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금관가야"
검색결과 총 21건
금관가야의 제1대(재위: 42년~199년) 왕.
수로왕 (首露王)
금관가야의 제1대(재위: 42년~199년) 왕.
가야연맹체(加耶聯盟體)의 한 나라로서 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국.
대가야 (大加耶)
가야연맹체(加耶聯盟體)의 한 나라로서 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국.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널무덤·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 (金海 大成洞 古墳群)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널무덤·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삼한시대 변한(弁韓)의 한 소국(小國).
구야국 (狗邪國)
삼한시대 변한(弁韓)의 한 소국(小國).
임나란 가야 혹은 금관가야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특히, 김해의 금관가야를 칭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역사 기록에서는 3곳에서 '임나'라는 표현이 확인된다.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임나가라',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에는 '임나왕족', 『삼국사기』 열전 강수열전에서는 '임나가량'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임나는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서도 확인되며, 『일본서기』에서는 임나와 함께 '임나일본부'라는 표현도 다수 쓰였다.
임나 (任那)
임나란 가야 혹은 금관가야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특히, 김해의 금관가야를 칭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역사 기록에서는 3곳에서 '임나'라는 표현이 확인된다.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임나가라',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에는 '임나왕족', 『삼국사기』 열전 강수열전에서는 '임나가량'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임나는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서도 확인되며, 『일본서기』에서는 임나와 함께 '임나일본부'라는 표현도 다수 쓰였다.
신라 초기에 복속된 가야(加耶)의 소국(小國).
거칠산국 (居漆山國)
신라 초기에 복속된 가야(加耶)의 소국(小國).
김해회현리패총은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원삼국시대~삼국시대의 패총이다. 사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구(舊) 회현리패총과 봉황대유적 등을 묶어 김해봉황동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김해 지역 금관가야인들의 중심 거주 지역으로 왕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주위를 봉황토성이 둘러싸고 있다.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보전하고 있는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
김해 회현리 패총 (金海 會峴里 貝塚)
김해회현리패총은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원삼국시대~삼국시대의 패총이다. 사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구(舊) 회현리패총과 봉황대유적 등을 묶어 김해봉황동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김해 지역 금관가야인들의 중심 거주 지역으로 왕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주위를 봉황토성이 둘러싸고 있다.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보전하고 있는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능. 왕릉.
김해 수로왕릉 (金海 首露王陵)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능. 왕릉.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에 있는 시립 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大成洞古墳博物館)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에 있는 시립 박물관.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서기전 1세기의 나무널무덤과 서기 2세기 이후부터 5세기 전반의 덧널무덤, 서기 4세기 후반 이후의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다. 서기전 1세기 전반부터 나무널무덤이 조영되기 시작하여 변한의 구야국부터 금관가야가 가장 발전한 서기 5세기 전반까지 지속해서 조영된 유적이다. 무덤 구조와 껴묻거리의 각 시기별 특징과 변화 모습은 낙동강 하구 물질 자료의 편년과 계통, 이 지역에서 활동한 집단의 성장 과정과 대외관계 등 변한에서 가야로의 변천 과정을 살피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 (金海 良洞里 古墳群)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서기전 1세기의 나무널무덤과 서기 2세기 이후부터 5세기 전반의 덧널무덤, 서기 4세기 후반 이후의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다. 서기전 1세기 전반부터 나무널무덤이 조영되기 시작하여 변한의 구야국부터 금관가야가 가장 발전한 서기 5세기 전반까지 지속해서 조영된 유적이다. 무덤 구조와 껴묻거리의 각 시기별 특징과 변화 모습은 낙동강 하구 물질 자료의 편년과 계통, 이 지역에서 활동한 집단의 성장 과정과 대외관계 등 변한에서 가야로의 변천 과정을 살피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금관가야의 제9대(재위: 492년~521년) 왕.
겸지왕 (鉗知王)
금관가야의 제9대(재위: 492년~521년) 왕.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김해 구산동 고분군 (金海 龜山洞 古墳群)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생몰년 미상. 금관가야 건국기의 씨족장.
