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후기 김제군수, 사복시정, 장악원정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78년(숙종 4) 귀양에서 풀려나오자 학행으로 천거되어 1680년 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동몽교관이 되었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현감이 되었다가 진위령을 지내고 삭녕군수로 부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이(李珥) · 성혼(成渾)을 문묘로부터 출향(黜享)하려 하자 관직을 버리고 진위(振威)로 돌아왔다. 생활이 매우 곤궁했으나, 개의치 않고 날마다 『대학』[](E0014884) · 『중용』을 외우며 ‘격물궁리(格物窮理)’ 공부에 전심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김제군수가 되고, 이어 사복시정 · 장악원정을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 · 형조참판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17년 상신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를 전횡하자 상소해 그 잘못을 극론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뒤부터는 성리학에 전심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학』을 가장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 예설을 두루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관하여 논답한 것 등 20여 권이 있다. 또한 『악원고사(樂院故事)』 1책이 있는데, 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 설명하고, 악장(樂章)에 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수집해 엮은 것이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겸재집(謙齋集)』
주석
-
주1
: 조선 시대에, 임금이 신하의 부모에게 관작을 내리던 일. 시종(侍從)ㆍ병사(兵使)ㆍ수사(水使) 등의 아버지로서 70세가 넘는 사람에게 품계를 주었다. 우리말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