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완창은 미군정청 신한공사 부총재, 중앙토지행정처 처장, 관재청장, 초대 부흥부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190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광복 후 미군정청 신한공사 부총재를 지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는 중앙토지행정처 처장, 관재청장 등을 역임하고, 1955년 초대 부흥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6년 5월 의원면직 형태로 하차하였다. 1960년 4·19혁명 후 서울시 공민권 제한 대상자 조사위원회에서 소환장을 발부한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다.
1906년 7월 1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인이 보성의원을 경영하였으며, 아들을 두었다. 종교는 기독교이다.
일제강점기에 도쿄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 겸 서무과장을 역임하였다. 경성원예학교 교장도 지냈다. 1946년 4월, 서울신문사 창업주 조중환과 김동준 등이 설립한 신동아화재의 전무이사를 지내다가 미군정청 신한공사로 이임하였다. 이듬해 11월 8일, 결원 중이던 신한공사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1948년 3월경 신한공사의 사무를 인계하여 새로이 과도정부의 한 기관이 된 중앙토지행정처의 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즈음 조선 신문학원(新聞學院)의 해외연락위원 총 11명 중 한명으로 선정되었다.
정부 수립 후 관재처에서 근무하였다. 1949년 7월, 관재처 차장으로 있던 중 본인을 비롯하여 총국장 등 11명의 간부진이 뇌물 수수 혐의로 구금되는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9월 29일부로 임시관재총국 차장으로 인사 발령되었다. 그 후 관재청장 서리를 거쳐 1951년 관재청장이 되었다. 1953년 9월 정부 인사 발표에 따라 관재청장 의원면직과 동시에 대한조선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1954년 10월 정부 인사 공고에 따라 1년 만에 다시 관재청장으로 임명받았다. 1955년, 정부에 부흥부를 신설하고 보건, 사회 양 부를 폐합하는 정부조직법 개정법률이 공포됨에 따라 2월 16일에 초대 부흥부장관으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야당의 부흥부장관 등에 대한 불신임안 제출에 따른 후속 조치의 일환으로 1년 3개월 만인 1956년 5월 의원면직 형태로 하차하였다.
1960년 4·19혁명 후 서울시 공민권 제한 대상자 조사위원회에서 제1차로 30여 명에게 소환장을 발부하였는데, 이때 그도 포함되었다. 1970년 8월 대한식품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