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시는 자연 풍경을 묘사하여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 시이다. 조선 시대 벼슬을 버리고 한가로이 지내는 사대부들에 의해 발견된 자연의 미는 성리학과 긴밀한 관련을 가졌다. 즉, 산수를 즐기면서도 그 속에서 ‘도의(道義), 도체(道體)’를 찾는다는 것이 사대부들의 산수관이었다. 전통적인 산수, 전원의 개념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아와 하나가 된 자연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산수시는 오늘날까지 각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시로 지어져서 우리의 미감을 촉발시켜 왔다. 산수시와 비슷한 전원시는 그 의미를 구별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산수시는 자연의 산과 물, 나무와 풀, 짐승 등을 소재로 하여 그 아름다움[美]을 묘사한 시이다. 조선시대 치사한객(致仕閑客)과 당쟁하의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사대부들에 의해 발견된 자연의 미는 그들의 이념인 성리학과 긴밀한 관련을 가졌다. 산수를 즐기면서도 그 속에서 ‘도의(道義), 도체(道體)’를 찾는다는 것이 조선 사대부들의 산수관이었다. 퇴계 이황의 ‘사시가흥(四時佳興)’( 〈도산12곡〉)의 흥은 이념적 감동으로서의 흥이고, 율곡 이이의 “흥을 계워 하노라”( 〈고산구곡가〉)의 ‘흥’은 도학적 기반 위에서 ‘서정으로서의 흥’이며, 고산 윤선도의 ‘나믄 흥’( 〈어부사시사〉)의 흥은 도학과 관련짓지 않은 ‘서정으로서의 흥’이었다. 그리고 이 세 노래의 흥의 차이는 모두 ‘성정지정(性情之正)’의 안에서 보여지는 것이다.
도남(陶南) 조윤제(趙潤濟)는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2)과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를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창도자(唱導者), 참된 자연미(自然美)의 발견자라고 하였다. 이는 두 사람이 치사귀향(致仕歸鄕: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하여 자연에 안겨 자연의 미에 도취하여 나이와 세상사를 잊고 오직 자연의 벗이 되어 자연을 응시하고 자연과 더불어 상부상침(相浮相沈)하면서 그 생활을 시가로 읊었기 때문이다.
강호가도에 대해 최진원(崔珍源)은 “자연을 읊은 조선시가의 문학사조다. 그것은 산수시와 전원시를 포괄한다. 강호가도에는 불만 불평이 거의 없다. 그 까닭은 산수시 전원시에 대한 장르 인식 때문이라 생각된다. 즉 산수시는 자연의 미를 읊은 것이고, 전원시는 농촌의 낙(樂)을 읊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개념 규정을 하였다. 그러면서 산수시에 대해 “산수시는 풍경(Landscape-Scinery)을 그리는[묘사, 描寫]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산수시는 산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흥(興)’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데, 초기에는 조선 사대부의 이념인 성리학과 산수자연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이황의 산수시는 산수자연에서 ‘자연의 이(理)’를 발견하고 그것에 감동하는 ‘이념적 감동’의 ‘흥’을 나타내고, 이이의 산수시는 도학적 기반 위에서 ‘서정으로서의 흥’을 나타내며, 윤선도의 산수시는 도학과 분리된 ‘서정으로서의 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자연에 대한 애호(愛好)를 담은 한시가 김극기(金克己), 이규보(李奎報) 등에 의해 지어지며, 이러한 전통은 조선 중기 송순, 백광훈(白光勳), 조선 후기 이서구(李書九), 정약용(丁若鏞), 구한말 황현(黃玹) 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전통적인 성정론(性情論)에 근거한 조선 후기의 산수시론은 근대기 정지용(鄭芝溶)에게 이어졌다.
산수라는 용어는 일찍부터 사용하였으나 산수시라는 용어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산수시란 용어를 일찍부터 사용하였으며, 남조(南朝) 진송(晋宋) 시기의 사영운(謝靈雲, 385∼433)의 시들을 산수시의 기원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치사한객과 당쟁하의 명철보신하는 사대부들에 의해 발견된 자연의 미는 그들의 이념인 성리학과 긴밀한 관련을 가졌다. 이이는 산수를 즐기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의 물(物)에는 각기 이(理)가 있으므로, 위로 일월성신으로부터 아래 초목산천에 이르기까지 미세하게는 찌꺼기[糟粕]와 타고 남은 재[煨燼]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체가 깃들여 있어서 지극한 가르침[至敎]이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조석으로 눈여겨보더라도 그 이(理)를 알지 못하면 보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금강산에 노니는 자 또한 눈으로 볼 뿐 ‘산수의 취(趣)’를 깊이 알지 못한다면 백성이 일용(日用)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홍장(洪丈) 같은 이는 산수의 취를 깊이 안다고 이를 만한 자일진저. 비록 그렇더라도 산수의 취만 알고 도체를 알지 못하면 또한 산수를 앎에 귀할 것이 없다. 홍장의 앎이 어찌 이에 그칠 것인가?”(「치재 홍인우가 풍악을 노닐고 쓴 기록에 발문을 쓰다(洪恥齋仁祐遊楓嶽錄跋)」, 『치재유고(恥齋遺稿)』 권3)
또한 이황은 “옛날 산림을 즐기는 사람을 보건대 둘이 있다. 현허(玄虛)를 그리워하여 고상(高尙)을 섬겨 즐기는 사람이고, 도의(道義)를 기뻐하여 심성(心性)을 길러서 즐기는 사람이다.”(〈도산기(陶山記)〉)라 하여 자신의 산수자연관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산수를 즐기면서도 그 속에서 ‘도의, 도체’를 찾는 것이 조선 사대부들의 산수관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산수 자연을 읊으면 대체로 ‘흥(興)’을 끌어들였다. “춘풍에 화만산ᄒᆞ고 추야애 월만대라/ 사시가흥이 사롬과 ᄒᆞᆫ가지라/ ᄒᆞᄆᆞᆯ며 어약연비 운영천광이아 어늬 그지 잇슬고”(〈도산십이곡〉 언지 6)의 퇴계의 ‘사시가흥(四時佳興)’, “사곡은 어ᄃᆡᄆᆡ오 송암에 ᄒᆡ 넘거다/ 담심암영은 온갖 빗치 ᄌᆞᆷ겨세라/ 임천이 깁도록 됴흐니 흥을 계워 하노라”(〈고산구곡가〉 사곡)의 율곡의 ‘흥을 계워 하노라’, “낙시줄 거더노코 봉창의 ᄃᆞᆯ을 보쟈/ 닫디여라 닫디여라/ ᄒᆞ마 밤들거냐 자규소ᄅᆡ ᄆᆞᆰ게 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나믄 흥이 무궁ᄒᆞ니 갈길을 니젓딷다”(〈어부사시사〉 춘사 9)의 고산의 ‘나믄 흥’이 그렇다.
