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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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羅城)은 내성을 둘러싸고 있는 외성을 의미한다. 『통감』에 의하면 외성 중 큰 것을 나성이라 하고, 작은 것을 자성이라 했다고 한다. 내성을 성(城)이라 하고 외성을 곽(郭)이라 하였으므로 나성은 성곽의 곽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산성이나 읍성은 대부분 외성이 없이 내성만 있는 성이다. 그러나 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사비성, 고려 도성 등의 도성에는 나성이 축조되었다. 나성은 백성들의 주거 지역을 포괄하도록 축조되었으므로 다른 성들에 비하여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나성 (羅城)
나성(羅城)은 내성을 둘러싸고 있는 외성을 의미한다. 『통감』에 의하면 외성 중 큰 것을 나성이라 하고, 작은 것을 자성이라 했다고 한다. 내성을 성(城)이라 하고 외성을 곽(郭)이라 하였으므로 나성은 성곽의 곽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산성이나 읍성은 대부분 외성이 없이 내성만 있는 성이다. 그러나 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사비성, 고려 도성 등의 도성에는 나성이 축조되었다. 나성은 백성들의 주거 지역을 포괄하도록 축조되었으므로 다른 성들에 비하여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고려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948년(정종 3)에 태어나 1031년(현종 22)에 사망했다. 1010년(현종 1) 요(遼)나라가 서경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했고, 1018년(현종 9) 요나라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상원수대장군으로서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이라 불리는 이 큰 승리 이후 요나라와 평화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된다. 고려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교 관계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강감찬 (姜邯贊)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고려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948년(정종 3)에 태어나 1031년(현종 22)에 사망했다. 1010년(현종 1) 요(遼)나라가 서경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했고, 1018년(현종 9) 요나라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상원수대장군으로서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이라 불리는 이 큰 승리 이후 요나라와 평화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된다. 고려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교 관계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금강성」은 조선 초에 기악곡으로 전하던 작자 미상의 고려시대 속악곡이다.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1029년 무렵 나성 축성 기념으로 만들어졌으며,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가사는 상실한 채 기악곡으로 전하여 조선 초기 왕실 연회에서 꽃을 올릴 때 「금강성」 가락에 맞춰 노래 불렀으나 태종대 이후로 실전된 것으로 보인다.
금강성 (金剛城)
「금강성」은 조선 초에 기악곡으로 전하던 작자 미상의 고려시대 속악곡이다.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1029년 무렵 나성 축성 기념으로 만들어졌으며,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가사는 상실한 채 기악곡으로 전하여 조선 초기 왕실 연회에서 꽃을 올릴 때 「금강성」 가락에 맞춰 노래 불렀으나 태종대 이후로 실전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는 고려전기 석축 성곽. 도성.
개성 성곽 (開城 城廓)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는 고려전기 석축 성곽. 도성.
명활산성 작성비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의 명활산성 축성 후 건립한 비이다. 작성비는 축성에 대한 책임을 명백히 하고 축성 참가자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551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에서는 591년에 세워진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이후 처음 발견되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가 66.8㎝, 최대 너비 31.0㎝, 두께 16.5㎝이며 직사각형이다. 비문에는 작성 간지,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실무자의 인명, 공사 기간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 비는 신라 중고기의 역사상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명활산성 작성비 (明活山城 作城碑)
명활산성 작성비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의 명활산성 축성 후 건립한 비이다. 작성비는 축성에 대한 책임을 명백히 하고 축성 참가자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551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에서는 591년에 세워진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이후 처음 발견되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가 66.8㎝, 최대 너비 31.0㎝, 두께 16.5㎝이며 직사각형이다. 비문에는 작성 간지,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실무자의 인명, 공사 기간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 비는 신라 중고기의 역사상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경목현비는 고려 전기 제9대 왕 덕종의 왕비이다. 그녀는 왕가도의 딸이었는데, 덕종이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위세에 힘입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왕가도가 거란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갔을 때, 덕종은 아버지 현종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로써 제1왕후로써 위치를 잃게 되었다.
경목현비 (敬穆賢妃)
경목현비는 고려 전기 제9대 왕 덕종의 왕비이다. 그녀는 왕가도의 딸이었는데, 덕종이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위세에 힘입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왕가도가 거란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갔을 때, 덕종은 아버지 현종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로써 제1왕후로써 위치를 잃게 되었다.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성곽.
발어참성 (拔禦塹城)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성곽.
