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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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역사학자 한우근의 동학농민운동의 발생 원인에 관한 학술서.
동학란 기인에 관한 연구 (東學亂 起因에 關한 硏究)
1971년 역사학자 한우근의 동학농민운동의 발생 원인에 관한 학술서.
1940년 오지영이 동학과 천도교 운동사에 관하여 저술한 천도교서.
동학사 (東學史)
1940년 오지영이 동학과 천도교 운동사에 관하여 저술한 천도교서.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계룡산(鷄龍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상원이 창건한 사찰.
계룡산 동학사 (鷄龍山 東鶴寺)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계룡산(鷄龍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상원이 창건한 사찰.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동학교당(전통건조물 10호)에 소장되어 있는 동학 관련 유물.
상주 동학교당 유물 (尙州 東學敎堂 遺物)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동학교당(전통건조물 10호)에 소장되어 있는 동학 관련 유물.
갑오평비책은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문인 황현이 동학농민운동의 수습책을 개진한 정책서이다. 육필초고로서 서문과 10개 조목의 논책으로 되어 있다. 황현은 동학농민봉기를 왕조 질서에 대한 도전과 파괴 행위로 보고, 이들을 강경하게 진압할 수습책으로서 10개 조목을 제시하였다. 황현은 동학에 대한 조정의 대응이 관대하고 미온적이었다고 판단하고, 엄격하게 법에 따라 강경하게 대응한다면 국가 기강의 문란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갑오비평책에 쓰인 그의 주장은 봉건적 전통사회의 이념과 유교적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대 인식의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갑오평비책 (甲午平匪策)
갑오평비책은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문인 황현이 동학농민운동의 수습책을 개진한 정책서이다. 육필초고로서 서문과 10개 조목의 논책으로 되어 있다. 황현은 동학농민봉기를 왕조 질서에 대한 도전과 파괴 행위로 보고, 이들을 강경하게 진압할 수습책으로서 10개 조목을 제시하였다. 황현은 동학에 대한 조정의 대응이 관대하고 미온적이었다고 판단하고, 엄격하게 법에 따라 강경하게 대응한다면 국가 기강의 문란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갑오비평책에 쓰인 그의 주장은 봉건적 전통사회의 이념과 유교적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대 인식의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연국은 동학, 천도교, 시천교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상제교를 창건한 종교인이다. 동학 지도자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으나 풀려나 천도교와 시천교 최고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 후 시천교총부를 건립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걸은 후 상제교를 창건하여 계룡산 신도안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였다.
김연국 (金演局)
김연국은 동학, 천도교, 시천교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상제교를 창건한 종교인이다. 동학 지도자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으나 풀려나 천도교와 시천교 최고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 후 시천교총부를 건립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걸은 후 상제교를 창건하여 계룡산 신도안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였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에 있는 개항기 동학농민운동의 발단이 된 만석보의 보터. 관개시설.
만석보지 (萬石洑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에 있는 개항기 동학농민운동의 발단이 된 만석보의 보터. 관개시설.
조선 후기에, 경주접주를 역임한 천도교인.
강원보 (姜元甫)
조선 후기에, 경주접주를 역임한 천도교인.
1893년 초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과 척왜양(斥倭洋)을 목적으로 전라도 금구(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에서 개최한 집회.
금구집회 (金溝集會)
1893년 초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과 척왜양(斥倭洋)을 목적으로 전라도 금구(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에서 개최한 집회.
조선후기 문신 이헌영이 충청도관찰사 재임기간 동안의 사건을 기록한 일지. 공무일기.
금번집략 (錦藩集略)
조선후기 문신 이헌영이 충청도관찰사 재임기간 동안의 사건을 기록한 일지. 공무일기.
김주희(金周熙)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동학가사.
논학가 (論學歌)
김주희(金周熙)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동학가사.
『농민』은 1950년 이무영(李無影)이 창작한 장편소설이다. 1950년 1월 1일부터 5월 21일까지 『한성일보』에 연재되었다. 대하 연작소설 「농민」의 5부작 중 1부에 해당되며, 2부 「농군」은 1953년 『서울신문』에, 3부 「노농」은 1954년 『대구일보』에 연재되었다. 『농민』은 처음에는 5부작으로 계획됐으나 동학 혁명에서부터 3·1운동에 이르는 3부작을 창작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중 장편소설 『농민』은 동학농민운동을 배경으로 한 농민들의 투쟁을 보여준다.
