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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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은 1910년대에 만주에 망명하여 1920년대까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회영 등과 함께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결성하며 병영인 백서농장을 운영하는 활동을 펼쳤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통의부, 국민대표회의, 정의부 등 서간도의 대표적인 단체와 독립군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민족유일당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항일 공작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옥고를 치르다 옥사하였다.
김동삼 (金東三)
김동삼은 1910년대에 만주에 망명하여 1920년대까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회영 등과 함께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결성하며 병영인 백서농장을 운영하는 활동을 펼쳤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통의부, 국민대표회의, 정의부 등 서간도의 대표적인 단체와 독립군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민족유일당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항일 공작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옥고를 치르다 옥사하였다.
강우규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라오허현 지부장으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 투탄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동 마을을 개척하였다. 3 · 1운동으로 조선 총독이 교체될 때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처단하고자 남대문역에서 수류탄을 던져,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강우규 (姜宇奎)
강우규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라오허현 지부장으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 투탄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동 마을을 개척하였다. 3 · 1운동으로 조선 총독이 교체될 때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처단하고자 남대문역에서 수류탄을 던져,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김마리아는 고려혁명군으로 활동하고 중국 중앙군관학교 서북북교의 러시아어 교관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22년 고려혁명군에 정치부원으로 입단하여 피복창 주임이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이범석이 마점산 부대와 함께 중국군으로서 항일전에 참여할 때 마점산 장군의 통역관을 지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이후 중국 중앙군관학교 서북분교에서 러시아어 교관을 역임하였다.
김마리아 (金嗎利亞)
김마리아는 고려혁명군으로 활동하고 중국 중앙군관학교 서북북교의 러시아어 교관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22년 고려혁명군에 정치부원으로 입단하여 피복창 주임이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이범석이 마점산 부대와 함께 중국군으로서 항일전에 참여할 때 마점산 장군의 통역관을 지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이후 중국 중앙군관학교 서북분교에서 러시아어 교관을 역임하였다.
민찬호는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동지회,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등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한인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합성협회, 국민회,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결정에 따라 소약소국동맹회의와 필라델피아 대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으며, 동지회,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등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민찬호 (閔贊鎬)
민찬호는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동지회,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등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한인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합성협회, 국민회,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결정에 따라 소약소국동맹회의와 필라델피아 대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으며, 동지회,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등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김문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 · 1운동 당시 정주면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장편 창가 「고려사가(高麗寺歌)」를 저술하였다.
김문세 (金文世)
김문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 · 1운동 당시 정주면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장편 창가 「고려사가(高麗寺歌)」를 저술하였다.
김병조는 1919년 3 · 1운동에서 기독교계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한국독립운동사략』 상권을 저술하였다.
김병조 (金秉祚)
김병조는 1919년 3 · 1운동에서 기독교계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한국독립운동사략』 상권을 저술하였다.
김봉관은 함경남도 갑산군 동인면 일대의 주재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한 독립운동가이다. 함경남도 갑산 출신으로 1921년 9월,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갑산군 동인면에 자리한 함정주재소에 폭탄을 던져 건물을 부수고 다시 영림창출장소에 불을 질러 전소시킨 후 동인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갑산군 동인면 외산리 산속에서 경찰에 붙잡혀 압송 도중 총살당하였다.
김봉관 (金鳳官)
김봉관은 함경남도 갑산군 동인면 일대의 주재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한 독립운동가이다. 함경남도 갑산 출신으로 1921년 9월,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갑산군 동인면에 자리한 함정주재소에 폭탄을 던져 건물을 부수고 다시 영림창출장소에 불을 질러 전소시킨 후 동인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갑산군 동인면 외산리 산속에서 경찰에 붙잡혀 압송 도중 총살당하였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등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광복회 가입과 3 · 1운동에 참여한 후에는 혁신단을 조직하여 혁신공보를 발행하고 암살단을 조직하여 미국 의원단이 국내에 들어올 때 의열 투쟁을 벌일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김상옥 (金相玉)
김상옥은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등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광복회 가입과 3 · 1운동에 참여한 후에는 혁신단을 조직하여 혁신공보를 발행하고 암살단을 조직하여 미국 의원단이 국내에 들어올 때 의열 투쟁을 벌일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권동진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천도교가 창건할 때부터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6 · 10만세운동 당시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신간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였다.
권동진 (權東鎭)
권동진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천도교가 창건할 때부터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6 · 10만세운동 당시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신간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였다.
