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창화집 ()

한문학
문헌
고려 전기에, 제16대 왕 예종이 문신 곽여 등과 창화한 내용을 수록한 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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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고려 전기에, 제16대 왕 예종이 문신 곽여 등과 창화한 내용을 수록한 시문집.
내용

『예종창화집((睿宗唱和集)』에 관한 기록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예종창화집발미(睿宗唱和集跋尾)」(『동국이상국집』 권21), 『용재총화』 권8과 『해동문헌총록』의 「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 등에 보인다. 이규보는 위의 글에서 군신간의 창화를 태평성대의 성사(盛事)로 기리는 한편, 당시에 태어나지 않아 그 말석에 참여하지 못해 아쉽다고 하였다. 예종(재위 11051122)은 고려가요 「벌곡조(伐谷鳥)」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은 바 있는데, 이 군신간의 창화집을 통해 호문(好文)의 군주로서의 면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용재총화』에는 『예종창화집』이 2질(帙)이라 하였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한편 고려 제25대 왕 충렬왕은 『용루창화집(龍樓唱和集)』을 남긴 바 있다.

예종과 창화한 곽여는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자가 몽득(夢得)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문장, 도교, 불교, 의학, 약학, 음양학, 활쏘기, 말타기, 거문고, 바둑에 두루 능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내고 금주(金州, 김해)에 은거하고 있을 때 궁중으로 불려 들어갔다. 곽여가 항상 검은 두건을 쓰고 학창의(鶴氅衣: 학의 날개처럼 만든 옷)를 입고 예종을 모셨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금문우객(金門羽客: 궁궐을 드나드는 도사, 신선)이라 불렀다. 뒤에 예종이 약두산(若頭山: 개성 동쪽에 있는 산) 한 봉우리를 하사하여 살게 하면서 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였고, 죽자 진정(眞靜)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예종이 곽여의 산재(山齋)로 미행(微行)을 나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10운 시를 써서 벽에 걸어두고 돌아가자 곽여가 그 시에 화답한 일화(『파한집』 권중)가 유명하다. 곽여의 화답시는 「동산재응제시(東山齋應製詩)」(『동문선』 권11)이다.

의의와 평가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문선(東文選)』
『용재총화(慵齋叢話)』
『파한집(破閑集)』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해동문헌총록』 소재 고려 문집 연구─부전(不傳) 문집을 중심으로」(김건곤, 『장서각』 18,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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