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반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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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부터 1949년까지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특별위원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특별위원회.
곽상훈은 동래3·1운동 참가, 신간회 활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 부산 동래 출신으로, 1919년 고교 재학 중 고향으로 내려가 3·1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후반,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 검찰 차장을 지냈다. 2대∼5대 민의원, 1960년 4·19 직후 대통령권한대행, 같은 해 민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5·16군사정변 당시 민주당 탈당 후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 비난을 받았다.
곽상훈 (郭尙勳)
곽상훈은 동래3·1운동 참가, 신간회 활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 부산 동래 출신으로, 1919년 고교 재학 중 고향으로 내려가 3·1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후반,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 검찰 차장을 지냈다. 2대∼5대 민의원, 1960년 4·19 직후 대통령권한대행, 같은 해 민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5·16군사정변 당시 민주당 탈당 후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 비난을 받았다.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김약수 (金若水)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권승렬은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 및 여운형·안창호의 검거 사건 등을 변론한 법조인이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25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26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법과를 수석 졸업하였다. 일본인변호사회와의 통합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독립운동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무료로 변론했다. 1920∼1930년대 독립운동·사상문제에 관한 변호를 자임하였으며, 여운형(1929년), 안창호(1932년) 등의 변호를 맡았다. 광복 이후 과도정부의 사법부 법제처장,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법무부 차관과 검찰총장, 법무부장관과 한국법학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권승렬 (權承烈)
권승렬은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 및 여운형·안창호의 검거 사건 등을 변론한 법조인이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25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26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법과를 수석 졸업하였다. 일본인변호사회와의 통합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독립운동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무료로 변론했다. 1920∼1930년대 독립운동·사상문제에 관한 변호를 자임하였으며, 여운형(1929년), 안창호(1932년) 등의 변호를 맡았다. 광복 이후 과도정부의 사법부 법제처장,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법무부 차관과 검찰총장, 법무부장관과 한국법학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진학문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 『요조한〔四畳半〕』, 『홍루(紅淚)』 등을 번역한 소설가이자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20년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정치경제부장, 1924년 『시대일보』 편집인 겸 발행인을 지냈고, 1937년 만주국 내무국 참사관과 1945년 중추원참의로 임명되었으며, 8‧15광복 이후 경제계에 투신하여 1963년부터 한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진학문 (秦學文)
진학문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 『요조한〔四畳半〕』, 『홍루(紅淚)』 등을 번역한 소설가이자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20년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정치경제부장, 1924년 『시대일보』 편집인 겸 발행인을 지냈고, 1937년 만주국 내무국 참사관과 1945년 중추원참의로 임명되었으며, 8‧15광복 이후 경제계에 투신하여 1963년부터 한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익흥은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자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16특사로 석방된 경찰·군인·정치인이다. 1905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이다. 일본 큐슈제국대학교, 도쿄대학교 대학원 등을 다녔다. 일제 하에서 경찰서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경기도 경찰청장, 서울시 경찰국장, 경기도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평화통일정책자문회 상임위원 등으로 위촉되어 1990년대까지 활동하였다. 방위포장, 충무무공훈장, 청조소성훈장, 동엽 자유훈장 등을 받았다.
이익흥 (李益興)
이익흥은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자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16특사로 석방된 경찰·군인·정치인이다. 1905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이다. 일본 큐슈제국대학교, 도쿄대학교 대학원 등을 다녔다. 일제 하에서 경찰서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경기도 경찰청장, 서울시 경찰국장, 경기도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평화통일정책자문회 상임위원 등으로 위촉되어 1990년대까지 활동하였다. 방위포장, 충무무공훈장, 청조소성훈장, 동엽 자유훈장 등을 받았다.
