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윤병구(尹炳求). 경기도 양주 출신. 개항 이후 일제 침략이 가중되자,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한인들의 단결과 친목을 도모하는 활동을 벌였다.
1903년 8월에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홍승하(洪承夏) · 박윤섭(朴允燮) · 안정수(安定洙) 등 예수교 감리교도들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하와이 한인사회의 친목단결, 민지계발(民智啓發)을 이룩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또한 그 이듬해에는 하와이 이주 한인들에게 불법적인 인민세를 징수하려는 주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투쟁을 벌여 한인들의 권익을 보호하였다. 그리고 하와이 오아후 섬의 에와농장에서 정원명 · 김성구 · 이만춘 · 김규섭 · 강영소 등과 함께 에와친목회를 발족시켜 신민회의 정신을 잇는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05년 7월에 포츠머스강화회의가 열리자 여기에 참가할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국권수호를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08년에는 다시 박용만(朴容萬) ·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해 그 해 7월 개최된 미국 민주당전당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뒤 미주지역 한인단체의 통합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되자,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첫 중앙대의회를 개최할 때 박상하(朴相夏) · 정원명(鄭元明)과 함께 하와이지방 대표로 참가해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다른 지역에서 선발된 12인의 대표와 함께 대한인국민회 헌장(憲章)을 제정하고 세금과 의무금 수납제를 규정하였다.
또한 1919년 4월의 필라델피아 한인연합대회에서는 송헌주 · 김호(金乎)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연합국의 강화회의에 참가할 대표로 지명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대한인국민회의 회장으로 당선되어 4,000명의 회원으로부터 의연금을 받아 2,000∼3,000달러의 자금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조달하였다. 그러나 1921년 이 회는 자금난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 뒤 미주지역에서 목사로 활동하던 중 1945년 4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국제연합 결성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