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 가장 널리 신봉되었던 보살신앙 중의 하나이다. 지장신앙은 ≪대승대집지장십륜경 大乘大集地藏十輪經≫ 10권, ≪지장보살본원경 地藏菩薩本願經≫ 2권, ≪점찰선악업보경 占察善惡業報經≫ 2권 등의 경전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신앙이다. 대승경론에 등장하는 불보살은 심성(心性)의 권화(權化)를 저마다의 상징성으로 삼고 있는데, 지장은 ‘비원(悲願)’의 상징이다.
지장보살은 육도(六道)에 시현하여 영겁하도록 괴로움에 허덕이는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운다. 특히,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혹은 염라대왕의 몸으로, 어떤 때는 지옥졸(地獄卒)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고통받는 지옥 중생에게 설법한다고 하였다. 방위(方位)면으로 보면 남쪽에 해당된다. 그 지장보살을 외호(外護)하는 관정대왕(灌頂大王)은 특히 지장신앙이 성행하게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즉, 관정대왕은 세 가지 힘으로써 지장보살을 부르는 중생을 보호한다고 한다. ① 상대방 군사를 항복받는 제왕건립(帝王建立), ② 농사가 순조롭고 음식을 풍부하게 하는 전택건립(田宅建立), ③ 공업·상업이 순조롭고, 온갖 즐거움이 구비되는 재보건립(財寶建立) 등이다. 이에 따르면 보법보불(普法普佛)의 법(法)을 설하고, 지장보살의 예참(禮懺)을 행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것이 바로 지장신앙의 요체(要諦)이다.
중국에서는 그러한 신행(信行)을 ‘지장교(地藏敎)’라고 하였으며, 특히 수당대(隋唐代) 이후에 그 숭배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신행보다는 지장보살의 본원력에 따라 조상들의 사후(死後) 구원을 위한 믿음으로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문헌에 보이는 신라 지장신앙과 그 신앙의 모임인 점찰법회(占察法會)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진평왕 때 원광(圓光)의 점찰보 개설 및 비구니 지혜(智惠)의 점찰법회 개설에 관한 기록이다.
원광이 수나라에서 귀국한 직후, 가서사(嘉栖寺)에 점찰보를 설치하여 항규(恒規)로 삼았다는 것과 비구니 지혜가 안흥사(安興寺)의 불전(佛殿)을 수리할 때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의 현몽대로 그 일을 완수하였으며, 성모의 가르침에 따라 점찰법회를 설함을 항규로 삼았다는 것이다.
점찰보란 ≪점찰경≫에 의하여 윤리생활에 박차를 가하고 수도에 힘쓰는 신도조직이다. 신도들은 이 신행계(信行契)를 유지,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 등을 희사해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한 다음 결사운동(結社運動)을 행하였다. ≪점찰경≫에 의하면 먼저 목간(木簡)을 만들어 그 위에 죄과(罪過)의 이름을 적어 놓고 이를 던져서 나온 죄과목을 보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고쳐 나갈 것을 권장하고 있다.
특히, 삼세(三世)의 죄과를 안 연후에 지장보살에게 예배하고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죄업중죄(罪業重罪)를 소멸시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점찰보의 운영은 백성들의 윤리의식을 확립시키려는 새로운 불교운동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지장보살에 관한 현세 이익적 인간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원시적 심성과 함께 재미있는 ‘놀이’ 욕구를 병행함으로써 점찰보를 운영하는 신라적 수용이었다.