강명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상하이 임시정부 의원을 지내고 1920년대 통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거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항일 무력 항쟁에 나섰으며, 8·15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육군 장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강명규 (姜明奎)
강명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상하이 임시정부 의원을 지내고 1920년대 통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거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항일 무력 항쟁에 나섰으며, 8·15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육군 장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서우석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은행 촉탁, 해남흥산주식회사 지배인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민주당 고문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89년 전남 광주 출생으로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신간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상민대회 집행위원, 호남은행 촉탁, 해남흥산 지배인 등을 지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 위원, 한국민주당 광주지부 총무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퇴임 후에도 국민장위원회 위원과 민주당 창당 준비위원, 민주당 감찰위원, 민주당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서우석 (徐禹錫)
서우석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은행 촉탁, 해남흥산주식회사 지배인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민주당 고문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89년 전남 광주 출생으로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신간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상민대회 집행위원, 호남은행 촉탁, 해남흥산 지배인 등을 지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 위원, 한국민주당 광주지부 총무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퇴임 후에도 국민장위원회 위원과 민주당 창당 준비위원, 민주당 감찰위원, 민주당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배헌은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고국에 입국해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부터 신간회 운동을 전개하고, 1931년 이리야구협회 창립과 함께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대한국민당의 부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배헌 (裵憲)
배헌은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고국에 입국해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부터 신간회 운동을 전개하고, 1931년 이리야구협회 창립과 함께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대한국민당의 부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송필만은 일제강점기 때, 이승만 지지 세력 규합을 위해 힘쓰던 정치인이다. 1890년 충북 진천 출생으로 일본 유학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유학을 전후로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도왔다. 해방 후 이승만 비서로 근무하며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 부장,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북 진천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5·16군사정변 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가 1963년 해금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지지 성명 발표에 참여하였으며, 1978년 사망하였다.
송필만 (宋必滿)
송필만은 일제강점기 때, 이승만 지지 세력 규합을 위해 힘쓰던 정치인이다. 1890년 충북 진천 출생으로 일본 유학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유학을 전후로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도왔다. 해방 후 이승만 비서로 근무하며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 부장,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북 진천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5·16군사정변 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가 1963년 해금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지지 성명 발표에 참여하였으며, 1978년 사망하였다.
정인흥은 대한제국기 의병 재판에 참가한 구한말의 관료, 법조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찬의를 지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한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자 중부 지방의 의병을 해산시키기 위한 선무사로 파견되었다. 1908년 판사로 임명되어 의병 재판에 참가하였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정인흥 (鄭寅興)
정인흥은 대한제국기 의병 재판에 참가한 구한말의 관료, 법조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찬의를 지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한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자 중부 지방의 의병을 해산시키기 위한 선무사로 파견되었다. 1908년 판사로 임명되어 의병 재판에 참가하였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을 역임한 정치인.
이구수 (李龜洙)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을 역임한 정치인.
일제강점기 때, 항일투쟁 학생모임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해방 이후,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정진근 (鄭鎭瑾)
일제강점기 때, 항일투쟁 학생모임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해방 이후,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상해군정서 전북군무총장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 정치인이다. 1888년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 마령면 평지리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1921년 조선독립군 청년단 의용군을 조직하다가 검거되어 1년간 복역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남도 진안군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49년 7월 대한노농당 소속으로 대한국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오기열 (吳基烈)
일제강점기 때 상해군정서 전북군무총장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 정치인이다. 1888년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 마령면 평지리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1921년 조선독립군 청년단 의용군을 조직하다가 검거되어 1년간 복역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남도 진안군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49년 7월 대한노농당 소속으로 대한국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판사 · 변호사로 활동하고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법조인 · 정치인이다. 1882년 2월 14일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1918년 11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판사로 임명되었다. 1921년 10월 북경에서 열린 국제변호사회의에 조선인 변호사 대표로 참석했다. 1932년 9월 ‘대구노동회(勞働會) 사건’으로 노동회 서부 총무로서 검거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1948년 5월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밀양 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박해극 (朴海克)
일제강점기 때 판사 · 변호사로 활동하고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법조인 · 정치인이다. 1882년 2월 14일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1918년 11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판사로 임명되었다. 1921년 10월 북경에서 열린 국제변호사회의에 조선인 변호사 대표로 참석했다. 1932년 9월 ‘대구노동회(勞働會) 사건’으로 노동회 서부 총무로서 검거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1948년 5월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밀양 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에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00년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출생으로, 1923년 4월 도쿄에서 박열(朴烈) 등과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고, 1926년 11월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을 조직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경상북도 선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972년 제헌동지회 회원으로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서 발표에 동참했다. 1983년 7월 5일 사망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육홍균 (陸洪均)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에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00년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출생으로, 1923년 4월 도쿄에서 박열(朴烈) 등과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고, 1926년 11월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을 조직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경상북도 선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972년 제헌동지회 회원으로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서 발표에 동참했다. 1983년 7월 5일 사망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다. 총 3장과 부칙으로 구성되었으며, 반민족 행위의 범주, 특별조사위원회의 구성과 조사 방법 및 절차,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의 구성과 재판절차, 공소시효를 규정하였다. 이 법에 따라 1949년 1월부터 8월 31일까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모두 680여 명을 체포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가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처벌법등폐지에관한법률」이 제정, 공포되어 폐지되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反民族行爲處罰法)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다. 총 3장과 부칙으로 구성되었으며, 반민족 행위의 범주, 특별조사위원회의 구성과 조사 방법 및 절차,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의 구성과 재판절차, 공소시효를 규정하였다. 이 법에 따라 1949년 1월부터 8월 31일까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모두 680여 명을 체포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가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처벌법등폐지에관한법률」이 제정, 공포되어 폐지되었다.
