들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하와이 한인사회의 친목단결, 민지계발(民智啓發)을 이룩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또한 그 이듬해에는 하와이 이주 한인들에게 불법적인 인민세를 징수하려는 주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투쟁을 벌여 한인들의 권익을 보호하였다. 그리고 하와이 오아후 섬의 에와농장에서 정원명 · 김성구 · 이만춘 · 김규섭 · 강영소 등과 함께 에와친목회를 발족시켜 신민회의 정신을 잇는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05년 7월에 포츠머스강화회의가 열리자 여기에 참가할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국권수호를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08년에는 다시 박용만(朴容萬) ·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해 그 해 7월 개최된 미국 민주당전당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뒤 미주지역 한인단체의 통합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되자,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첫 중앙대의회를 개최할 때 박상하(朴相夏) · 정원명(鄭元明)과 함께 하와이지방 대표로 참가해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다른 지역에서 선발된 12인의 대표와 함께 대한인국민회 헌장(憲章)을 제정하고 세금과 의무금 수납제를 규정하였다.

또한 1919년 4월의 필라델피아 한인연합대회에서는 송헌주 · 김호(金乎)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연합국의 강화회의에 참가할 대표로 지명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대한인국민회의 회장으로 당선되어 4,000명의 회원으로부터 의연금을 받아 2,000∼3,000달러의 자금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조달하였다. 그러나 1921년 이 회는 자금난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 뒤 미주지역에서 목사로 활동하던 중 1945년 4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국제연합 결성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로 선발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9(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독립운동사』1·3·4·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1·1972·1973)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1910년대 미주지역의 무장독립운동」(윤병석, 독립기념관 개관경축 학술심포지엄, 198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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