박승학은 일제강점기 한인 사병과 청년의 초모 활동을 펼쳤던 독립운동가이다. 중국 남방대학에 재학하다가 중국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과 협조하여 일본군의 주둔 위치와 소속 부대 병력 그리고 병력의 이동 규모 등에 관한 군사 정보 수집 보고 등의 활동을 하고, 동지 규합과 한인 사병 및 청년의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충의구국군 총지휘부 참모처의 주요 참모로 임명되어 한인 사병 10여 명을 한국광복군에 입대시켰다.
박승학 (朴承鶴)
박승학은 일제강점기 한인 사병과 청년의 초모 활동을 펼쳤던 독립운동가이다. 중국 남방대학에 재학하다가 중국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과 협조하여 일본군의 주둔 위치와 소속 부대 병력 그리고 병력의 이동 규모 등에 관한 군사 정보 수집 보고 등의 활동을 하고, 동지 규합과 한인 사병 및 청년의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충의구국군 총지휘부 참모처의 주요 참모로 임명되어 한인 사병 10여 명을 한국광복군에 입대시켰다.
곽경렬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가을부터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 일대에서 6인의 동지와 함께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이라는 명의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곱 차례의 활동을 펼쳤는데, 동지들이 체포되면서 은신해 있다가 뒤늦게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곽경렬 (郭京烈)
곽경렬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가을부터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 일대에서 6인의 동지와 함께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이라는 명의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곱 차례의 활동을 펼쳤는데, 동지들이 체포되면서 은신해 있다가 뒤늦게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권종해는 강원도 인제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주요 무장투쟁 활동은 1907년부터 190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진 시기이지만, 그 후에도 무장투쟁을 계속 시도하였다. 유림 출신으로, 아버지 권인규는 동학농민운동 때 민보군으로 활약하였고, 을미의병 때 봉기하였다. 아들인 권기수는 3·1운동 때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권종해 (權鍾海)
권종해는 강원도 인제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주요 무장투쟁 활동은 1907년부터 190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진 시기이지만, 그 후에도 무장투쟁을 계속 시도하였다. 유림 출신으로, 아버지 권인규는 동학농민운동 때 민보군으로 활약하였고, 을미의병 때 봉기하였다. 아들인 권기수는 3·1운동 때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남형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차장, 교통총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열린 대한국민회의 개최를 위한 주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남형우 (南亨祐)
남형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차장, 교통총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열린 대한국민회의 개최를 위한 주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박운석은 보합단원으로서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에 평안북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던 보합단원이 되어 평안북도 용천군 일대에서 박초식, 박운죽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운석 (朴雲碩)
박운석은 보합단원으로서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에 평안북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던 보합단원이 되어 평안북도 용천군 일대에서 박초식, 박운죽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원국은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 조달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이후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10여 명의 조직원들과 함께 평안남도 강동군과 평원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는 활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원국 (朴元國)
박원국은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 조달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이후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10여 명의 조직원들과 함께 평안남도 강동군과 평원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는 활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근호는 일제강점기, 청산리 대첩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다. 청산리 대첩에 참여하고 러시아로 넘어가 자유시사변을 겪은 후 반공 투쟁을 벌이다 옥고를 치렀다. 다시 만주로 돌아와 교육 활동에 종사하고 군사훈련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광복 후에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강근호 (姜槿虎)
강근호는 일제강점기, 청산리 대첩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다. 청산리 대첩에 참여하고 러시아로 넘어가 자유시사변을 겪은 후 반공 투쟁을 벌이다 옥고를 치렀다. 다시 만주로 돌아와 교육 활동에 종사하고 군사훈련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광복 후에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김완규는 천도교를 대표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의 발행인을 역임하는 등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옥하였다.
김완규 (金完圭)
김완규는 천도교를 대표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의 발행인을 역임하는 등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옥하였다.
박준승은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동학 교인으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창건 이후 천도교 임실 교구를 이끌며 원로로 활동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준승 (朴準承)
박준승은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동학 교인으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창건 이후 천도교 임실 교구를 이끌며 원로로 활동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강명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상하이 임시정부 의원을 지내고 1920년대 통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거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항일 무력 항쟁에 나섰으며, 8·15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육군 장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강명규 (姜明奎)
강명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상하이 임시정부 의원을 지내고 1920년대 통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거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항일 무력 항쟁에 나섰으며, 8·15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육군 장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원벽은 1919년 3월 1일과 3월 5일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학생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1월부터 서울에서 학생 대표들의 독립운동 준비를 이끌었으며, 3월 1일 만세 시위와 3월 5일 학생 주도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었다. 출옥 후에는 신생활사와 시대일보사에서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원벽 (金元璧)
김원벽은 1919년 3월 1일과 3월 5일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학생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1월부터 서울에서 학생 대표들의 독립운동 준비를 이끌었으며, 3월 1일 만세 시위와 3월 5일 학생 주도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었다. 출옥 후에는 신생활사와 시대일보사에서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