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고성(古城)」과 1927년 제7회 미전에서 「역전의 큰길」이 잇달아 입선했다. 제2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 입학했으나 경제 사정과 건강 문제로 6개월만에 귀국했다. 1929년 제9회 미전에서 「하(夏)의 온실내(溫室內)」, 1930년 제10회 미전에서 「해지렬 때」와 「사루단방크」, 1931년 미전에서 「빙좌」, 1932년 제11회 미전에서 「갓바」와 「화호(花壷)」, 1933년 제12회 미전에서 「탕춘(蕩春)」, 제15회 미전에서 「춘자(春姿)」 등 1943년 미전까지 13회에 걸쳐 18점이 입선, 특선을 하며 화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이후 『동아일보』와 『 조선일보』, 『 조광』, 『여성』, 『 소년』 등 신문과 잡지에 이무영, 장혁주 등 문인의 작품 등 수많은 삽화와 표지화를 그렸다.
해방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 서기장, 조선아동문화협회 결성, 고려문화사 편집위원, 1948년 11월에는 조선미술동맹 위원에 선정되었으며, 『 신천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문인들의 책 장정을 도맡았다. 1950년 1월 국민보도연맹에서 주최하는 제1회 국민예술제전에서 메시지를 낭독했으며, 이외에도 어린이 만화와 시사만화 등을 그려 한국현대만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졌다. 1950년 9월 한국전쟁 때 남조선미술가동맹 서기장으로 활동하다가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이후 물질문화유물보존위원회의 제작부장, 조선미술가동맹 출판화분과위원장, 미술제작소 회화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52년부터 1963년에 걸쳐 안악 1∼3호분, 강서대묘, 공민왕릉 등의 고분벽화를 모사했다. 이밖에도 수채화 · 유화 · 펜화를 비롯해 각종 출판물의 삽화와 그림책의 원화제작 등 다채로운 활약을 했다. 1976년 폐암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