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시 ()

윤선도 종가 문적 중 산중신곡 오우가
윤선도 종가 문적 중 산중신곡 오우가
고전시가
개념
농촌 전원의 풍물과 인정의 아름다움 등 소박한 생활정취를 묘사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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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전원시는 농촌 전원의 풍물과 인정의 아름다움 등 소박한 생활 정취를 묘사한 시이다. 고려 중후기 문인들이 성리학을 배경으로 전원, 전원시를 애호하기 시작하였다. 전원시는 조선 시대 16∼17세기에 크게 유행하여 시조, 가사, 한시로 창작되고 향유되었다. 조선 시대의 강호가도는 산수시와 자연시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중국에서는 도연명의 시들을 대표적인 전원시로 인식하고 있다. 이건청은 1930년대 한국의 전원시와 서구의 전원시는 전원에 귀의하여 소박한 삶을 지향한다는 본질적인 면이 일치한다고 평가하였다.

정의
농촌 전원의 풍물과 인정의 아름다움 등 소박한 생활정취를 묘사한 시.
개설

전원시(田園詩)는 자연 가운데, 농촌 전원의 풍물(風物), 인정(人情)의 아름다움[美]을 그린 시이다. 조선시대 치사한객(致仕閑客)과 당쟁 하의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이들에 의해 발견된 자연의 미와 그 생활을 노래한 강호가도(江湖歌道)는 산수시와 자연시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 중 전원시는 농촌 전원의 소박한 생활정취를 그린 시이다. 고려 중후기 문인들이 성리학을 배경으로 전원, 전원시를 애호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시대 16∼17세기에 크게 유행하여 시조, 가사, 한시로 창작되고 향유되었다. 일제강점기 특히 1930년대 유행한 한국 전원시는 전래의 전원시적 토양에 서구적 전원시의 요소를 수용하면서 전개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을 떠나 자연에 들어간 이들이 거기서 참된 자연의 미를 발견, 거기에 도취하여 늙어감과 세상사를 잊고 오직 자연의 벗이 되어 자연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 생활을 읊은 시가를 강호가도(江湖歌道)라고 한다. 이 강호가도에 대해 최진원(崔珍源)은 “그것은 산수시와 전원시를 포괄한다.”고 하였다.

전원시라는 용어는 고려 때 이규보 등으로부터 조선 전기의 서거정(徐居正), 조선 중기 이후 이안눌(李安訥), 조익(趙翼), 오원(吳瑗), 박제가(朴齊家) 등의 글에서 보이며, 전원시인(田園詩人)이란 말도 윤선도(尹善道), 정약용(丁若鏞), 이덕무(李德懋), 유희춘(柳希春), 서영보(徐榮輔) 등의 글에서 보인다. 이 전원시가 활발하게 창작된 것은 16∼17세기 조선의 사대부들에 의해서였다. 일제강점기에 서구의 전원시가 소개되면서 한국의 전원시는 전통적인 전원의 내용에 서구적 전원시의 요소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에서는 중국 동진(東晋)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대(宋代) 초기에 걸친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시들을 대표적인 전원시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전원시를 산수시와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내용

전원시는 농촌 전원의 소박한 생활정취를 그린 시이다. 최진원은 고산 윤선도의 “석양 넘은 후에 산기(山氣)ᄂᆞᆫ 됴타마ᄂᆞᆫ/ 황혼이 갓가오니 물색(物色)이 어둡ᄂᆞᆫ다/ 아ᄒᆡ야 범 므셔온ᄃᆡ 나ᄃᆞᆫ니디 마라”( 『산중신곡(山中新曲)』 「일모요」)를 두고 ‘노을에 물들은 산기(山氣)’, ‘모연(暮烟)에 감싸여 가는 물색(物色)의 어두움’, 이 두 정경에서 우리는 물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개 짖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 소리 때문에 산속의 적막 속으로 빨려 들게 된다. 때로는 으스스함을 느끼면서. 그러나 ‘아해야 범 무서운데 나다니지 마라’에 이르면 그 적막은 깨어지고 포근함에 잠기게 된다. 그것은 소박한 인정미(人情味)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이렇다면 이 ‘은근한 인정미’는 곧 ‘멋’이다. 이렇듯 『산중신곡』에는 인간충실(人間忠實)이 넘치고 있다. 그것은 단세포적 음풍농월(吟風弄月)에서 벗어난 전원시의 세계다.”라고 하여 윤선도의 『산중신곡』을 전원시로 보고 있다. 방촌(厖村) 황희(黃喜, 1363∼1452)의 ‘대추볼 붉은 골에’,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짚방석 내지 마라’,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동창이 밝았느냐’ 등도 전원시로 규정할 수 있다.

박종훈은 조선후기 한시 사가(四家)인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9∼1807), 형암(炯庵) 이덕무(李德懋, 1741∼1793), 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 시들 중 전원시에 해당하는 시편들을 선별하여 당시 농촌의 생활, 풍속, 고통과 정감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공통점을 찾아내었다. 시조와 가사 장르가 추구하였던 ‘은근한 인정미’보다 폭넓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건청은 조선조의 전원시와 서구의 전원시의 특징을 밝힌 후 일제강점기 특히 1930년대 한국 전원시의 특징을 제시하였다. 농경문화의 산물인 조선조의 전원시와 기독교 사상을 토대로 한 목축문화의 서구 전원시는 세부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면들이 있지만 현실적 가치를 떠나 전원에 귀의함으로써 소박한 삶을 지향한다는 본질적인 면은 일치한다. 1930년대 한국 전원시는 전원 지향의 전래적 토양 위에 서구 전원시의 가치와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전개의 장을 열었다.

현황

오늘날에는 전원시라는 문학 경향이 있지는 않지만, 현대에 들어 현대의 가속화된 물질문명과 고도의 산업화 속에서 생태계를 보존해야 한다는 의식이 고조되고 이를 문학으로 표현한 생태문학(생태시)이 등장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전원시는 고려 중후기부터 창작되었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창작되고 향유되었으며, 현실과 자연(전원)을 상황에 따라 오갔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전원은 현실의 고민을 풀어내는 공간이었고, 삶의 여유를 누리는 공간이었다. 전원시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서구 전원시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전원시의 토양 위에 서구 전원시의 요소를 수용하여 새로운 창작의 장을 열어 나갔다. 전원시는 현실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 순진무구함을 노래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참고문헌

「자연시조에 나타난 녹색담론」(류해춘, 『시조학논총』37, 2012)
「한시 ‘사가(四家)’의 전원시 비교 고찰」(박종훈, 『동방학』18, 2010)
「강호가도와 산수시전원시」(최진원, 『도남학보』14, 1993)
「시조해석의 일시점」(최진원, 『모산학보』1, 1990)
「한국 전원문학의 전통과 그 현대적 전이양상」(김병국, 『한국문화』7, 1986)
「한국전원시 연구」(이건청,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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