이황의 ‘사시가흥’을 최진원은 ‘자연의 이(理)의 분명함’으로, 그래서 ‘이념적 감동’을 제공하는 ‘흥’으로 논의한 바 있다(「도산십이곡과 경」, 『한국고전시가의 형상성』). 최진원은 이것을 두고 ‘사시가흥이 사롬과 ᄒᆞᆫ가지라’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흥은 ‘자연의 이의 분명함(上下察)’을 깨달았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연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때 느낄 수 있는 흥이며 이렇게 그 깨달음의 감동은 이념적 감동이며, 이것이 곧 〈도산십이곡〉의 시적 감동이라고 하였다.
이이의 ‘흥을 계워 하노라’는 임천에 비친 송애의 아름다움을 보고 흥을 겨워하는 모습이다. 〈사곡〉의 그것은 자연의 경치 그 자체의 미를 체득함으로써 우러나오는 흥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곡〉에는 인위적인 흔적(상상을 통한 의상의 경, 관념 · 감정이입 등)이 없는, 이이가 언급한 ‘천연에서 나온(出於天然)’ 서경 및 이를 통하여 우러나온 흥이 있을 뿐이다. 최진원은 이에 대해 “경물에 부딪쳐 일어난 정감을 그대로 표현했을 뿐, 그 어떤 전제(양식적 구도)도 깔지 않았다. 〈고산구곡가〉에는 ‘인물기흥(因物起興)’뿐이라고 하였다(『한국고전시가의 형상성』).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의 ‘흥’은 앞의 두 작품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 여기현(呂基鉉)은 〈어부사시사〉의 ‘흥’의 성격에 대하여 “고산이 사시에 따라 산수유상에서 느끼는 흥은 ‘서정으로서의 흥취’이지, 퇴계의 경우와 같이 자연을 매개한 ‘서정의 순정’으로서의 상자연이 아닌 것이다. 고산은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서 바라보고 있되, 그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미적 시각으로써이다.”(「어부가의 표상성 연구」)고 하여 〈어부사시사〉의 ‘흥’을 ‘서정으로서의 흥취’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윤선도의 “사시흥이 한가지나 추강이 읃듬이라.”(〈어부사시사〉 추사 1)고 한 표현을 이황의 ‘사시가흥이 사ᄅᆞᆷ과 ᄒᆞᆫ가지라’와 서로 비교해 볼 때 분명해진다. ‘이’에는 우열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면 때문에 조윤제는 〈어부사시사〉를 “도덕에서 시가를 완전히 분리하였다.”라고 한 듯하다.
세 작품을 이이가 언급한 산수의 취와 산수 속에 내재한 도체[理]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면, 이황의 〈도산십이곡〉은 이 둘의 관계 속에서 ‘도체’를 귀히 여긴 것이고, 이이의 〈고산구곡가〉는 산수의 취와 산수 속에 내재한 도체를 불가분의 관계로 이해하면서 산수의 취를 노래한 것이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이 둘을 관계 짓지 않고 산수의 취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황의 ‘사시가흥’의 흥은 이념적 감동으로서의 흥이고, 이이의 “흥을 계워 하노라”의 ‘흥’은 도학적 기반 위에서 ‘서정으로서의 흥’이며, 윤선도의 ‘나믄 흥’의 흥은 도학과 관련짓지 않은 ‘서정으로서의 흥’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 노래의 흥의 차이는 모두 ‘성정지정’의 안에서 보여지는 것으로, 그것은 세 시인의 기질적 또는 풍격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이거나, 또는 김흥규(金興圭)의 지적처럼 ‘강호시가의 시대적 변모’(「〈어부사시사〉에서의 흥(興)의 성격」)가 가미된 것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이들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다.
전통적인 산수, 전원의 개념은 근대기 서구적인 자연시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혼용되어 쓰이다가 요즘에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아와 하나가 된 자연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산수시, 전원시라고 그 의미를 구별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오늘날 생명의식을 담고 있는 생태시(生態詩)가 전통적인 성리학과의 관련을 모색하여 그것에 기반을 두기도 한다.
산수자연은 예로부터 삶의 공간이었으며, 그것이 미의 대상이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로 보인다. 산수는 산과 물, 나무와 화초, 짐승과 벌레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시로 드러내기도 하고 그 산수 속에서 성리학적 이념을 발견해 내어 그 감동을 시로 짓기도 하였다. 산수시는 시대적 정신과 관련하여 오늘날까지 각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시로 지어져서 우리의 미감을 촉발시켜 왔다. 오늘날 전원시와 비교하여 산수시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