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한시이다. 작자가 1778년에 짓고 1785년에 서문을 붙인 초편본, 작자가 1790년에 직접 수정하여 1792년에 서문을 붙인 재편본의 두 가지 이본이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초편본은 4종으로 알려져 있다. ①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 ②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본 ③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 ④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4종이다.
「이십일도회고시」는 1790년에 유득공이 연경에 들어갔을 때에 수고본(手稿本)을 기균(紀昀)에게 주었다. 뒤에 청나라의 문인 조지겸(趙之謙)에게 전해졌고, 조지겸이 「이십일도회고시」를 『학재총서(鶴齋叢書)』에 편입하여 인간 되기도 하였다. 1785년에 자주(自註)까지 달아 그의 문집인 『영재집(泠齋集)』에 붙여 간행하였다.
1877년(고종 14)에 따로 별본으로 판간(版刊) 된 적이 있다. 「이십일도회고시」 앞에는 시의 내용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시의 뒤에는 시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사의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시의 분량은 칠언 절구 43수에 불과하지만 전체적인 규모는 38장 1책에 이른다.
유득공이 31세였던 1778년(정조 2)에 『동국지지(東國地志)』를 읽고 지었다. 칠언 절구 43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단군의 왕검성에서 비롯하여 고려조의 송도에 이르기까지 21개의 왕도(王都)를 읊은 작품이다.
「이십일도회고시」의 작품 수는 대체로 각 왕조의 규모와 그 문화의 크기에 따라 정하여졌다. 단군조선의 왕검성 1수, 기자조선의 평양 2수, 위만조선의 평양 2수, 한(韓)의 금마(金馬) 1수, 예(濊)의 강릉 1수, 맥(貊)의 춘천 1수, 고구려의 평양 5수, 보덕(報德)의 금마저(金馬渚) 1수, 비류(沸流)의 성천(成川) 1수, 백제의 부여 4수, 미추홀(彌鄒忽)의 인천 1수, 신라의 경주 6수, 명주(溟州)의 강릉 1수, 금관(金官)의 김해 1수, 대가야의 고령 1수, 감문(甘文)의 개령(開寧) 1수, 우산(于山)의 울릉도 1수, 탐라의 제주 1수, 후백제의 완산 1수, 태봉의 철원 1수, 고려의 개성 9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약하면, 고려 9수, 신라 6수, 고구려 5수, 백제 4수, 그 밖의 왕도에 대해서는 각 1수씩만을 읊고 있다.
「이십일도회고시」는 어린아이와 어린 계집종조차 듣고 외울 정도로 마음을 써서 지은 시이다. 유득공은 지난 시기의 도읍지에 대한 회고를 시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주체적인 기상을 드높이며 민족적 자각을 하여야 할 시기에 명나라에 대한 의리 따위나 찾고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저자의 생각이 문학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은 그 해에 연경에 들어갔던 박제가(朴齊家)와 이덕무(李德懋)가 반정균(潘庭均) 같은 청나라 문사들에게 「이십일도회고시」를 소개하였고 그들의 감탄을 받았다. 그리고 이정원(李鼎元) · 나빙(羅聘) · 심심순(沈心醇)과 같은 시인들로부터 제찬(題贊)까지 받았다.
「이십일도회고시」는 우리 역사의 지나간 모습인, 즉 민족적 삶의 총체적 양상을 각국의 왕도를 통하여 제시함으로써 우리 것을 새롭게 인식하려고 하는 역사적 대응 방식을 명쾌하게 보여 준다. 또한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도읍지를 회고하면서 감문 · 우산 · 탐라까지도 하나의 과거의 국가로 인정하고 있는 점을 통하여, 잊혀져 있는 부분에까지 두루 관심을 가지고자 한 저자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십일도회고시」는 유득공의 참신한 역사 의식을 강렬한 시 의식을 통해 드러낸 것으로, 나와 내 것을 찾으려고 하는 주체적 의식을 노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역사적인 실재뿐만 아니라 사화에 이르는 내용을 소재로 다루었다. 고도(古都)라는 한정된 공간과 그 왕조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을 수용함으로써 하나의 민족 서사시화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