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아호는 해사(海史). 서울 출신. 아버지는 이명선(李明善)이며 어머니는 백씨(白氏)이다. 명필 김석준(金奭準)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907년 배재학당을 수료하였다. 1909년 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였다. 1914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수료하고 1974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잠업기술 연수중 1910년 8월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YMCA에서 영문타자를 습득하였다.
이 때 이승만(李承晩) · 이상재(李商在) · 박교상(朴敎相) · 백관수(白寬洙) · 임병직(林炳稷) · 임병삼(林炳三) 등과 교분이 있었다. 1911년 경신학교장 비서 겸 영어교사로 최남선(崔南善)과 함께 근무하였다.
1914년 상해를 거쳐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1919년 대한독립단 회장, 1929년 대한인동지회 회장, 미주 하와이태평양주보 주필, 하와이 YMCA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 행서위원,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미국 워싱턴 주재 구미위원을 지냈고, 1946년 미국 뉴욕에서 한미무역회사를 설립하였다.
1947년 한인이민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한인이민법안의 미국의회 통과를 위해 조력하였고 대한올림픽위원회(KOC) 한국 대표, KOC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정회원으로 가입하는 데 조력하였다.
1948년 대한체육회 고문, 1949년 대한상공회의소 주미 대표, 그 해 워싱턴 주재 주미대사관 건물구입 및 한국 최초의 함정인 백두산호를 구입, 주선했다. 1953년 40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다. 한국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58년 대한상공회의소 대표로 아세아지역 국제상공회의에 전택보(全澤珤)와 참석(마닐라)하여 대한상공회의소를 국제상공회의소에 가입시켰다.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한국해광주식회사를 설립해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60년 원용석(元容奭)과 혜인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 해 동계올림픽대회 한국선수단장(뉴욕), 1963년 민주공화당 당무위원, 최두선(崔斗善) · 김활란(金活蘭) · 오천석(吳天錫) 등과 한미협회(韓美協會)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다.
김용완(金容完) · 전택보 등과 한국경제협의회를 창설(현재 전국경제인연합회)하여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 미주지역경제사절단장, 일본 · 대만 등의 민간경제사절단으로 민간경제 외교를 증진, 조력하였다.
1979년 미국에서 개최된 한국미술5천년전을 계기로 문화재(현, 국가유산), 개인소장 도서 및 독립관계 자료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1982년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 1987년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고문, 1989년 백범기념사업회 고문, 한국시청각장애자복지회장, 광복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75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1982년 보관문화훈장 및 세계종교사회기구인 메이슨으로부터 33급 작위와 마샬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인간 이승만』 · 『世紀를 넘어서』 등이 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