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형랑주사」는 신라 진지왕의 아들 비형랑(鼻荊郞)에 관한 주사(呪辭)이다. 「비형랑주사」는 『삼국유사』 「도화녀 비형랑(桃花女鼻荊郞)」조에 수록된 비형랑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비형랑은 왕의 사령(死靈)이 낳은 아들로 귀신을 부릴 줄 알 뿐만 아니라 길달 같은 귀신을 잡아 죽이는 영력을 소유한 인물이다. 「비형랑 주사」는 왕 혼령의 생자를 찬양하고, 강력한 벽귀(?鬼)의 기능을 지녔으며, 비형랑의 존재성과 성소의 지속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비형랑은 처용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닌 인물로 여겨지면서 벽사의례로 신봉되고 신앙화되었다.
「비형랑주사」는 『삼국유사』 「도화녀 비형랑(桃花女鼻荊郞)」조에 수록된 비형랑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제25대 사륜왕의 시호는 진지대왕으로 성은 김씨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또 음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켰다. 이에 앞서 사량부(沙梁部)의 서녀(庶女)가 자태와 얼굴이 아름다워 모두 도화랑(桃花娘)이라 했다. 왕이 듣고 관계하려 하자, 도화녀는 남편이 있어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남편이 없으면 되겠냐고 묻자 그땐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이해에 왕이 폐위된 뒤 죽고, 2년 뒤에 남편도 죽었다. 10여일이 지난 밤중에 왕이 생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녀의 방에 와서, 이제 남편이 죽었으니 약속을 지키라고 하였다. 그녀가 가볍게 승낙하지 않고 부모에게 여쭈니 임금의 명령을 어찌 피하겠느냐며 그녀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늘 오색구름이 집을 감싸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이 지나자 왕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이로 인해 임신하였고 달이 차서 해산하게 됨에 천지가 진동하였다.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하였다.
진평대왕이 그 특이한 소문을 듣고 비형랑을 불러 궁중에서 키웠는데, 15살이 되자 집사의 벼슬을 주었다. 매일 밤 먼 곳으로 달아나 귀신들을 거느리며 놀았다. 이를 안 왕의 명령으로 귀신들을 시켜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으므로 그것을 귀교(鬼橋)라 하였다. 왕이 또 귀신무리 중에 인간 세상에 나와서 정치를 보좌할 만한 자가 있느냐고 묻자, 비형은 길달을 데리고 왔다.
길달은 충직하게 왕정을 보좌했는데 어느 날 여우로 둔갑해 도망쳤다. 비형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으므로 그 무리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달아났다. 그때 사람들이 사(詞)를 지었는데, “성스러운 임금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의 집이 여기로다/ 날뛰는 온갖 귀신의 무리들아/ 이곳에 함부로 머물지 말라”라고 하였다. 민간에서는 이 가사를 써 붙여서 귀신을 쫓았다.
비형랑은 정령잉태(精靈孕胎, 죽은 영혼과 살아 있는 여인이 정을 통해 아들을 낳는 것)로 신이하게 태어난 인물이다. 그래서 「비형랑 주사」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왕 혼령의 생자를 찬양한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민중들의 신앙이 두터웠을 것이다. 둘째는 보다 강력한 벽귀(辟鬼)의 기능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처용의 경우 춤과 노래로 아내와 간통하는 역신에게 관용을 베푸는 반면 비형랑은 달아난 길달을 다른 귀신을 시켜 죽이는 보다 강력한 축역의 능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귀신의 무리들이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달아났다는 기록은 이에 대한 실증인 셈이다.
셋째는 비형랑의 존재성과 성소의 지속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형랑의 존재성은 “성스러운 임금의 혼이 아들을 낳았다(聖帝魂生子)”는 대목에서 지속된다. 음란하여 정치를 그르쳤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폐한 왕을 성제라고 칭하는 것에서 비형랑의 능력을 부추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소의 지속성은 그러한 성제의 아들이 존재하는 이곳에는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는 강한 위협과 명령을 통해서 지켜진다.
특히 『고려사(高麗史)』 권54 「지(志)」 권8 「오행(五行)」 2에 최씨 집권의 최고 권력자인 최우(崔瑀)가 목랑(木郞)을 믿고 의지한 예나, 정중부 막하에서 세력을 과시하던 이의민이 두두을〔豆豆乙, 목매(木魅)〕을 섬긴 예,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주 남쪽 10리에 왕가수(王家藪)라는 곳에서 목랑〔목신(木神)〕인 두두리(豆豆里)를 제사 지냈는데 비형랑 이래로 믿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이러한 존재성과 지속성은 확인된다.
이는 이학규(李學逵)가 문집 『낙하생전집(洛下生全集)』 「영남악부(嶺南樂府)」에서 「비형랑주사」의 신격화에 대해 “사람과 귀신의 만남은 정상이 아니니/ 비형랑의 출생은 정말로 황당하도다/ 남쪽에 돌을 다듬도록 누가 명했더냐/ 흥륜사 여우 죽임은 더욱 알기 어렵네/ 두두니 목랑이니 이름도 어질지 못하여라/ 문에 신 붙이고 급히 주문외니 아! 어리석도다”라고 경계한 내용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입증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형랑주사」를 신앙화했으면 이렇게까지 경계를 하고 있나 하는 점에서 그렇다.
「비형랑주사」는 지금까지 단순히 귀신 이야기 정도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비형랑은 왕의 사령이 낳은 아들로 귀신을 부릴 줄 알 뿐만 아니라 길달 같은 귀신을 잡아 죽이는 영력을 소유한 인물이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처용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닌 인물로 여겨지면서 민간에서 실질적인 벽사의례로 신봉되고 신앙화된 사례가 보인다.
그러한 점은 첫째, 비형랑의 출생에서부터 입신의 경지에 이르기까지가 하나의 완벽한 서사구조로 이루어졌다. 둘째, 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들까지도 신봉했다. 셋째, 민간에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신격화되었다는 것 등에서 확인된다. 이로써 볼 때 「비형랑주사」는 “귀신을 데리고 노는 데다(率鬼衆遊)” “다른 귀신을 시켜 길달을 죽이는(使鬼捉殺)” 비형랑의 신통력과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고(一夜成大橋)” “대전을 짓는(建大殿)” 두두리의 신기력이 신격화되면서 오랫동안 하나의 민간신앙으로 숭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