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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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학교와 서북학회 등을 설립해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동휘 (李東輝)
일제강점기 때, 학교와 서북학회 등을 설립해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좌진은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기에 신민회와 대한협회 등의 계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대한광복회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북간도에서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후 신민부를 조직하였으며,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혁신의회와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김좌진 (金佐鎭)
김좌진은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기에 신민회와 대한협회 등의 계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대한광복회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북간도에서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후 신민부를 조직하였으며,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혁신의회와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등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광복회 가입과 3 · 1운동에 참여한 후에는 혁신단을 조직하여 혁신공보를 발행하고 암살단을 조직하여 미국 의원단이 국내에 들어올 때 의열 투쟁을 벌일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김상옥 (金相玉)
김상옥은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등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광복회 가입과 3 · 1운동에 참여한 후에는 혁신단을 조직하여 혁신공보를 발행하고 암살단을 조직하여 미국 의원단이 국내에 들어올 때 의열 투쟁을 벌일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열 투쟁을 벌이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과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김창숙이 제공한 자금을 기반으로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 들어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나석주 (羅錫疇)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열 투쟁을 벌이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과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김창숙이 제공한 자금을 기반으로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 들어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서영해는 일제강점기 프랑스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문필가, 언론인이다. 1902년 부산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해 김규식을 만났다. 김규식의 권고로 프랑스로 건너가 고려통신사라는 이름을 걸고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잔악한 만행을 알리는 3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하던 1932년 안창호가 체포되자 일본의 야만적 억압에 항의하는 호소문을 프랑스 언론에 배포하였다. 해방 후 귀국해 기자 자격으로 남북교섭에 참가하였으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회의를 느껴 프랑스로 돌아가던 중 소식이 끊겼다.
서영해 (徐嶺海)
서영해는 일제강점기 프랑스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문필가, 언론인이다. 1902년 부산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해 김규식을 만났다. 김규식의 권고로 프랑스로 건너가 고려통신사라는 이름을 걸고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잔악한 만행을 알리는 3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하던 1932년 안창호가 체포되자 일본의 야만적 억압에 항의하는 호소문을 프랑스 언론에 배포하였다. 해방 후 귀국해 기자 자격으로 남북교섭에 참가하였으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회의를 느껴 프랑스로 돌아가던 중 소식이 끊겼다.
강우규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라오허현 지부장으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 투탄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동 마을을 개척하였다. 3 · 1운동으로 조선 총독이 교체될 때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처단하고자 남대문역에서 수류탄을 던져,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강우규 (姜宇奎)
강우규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라오허현 지부장으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 투탄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동 마을을 개척하였다. 3 · 1운동으로 조선 총독이 교체될 때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처단하고자 남대문역에서 수류탄을 던져,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김지섭은 의열단원으로서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이다. 의열단에 가입하여 1923년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투척하고자 하였으나 휴회로 실행하지 못하게 되자,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지고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일본 지바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하였다.
김지섭 (金祉燮)
김지섭은 의열단원으로서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이다. 의열단에 가입하여 1923년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투척하고자 하였으나 휴회로 실행하지 못하게 되자,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지고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일본 지바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하였다.
김동삼은 1910년대에 만주에 망명하여 1920년대까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회영 등과 함께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결성하며 병영인 백서농장을 운영하는 활동을 펼쳤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통의부, 국민대표회의, 정의부 등 서간도의 대표적인 단체와 독립군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민족유일당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항일 공작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옥고를 치르다 옥사하였다.
김동삼 (金東三)
김동삼은 1910년대에 만주에 망명하여 1920년대까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회영 등과 함께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결성하며 병영인 백서농장을 운영하는 활동을 펼쳤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통의부, 국민대표회의, 정의부 등 서간도의 대표적인 단체와 독립군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민족유일당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항일 공작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옥고를 치르다 옥사하였다.