왕가도는 고려 전기 치성공신과 수충창궐공신에 책록되고, 참지정사·문하시랑평장사·감수국사 등을 역임한 공신이자 문신이다. 본래 이름은 이자림이었는데, 중간에 이가도로 바꾸었다.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그는 김훈·최질 등을 제거하면서 현종과 밀착되어 딸을 원질귀비로 납비하였고, 치성공신에 책봉되었다. 나성을 축조한 공으로 다시 수충창궐공신에 책봉되고 왕씨를 사성 받으면서 왕가도라 하였다. 그 뒤에는 또 다른 딸을 납비하여 덕종의 후비 경목현비로 삼았다.
왕가도 (王可道)
왕가도는 고려 전기 치성공신과 수충창궐공신에 책록되고, 참지정사·문하시랑평장사·감수국사 등을 역임한 공신이자 문신이다. 본래 이름은 이자림이었는데, 중간에 이가도로 바꾸었다.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그는 김훈·최질 등을 제거하면서 현종과 밀착되어 딸을 원질귀비로 납비하였고, 치성공신에 책봉되었다. 나성을 축조한 공으로 다시 수충창궐공신에 책봉되고 왕씨를 사성 받으면서 왕가도라 하였다. 그 뒤에는 또 다른 딸을 납비하여 덕종의 후비 경목현비로 삼았다.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판문군에 있는 고려전기 제12대 순종의 능.
성릉 (成陵)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판문군에 있는 고려전기 제12대 순종의 능.
북한 평양직할시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 후기의 성곽. 도성.
장안성 (長安城)
북한 평양직할시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 후기의 성곽. 도성.
고려전기 수사도, 태위상서좌복야, 개부의동삼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이응보 (異膺甫)
고려전기 수사도, 태위상서좌복야, 개부의동삼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조성도감은 고려시대에 주로 궁궐의 토목, 영선(營繕) 사업을 관장하던 관부이다. 이 관부는 현종 대 이래 고려 말기까지 확인된다. 현종 대에 조성도감에 원리(員吏)가 있었으며, 우왕 대에는 판사(判事)가 확인되지만, 조성도감의 정확한 직제는 알 수 없다.
조성도감 (造成都監)
조성도감은 고려시대에 주로 궁궐의 토목, 영선(營繕) 사업을 관장하던 관부이다. 이 관부는 현종 대 이래 고려 말기까지 확인된다. 현종 대에 조성도감에 원리(員吏)가 있었으며, 우왕 대에는 판사(判事)가 확인되지만, 조성도감의 정확한 직제는 알 수 없다.
북한 평안남도 평성시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 평양성 북쪽 방위를 담당한 석축 성곽. 산성.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38호.
자모산성 (慈母山城)
북한 평안남도 평성시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 평양성 북쪽 방위를 담당한 석축 성곽. 산성.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38호.
황주량은 고려 전기에 지공거, 상서좌승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한림원과 사관의 요직을 역임하며 3차례나 지공거를 맡았다. 거란과의 전쟁 후에 『칠대실록』 36권을 주관하여 편찬하였다. 귀화한 여진인에 대해 본속법에 의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황주량 (黃周亮)
황주량은 고려 전기에 지공거, 상서좌승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한림원과 사관의 요직을 역임하며 3차례나 지공거를 맡았다. 거란과의 전쟁 후에 『칠대실록』 36권을 주관하여 편찬하였다. 귀화한 여진인에 대해 본속법에 의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김종림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교육위원,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집행위원, 북미지방동지회 대표회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고종 23)에 태어나 1973년에 사망했다.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로 이민하여 ‘쌀의 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실업가로 크게 성공하였다. 임시정부의 비행기대 편성 방침에 호응하여 자신의 농장에 비행훈련장을 건설하고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고 선전할 목적으로 한인공동회를 설립하였다. 나성(LA)한인공동회, 대한인국국민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김종림 (金鐘林)
김종림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교육위원,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집행위원, 북미지방동지회 대표회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고종 23)에 태어나 1973년에 사망했다.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로 이민하여 ‘쌀의 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실업가로 크게 성공하였다. 임시정부의 비행기대 편성 방침에 호응하여 자신의 농장에 비행훈련장을 건설하고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고 선전할 목적으로 한인공동회를 설립하였다. 나성(LA)한인공동회, 대한인국국민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있는 해방 이후 재미한인과 대한인국민회와 한국독립운동 등의 자료 관련 기념관. 역사기념관. 해외사적.
국민회기념관 (國民會紀念館)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있는 해방 이후 재미한인과 대한인국민회와 한국독립운동 등의 자료 관련 기념관. 역사기념관. 해외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