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방고전은 훈민정음의 글자가 전서체의 한자를 본떠 만들었다는 것을 설명한 제자원리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 12월조 기사’와 『훈민정음』의 「정인지 서문」 등에서 보인다. ‘글자는 옛 전자를 본떴다’라는 뜻으로, 흔히 ‘훈민정음’이 한자의 옛 전서를 참고하였다는 정도로 이해되었다. 후에는 ‘훈민정음’의 글자를 전서체의 한자에서 본떴다.”고 하는 ‘훈민정음’의 기원설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근래에는 ‘자방고전’을 ‘상형’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연구들이 나타난다. 상형의 방법으로 만든 최소 단위의 글자를 합하여 음절 단위로 운용하는 방법으로 이해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 12월조 기사’에 “기자방고전(其字倣古篆).”이라는 구절이 나오고, 1444년 2월의 ‘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이 올린 상소문’에도 “자형수방고지전문(字形雖倣古之篆文)”이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자방고전’은 “글자는 옛 전자를 본떴다.”라는 뜻으로, 흔히 ‘상형(象形)’과 함께 한자 문화권에 있던 조선에서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한자의 옛 전서를 참고하였다는 정도로 이해해 왔으나, “‘훈민정음’의 글자를 전서체의 한자에서 본떴다.”고 하는 ‘훈민정음’의 기원설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자방고전(字倣古篆)’을 바탕으로 ‘훈민정음’의 초종성 통용 8자는 모두 고전(古篆)의 형상이라 주장하였고,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인 게일(James S. Gale)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근래에도 일부 학자들은 ‘훈민정음’의 초성과 중성의 모양이 옛 전서에서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세종 25년 12월조 기사’나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이 올린 상소문’에는 ‘자방고전(字倣古篆)’만 나오고 ‘상형(象形)’은 나오지 않다가 「정인지(鄭麟趾) 서문」(1446)에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으로 나온다는 점에 주목하여 세종 25년의 원안은 ‘자방고전(字倣古篆)’의 원리에 의해 창안되었으나 세종 28년의 반포된 훈민정음 28자는 보다 후대에 ‘상형(象形)’의 원리가 추가되면서 수정과 보완을 거쳐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을 자형 형성의 원리로 이해하고 상형은 육서(六書)에 따른 자형의 형성 원리를 설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러한 주장에서 ‘자방고전’은 자체, 즉 ‘전자의 체’로 간주하여 ‘전자’의 ‘좌우균일(左右均一), 규선구절(規旋矩折), 자형방정(字形方正), 필획균칭(筆劃勻稱)’ 등 전자의 특징을 따른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언문 28자가 모두 전서의 특징에 부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주장에서 제시한 4가지 특징은 자모를 모아서 음절 단위로 쓴 글자에 부합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근래에는 ‘자방고전’을 ‘상형’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연구들이 나타난다. 즉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에서 ‘상형(象形)’은 초성은 발음기관, 중성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형하였다는 『훈민정음』 「제자해」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방고전은 상형의 방법으로 만든 최소 단위의 글자를 합하여 음절 단위로 운용하는 방법을 말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서는 최소 단위의 글자, 즉 독체자인 ‘문(文)’에 해당하는 초성 17자와 중성 11자는 상형의 방법으로 제자하고, 이 글자들을 합용, 병서, 합자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모아 합체자인 ‘자(字)’의 단위로 만들어 사용하는 글자의 운용 방법을 ‘자방고전’으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