신귀간 (神鬼干)
생몰년 미상. 금관가야 건국기의 씨족장.
김해 칠산동 고분군은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덧널무덤 ·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명법동 고분군이라고도 하며, 1990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고분들은 칠산의 명법 1구 구릉 뒤쪽 해발 100m 전후의 산정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조사 결과, 덧널무덤·구덩식돌방무덤 등 119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군은 4세기대에 김해를 중심으로 금관가야 지배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칠산동 고분군의 무덤들은 좁은 범위에 서로 중복 조성되어 있어 묘제의 변화과정 및 유물의 편년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김해 칠산동 고분군 (金海 七山洞 古墳群)
김해 칠산동 고분군은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덧널무덤 ·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명법동 고분군이라고도 하며, 1990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고분들은 칠산의 명법 1구 구릉 뒤쪽 해발 100m 전후의 산정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조사 결과, 덧널무덤·구덩식돌방무덤 등 119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군은 4세기대에 김해를 중심으로 금관가야 지배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칠산동 고분군의 무덤들은 좁은 범위에 서로 중복 조성되어 있어 묘제의 변화과정 및 유물의 편년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삼국시대 금관가야 제10대 구형왕의 첫째 아들인 왕자.
노종 (奴宗)
삼국시대 금관가야 제10대 구형왕의 첫째 아들인 왕자.
남북국시대 때, 파진찬, 이찬 관등에 임명된 통일신라의 귀족·관리.
김삼광 (金三光)
남북국시대 때, 파진찬, 이찬 관등에 임명된 통일신라의 귀족·관리.
신라시대에 일시적으로 설정된 명예직 성격의 관직.
상등 (上等)
신라시대에 일시적으로 설정된 명예직 성격의 관직.
금관가야의 제4대(재위: 291년~346년) 왕.
거질미왕 (居叱彌王)
금관가야의 제4대(재위: 291년~346년) 왕.
탈지미질금은 삼국시대 금관가야 멸망 후 구형왕을 대신하여 식읍을 관리한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 구형왕의 동기(형제)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왕이 가야를 공격하였을 때 구형왕은 탈지미질금을 본국으로 보내어 머물게 하였고, 여타 왕족들은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신라 법흥왕은 구형왕(구해왕)에게 높은 관등을 주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므로, 탈지미질금이 구형왕을 대신하여 그 식읍을 관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탈지미질금 (脫知爾叱今)
탈지미질금은 삼국시대 금관가야 멸망 후 구형왕을 대신하여 식읍을 관리한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 구형왕의 동기(형제)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왕이 가야를 공격하였을 때 구형왕은 탈지미질금을 본국으로 보내어 머물게 하였고, 여타 왕족들은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신라 법흥왕은 구형왕(구해왕)에게 높은 관등을 주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므로, 탈지미질금이 구형왕을 대신하여 그 식읍을 관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가야는 하가라(下加羅), 남가라(南加羅)와 함께 고령의 대가야에 대비하여 후기의 금관가야를 부르는 국명이다. 하가야란 표현은 역사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며, 『삼국사기』 잡지(雜誌) 악조(樂條)에 기록된 하가라라는 표현에서 가라(加羅) 대신 가야(加耶)를 넣어 조어(造語)한 것이다. 하가라를 금관가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고령의 상가라(上加羅)와 함께 대가야를 구성한 핵심 세력 가운데 하나로 보기도 한다.
하가야 (下加耶)
하가야는 하가라(下加羅), 남가라(南加羅)와 함께 고령의 대가야에 대비하여 후기의 금관가야를 부르는 국명이다. 하가야란 표현은 역사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며, 『삼국사기』 잡지(雜誌) 악조(樂條)에 기록된 하가라라는 표현에서 가라(加羅) 대신 가야(加耶)를 넣어 조어(造語)한 것이다. 하가라를 금관가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고령의 상가라(上加羅)와 함께 대가야를 구성한 핵심 세력 가운데 하나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