노백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무관으로서 서북학회, 대한흥학회, 신민회 등에서 활동하고,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그 후 1919년 9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에 임명되었고 국무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노백린 (盧伯麟)
노백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무관으로서 서북학회, 대한흥학회, 신민회 등에서 활동하고,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그 후 1919년 9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에 임명되었고 국무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권동진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천도교가 창건할 때부터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6 · 10만세운동 당시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신간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였다.
권동진 (權東鎭)
권동진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천도교가 창건할 때부터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6 · 10만세운동 당시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신간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였다.
이준식은 일제강점기 국민부 사령관, 조선혁명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고종 37)에 태어나 1966년에 사망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대한통의부, 정의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중국군에 들어갔다가 자진 예편하였다.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한국광복군의 총사령부 참모와 제1지대 지대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 귀국하여 국군 창설에 힘써 고급군사훈련반을 졸업한 후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이준식 (李俊植)
이준식은 일제강점기 국민부 사령관, 조선혁명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고종 37)에 태어나 1966년에 사망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대한통의부, 정의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중국군에 들어갔다가 자진 예편하였다.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한국광복군의 총사령부 참모와 제1지대 지대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 귀국하여 국군 창설에 힘써 고급군사훈련반을 졸업한 후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문용기는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난 이리 장터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익산의 남전교회 교인과 도남학교 교사,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4일 이리 장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문용기 (文鏞祺)
문용기는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난 이리 장터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익산의 남전교회 교인과 도남학교 교사,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4일 이리 장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조경한은 일제강점기 신한독립당 대표,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대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고종 37)에 태어나 1993년에 사망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단과 배달청년회 등에 참여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독립군으로 활약하였다. 중국의 구국군 등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다가 김구의 제안으로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낙양군관학교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을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는 등 정당단체의 통합운동에 주력하였다.
조경한 (趙擎韓)
조경한은 일제강점기 신한독립당 대표,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대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고종 37)에 태어나 1993년에 사망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단과 배달청년회 등에 참여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독립군으로 활약하였다. 중국의 구국군 등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다가 김구의 제안으로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낙양군관학교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을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는 등 정당단체의 통합운동에 주력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국민정규군 소장참모, 충칭육군참모학교 교관, 신한민주혁명당 군사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상정 (李相定)
일제강점기 때, 국민정규군 소장참모, 충칭육군참모학교 교관, 신한민주혁명당 군사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유여대는 1919년 3 · 1운동에서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에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나, 3월 1일 태화관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지 않고 평안북도 의주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를 준비한 후 직접 이끌었다.
유여대 (劉如大)
유여대는 1919년 3 · 1운동에서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에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나, 3월 1일 태화관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지 않고 평안북도 의주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를 준비한 후 직접 이끌었다.
김완규는 천도교를 대표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의 발행인을 역임하는 등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옥하였다.
김완규 (金完圭)
김완규는 천도교를 대표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의 발행인을 역임하는 등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옥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하와이에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한인 국민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독립운동가.
윤병구 (尹炳球)
일제강점기 때, 하와이에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한인 국민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독립운동가.
김원벽은 1919년 3월 1일과 3월 5일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학생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1월부터 서울에서 학생 대표들의 독립운동 준비를 이끌었으며, 3월 1일 만세 시위와 3월 5일 학생 주도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었다. 출옥 후에는 신생활사와 시대일보사에서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원벽 (金元璧)
김원벽은 1919년 3월 1일과 3월 5일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학생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1월부터 서울에서 학생 대표들의 독립운동 준비를 이끌었으며, 3월 1일 만세 시위와 3월 5일 학생 주도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었다. 출옥 후에는 신생활사와 시대일보사에서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남형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차장, 교통총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열린 대한국민회의 개최를 위한 주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남형우 (南亨祐)
남형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차장, 교통총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열린 대한국민회의 개최를 위한 주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김병조는 1919년 3 · 1운동에서 기독교계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한국독립운동사략』 상권을 저술하였다.
김병조 (金秉祚)
김병조는 1919년 3 · 1운동에서 기독교계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한국독립운동사략』 상권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