농민 (農民)
『농민』은 1950년 이무영(李無影)이 창작한 장편소설이다. 1950년 1월 1일부터 5월 21일까지 『한성일보』에 연재되었다. 대하 연작소설 「농민」의 5부작 중 1부에 해당되며, 2부 「농군」은 1953년 『서울신문』에, 3부 「노농」은 1954년 『대구일보』에 연재되었다. 『농민』은 처음에는 5부작으로 계획됐으나 동학 혁명에서부터 3·1운동에 이르는 3부작을 창작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중 장편소설 『농민』은 동학농민운동을 배경으로 한 농민들의 투쟁을 보여준다.
박광호는 개항기 충청도 지방을 대표하여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인이다. 1871년 3월 영해에서 최초로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교조의 신원과 동학 포교에 대한 공인을 요구하는 공주와 삼례집회가 이어졌다. 동학지도부에서는 서울 복합상소를 결정하였고, 박광호를 소수(疏首)로 임명하였다. 박광호 등 40여 명은 1893년 과거시험을 치르는 선비들로 꾸미고 상경하여 광화문 앞에서 3일 낮밤을 절규하며 상소하였다. 그러나 동학교도에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고, 교조신원운동의 방향은 크게 전환되어 ‘척왜양창의’를 기치로 내건 보은집회가 일어났다.
박광호 (朴光浩)
박광호는 개항기 충청도 지방을 대표하여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인이다. 1871년 3월 영해에서 최초로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교조의 신원과 동학 포교에 대한 공인을 요구하는 공주와 삼례집회가 이어졌다. 동학지도부에서는 서울 복합상소를 결정하였고, 박광호를 소수(疏首)로 임명하였다. 박광호 등 40여 명은 1893년 과거시험을 치르는 선비들로 꾸미고 상경하여 광화문 앞에서 3일 낮밤을 절규하며 상소하였다. 그러나 동학교도에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고, 교조신원운동의 방향은 크게 전환되어 ‘척왜양창의’를 기치로 내건 보은집회가 일어났다.
조석헌이 1894년부터 1918년까지 동학에 입교하고 접주로 활동한 내용을 기록한 일기.
북접일기 (北接日記)
조석헌이 1894년부터 1918년까지 동학에 입교하고 접주로 활동한 내용을 기록한 일기.
조선후기 교조신원운동 당시의 천도교인.
박석규 (朴錫奎)
조선후기 교조신원운동 당시의 천도교인.
작자·연대 미상의 동학가사(東學歌辭).
명운가 (明運歌)
작자·연대 미상의 동학가사(東學歌辭).
대전광역시 동구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으로 축조된 백제의 성곽. 산성.
견두산성 (犬頭山城)
대전광역시 동구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으로 축조된 백제의 성곽. 산성.
보은집회는 1893년 3월과 4월 동학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척왜양(斥倭洋)’을 내걸고 충청북도 보은에서 개최한 집회이다.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한 광화문 복합상소가 실패한 후에 척왜양의 기치를 내걸고 개최한 집회이다. 전국에서 1만 내지 2만 명 정도의 교도가 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에서 동학을 위협세력으로 간주하여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반면에 관군과 무력 충돌을 우려한 동학지도부는 평화적인 노선을 선택하여 해산을 결정하였다. 동학의 현실대항적 능력을 한 단계 높여서 동학농민혁명의 발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보은집회 (報恩集會)
보은집회는 1893년 3월과 4월 동학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척왜양(斥倭洋)’을 내걸고 충청북도 보은에서 개최한 집회이다.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한 광화문 복합상소가 실패한 후에 척왜양의 기치를 내걸고 개최한 집회이다. 전국에서 1만 내지 2만 명 정도의 교도가 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에서 동학을 위협세력으로 간주하여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반면에 관군과 무력 충돌을 우려한 동학지도부는 평화적인 노선을 선택하여 해산을 결정하였다. 동학의 현실대항적 능력을 한 단계 높여서 동학농민혁명의 발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김개남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운동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김개남 (金開南)
김개남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운동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박준승은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동학 교인으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창건 이후 천도교 임실 교구를 이끌며 원로로 활동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준승 (朴準承)
박준승은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동학 교인으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창건 이후 천도교 임실 교구를 이끌며 원로로 활동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