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보살화는 사후세계의 교주인 지장보살을 그린 불화이다. 지장보살은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마저도 포기한 대비의 보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진표율사에 의해 지장보살 신앙이 전파된 이래 크게 유행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지장보살이 명부전의 주존으로 봉안되면서 불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지장보살도에는 단독으로 그리는 독존도가 있는데 두건을 쓰고 보주와 석장을 들고 있다. 협시보살이나 여러 보살과 함께 그리는 지장삼존도, 지장보살도도 있다. 또 지장시왕도는 시왕을 함께 묘사하여 대웅전 등의 중단탱화로 조성되었다.
지장보살은 관세음보살과 함께 우리나라 2대 보살의 하나로, ‘위로는 부처의 도를 구하며,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도를 실천하며, 천(天) · 인(人) · 아수라(阿修羅) · 축생(畜生) · 아귀(餓鬼) · 지옥(地獄) 등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하기 위해 성불(成佛)마저도 포기한 대비(大悲)의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인도 브라만교에서 대지의 신으로 신앙하던 지천(地天, prthivi)에서 유래하였지만,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보살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6세기경 활약한 화가 장승요(張僧繇)가 선적사(善寂寺) 벽에 지장보살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둔황석굴에는 9∼10세기경의 지장보살도가 50여 점이나 전하고 있어 이른 시기부터 지장보살 신앙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중엽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지장보살 신앙이 전파된 이래, 같은 시기 석굴암의 감실에 지장보살좌상이 조성될 정도로 신앙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지장보살 신앙은 아미타 신앙과 결합되면서 크게 인기를 모았고, 명부전의 주존으로 봉안되면서 불화와 조각이 다수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추선공덕(追善功德: 죽은 사람의 기일에 행하는 불사)과 영가천도(靈駕薦度)를 위한 명부전의 주존이 됨에 따라 주로 죽은 이의 명복을 빌고 예수재(預修齋)의 본존으로서의 성격을 확립하게 되었다.
지장보살도의 형식은 독존도, 지장삼존도, 지장보살도, 지장시왕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첫째, 독존도는 승형(僧形) 또는 두건을 쓴 모습으로 한손에는 보주, 한손에는 석장을 들고 당당하게 서있는 지장보살을 단독으로 그렸는데, 고려시대에 주로 조성되었다. 일본 젠도지(善導寺) 소장 지장보살도는 아름다운 초화문이 시문된 가사를 입은 귀공자형의 지장보살이 우아한 자세로 석장을 받든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가히 고려시대의 지장보살도 중 백미라 할 수 있다. 일본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 소장 지장보살도에는 두건을 쓰고 한 손에는 보주, 한 손에는 석장을 든 지장보살이 그려졌다.
둘째, 지장삼존도는 지장보살과 협시인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을 그린 것이다. 도명존자는 당나라 때의 승려로 지장보살의 좌 협시인데, 고려시대에는 노승의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조선시대 이후 사미승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협시인 무독귀왕은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에 등장하는 인물로 보통 제왕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합장하거나 경궤(經櫃)를 든 모습이다. 일본 엔가쿠지(圓覺寺)소장 지장삼존도는 중앙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반가좌하였으며 왼쪽에는 석장을 든 도명존자, 오른쪽에는 경궤를 든 무독귀왕이 지장보살을 향하였고, 지장보살의 발아래 금모사자(金毛獅子)로 추정되는 동물이 웅크리고 있다.
셋째, 지장보살도는 지장보살 삼존에 4∼8구의 보살 및 기타 권속이 배치된 형식이다. 고려시대에는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지장보살도에서 보듯이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등이 표현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그 밖에 보살과 동자, 옥졸, 지옥장군 등이 중요한 협시로 표현된다. 이 형식은 주로 명부전의 후불화로 조성되었다.
넷째,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과 시왕을 함께 묘사한 것이다. 지장보살의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가 시립하고 그 주위를 시왕 및 판관, 사자, 동자, 옥졸, 장군들이 둘러싼 형식이다. 이 형식은 이미 9∼10세기경 돈황의 지장도에서도 보이며,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널리 제작되었다. 시왕이 등장함에 따라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도 자연히 많아져서, 대개 20∼30명의 인물이 표현되어 화면은 여백이 거의 없이 빽빽하다.
셋째 형식이 주로 명부전의 후불화로 제작되었던 반면, 지장시왕도는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의 중단탱화(中壇幀畵)로 조성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1546년 지장시왕도(일본 彌谷寺 소장)과 1562년 청평사 지장시왕도(일본 光明寺 소장)처럼 지장삼존과 시왕만이 표현된 간단한 형식이 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지장보살의 대좌 아래 2명의 동자를 큼직하게 표현한 형식, 화면의 상단 좌우로 육도중생(六道衆生)의 고뇌를 구원하는 6보살인 용수보살(龍樹菩薩) · 상비보살(常悲菩薩) · 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 · 관음보살 ·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 지지보살(持地菩薩)을 더한 형식 등 다양한 형식의 지장보살도가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