최재서는 일제강점기 친일문학 활동을 한 문예비평가이자 대학 교수이다. 영국 낭만주의와 주지주의 문학론을 조선에 소개하며 모더니즘 문학론을 이끌었다.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전시체제기 국민문학을 선도했으며, 대동아문학자대회에서 조선 문인 대표로 발언을 한 친일 문인이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경성법학전문학교 강사로 활동했으며, 잡지 『인문평론』(1939)과 『국민문학』(1941)을 창간한 발행인이자 편집자이다. 해방 후에는 동아대학교, 연세대학교, 동국대학교, 한양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최재서 (崔載瑞)
최재서는 일제강점기 친일문학 활동을 한 문예비평가이자 대학 교수이다. 영국 낭만주의와 주지주의 문학론을 조선에 소개하며 모더니즘 문학론을 이끌었다.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전시체제기 국민문학을 선도했으며, 대동아문학자대회에서 조선 문인 대표로 발언을 한 친일 문인이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경성법학전문학교 강사로 활동했으며, 잡지 『인문평론』(1939)과 『국민문학』(1941)을 창간한 발행인이자 편집자이다. 해방 후에는 동아대학교, 연세대학교, 동국대학교, 한양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희망의 나라로」는 1933년 6월 『현제명작곡집』 제2집에 수록되어 있는 가곡이다. 현제명(玄濟明, 1903~1960) 작사 및 작곡으로 자신의 2번째 작곡집인 『현제명작곡집』에 수록된 12곡 중 10번째로 담겨 있다. 『현제명작곡집』 제2집은 현제명이 서울 연희전문학교 재직 중 연희전문학교출판부에서 1933년 6월 25일에 출간한 가곡집이다. 이 노래는 밝고 경쾌하며 힘찬 선율이 특징이다.
희망의 나라로
「희망의 나라로」는 1933년 6월 『현제명작곡집』 제2집에 수록되어 있는 가곡이다. 현제명(玄濟明, 1903~1960) 작사 및 작곡으로 자신의 2번째 작곡집인 『현제명작곡집』에 수록된 12곡 중 10번째로 담겨 있다. 『현제명작곡집』 제2집은 현제명이 서울 연희전문학교 재직 중 연희전문학교출판부에서 1933년 6월 25일에 출간한 가곡집이다. 이 노래는 밝고 경쾌하며 힘찬 선율이 특징이다.
김우영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독립운동가를 변론하다가 관료로 변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86년 동래부에서 태어났으며, 나혜석과 결혼하였다. 1919년 교토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개업 후 독립운동가 관련 사건들을 변호하였으나, 1921년 일본 외무성 관리로 변신하여 안둥현 주재 일본영사관 부영사를 역임하였다. 1937년 이후 일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하여 수차례 훈장을 받았다. 1944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김우영 (金雨英)
김우영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독립운동가를 변론하다가 관료로 변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86년 동래부에서 태어났으며, 나혜석과 결혼하였다. 1919년 교토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개업 후 독립운동가 관련 사건들을 변호하였으나, 1921년 일본 외무성 관리로 변신하여 안둥현 주재 일본영사관 부영사를 역임하였다. 1937년 이후 일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하여 수차례 훈장을 받았다. 1944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