신라의 지장신앙은 삼국통일 이후 진표(眞表)에 의하여 또 다른 형태로 집약 발전되었다. 진표의 지장신앙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신방(神昉)이었다. 그는 현장(玄奘) 문하에서 역경(譯經)에 종사하였는데, 지장신앙에 관한 교학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방은 유식(唯識) 계통의 학승(學僧)이었으나, 신행면에서는 지장교의(地藏敎義)를 중심으로 하면서, 진표의 지장신앙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진표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스승 순제(順濟)에게서 ≪점찰선악업보경≫을 전수받았다고 하였다. 그 뒤 참회정진을 거듭하여 지장보살을 친견(親見)한 뒤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표의 제자로는 영심(永深)·융종(融宗)·불타(佛陀) 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스승 진표의 가르침에 따라 속리산의 길상초(吉祥草)가 있는 곳에 절을 세우고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점찰법회를 개설하였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볼 때 진표의 시대에 이르러 점찰보는 비로소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상면으로 볼 때, 진표의 지장신앙과 원광의 지장신앙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즉, 경덕왕 이후의 신라불교는 태평성세에 따르는 타력신앙(他力信仰)과 주술적 의식주의(儀式主義)가 왕성해졌다. 원광 때의 지장신앙은 통일을 향한 국민의식의 고양에 주안점이 있었지만, 진표의 경우 불교윤리의 타락을 경계하는 시대윤리에 대한 면이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진표와 그 제자들이 보여주는 사신(捨身)과 살신(殺身)의 구도행(求道行)은 당시 불교계의 윤리의식 타락을 경계하는 ‘상징성’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진표의 지장신앙은 이후 신라 불교신앙의 주류로 인식되어 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오대산신앙은 동서남북의 사대(四臺)에 중앙을 합한 각 오대에 별개의 불보살을 봉안하고, 그 예참을 행하는 신행결사(信行結社)이다.
이 오대산신앙은 7, 8세기경에 금강산신앙(金剛山信仰)과 함께 신라에 뿌리를 내렸으며, 오대 가운데 남방이 지장방(地藏房)이다. 그때의 수행내용은 낮에 ≪지장경≫과 ≪금강경≫을 독송하고 밤에 점찰예참을 행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신라인 김지장(金地藏)은 중국에 지장신앙을 펼친 인물로 주목을 모은다. 그는 757년(경덕왕 16)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794년(원성왕 10) 99세로 입적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그를 지장보살의 화현(化現)으로 믿었으며, 그 유골을 모신 탑을 육신전(肉身殿)이라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김지장의 기일(忌日)을 맞아 향과 촉(燭)을 땅에 꽂고 유지(油紙)를 태웠는데, 그것을 지장향(地藏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기록은 지장신앙이 민간신앙으로 유포된 하나의 표본이며, 우리 나라 불교의 중국을 향한 신앙 역류현상의 한 단면을 나타내 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930년(태조 13) 강원도보현사(普賢寺)에 지장선원(地藏禪院)이 건립되었다. 그것은 낭원대사(朗圓大師)오진(悟眞)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선(禪)과 지장신앙의 습합(習合)을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이다.
조선시대에는 지장신앙에 관한 영험적 사례가 주종을 이루는데, ≪동학사지장계서 東鶴寺地藏稧序≫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는 특히 지장신앙을 예참하는 모임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모임은 주로 지장예참을 통한 지옥중생의 제도 등 이타행(利他行)을 통한 자리행(自利行)이 강조되었다. ≪지장경≫의 영험과, 지옥 중생제도를 위한 의식집(儀式集)으로는 ≪지장경본원참의 地藏經本願懺儀≫ 1책이 전해 오는데, 조선 중기·후기에 특히 널리 유통되었다.
고려·조선 시대의 지장신앙은 고매한 이론적 배경을 갖는다기보다는 현세 이익적인 민간신앙의 형태로 유포되어 왔다. 본질적으로 지장신앙은 말법신앙(末法信仰)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 나라의 지장신앙 형태는 말세(末世)의 의식과 유토피아의 현현이라는 면보다는, 오히려 윤리의식의 고양에 그 목적을 두고 발전해왔다. 이것은 우리 나라 불교의 사상적 특성에서 연유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우리 나라 불교는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일승(一乘)의 회향(回向)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지장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불교(宗派佛敎)를 형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여타의 신앙형태까지를 포섭함으로써, 하나의 전체로 불교신앙을 수용하고 있다.
도입 초기의 지장신앙은 불교 토착화와 윤리의식의 앙양이라는 점으로 평가될 수 있다. 후기에는 귀감적 참법(龜鑑的懺法)의 도입으로 이타행을 통한 자비의 실현과 새로운 가치질서 확립의 면을 강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