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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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崔南善)이 지은 백두산 기행문.
백두산근참기 (白頭山覲參記)
최남선(崔南善)이 지은 백두산 기행문.
「백두산기(白頭山記)」는 조선 후기 홍세태(洪世泰)가 지은 백두산 기행문이다. 다만 작자가 자신이 직접 백두산을 답사하고 쓴 기행문이 아니라 '김경문(金慶門)'이라는 역관(譯官)의 말을 통해 들은 백두산 국경선 확정의 상황과 백두산의 지형 및 승경(勝景)을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기록하였다. 홍세태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 권 9에 수록되어 있다.
백두산기 (白頭山記)
「백두산기(白頭山記)」는 조선 후기 홍세태(洪世泰)가 지은 백두산 기행문이다. 다만 작자가 자신이 직접 백두산을 답사하고 쓴 기행문이 아니라 '김경문(金慶門)'이라는 역관(譯官)의 말을 통해 들은 백두산 국경선 확정의 상황과 백두산의 지형 및 승경(勝景)을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기록하였다. 홍세태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 권 9에 수록되어 있다.
「백두산등척기」는 1930년 안재홍(安在鴻)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백두산 기행문이다. 조선일보 부사장이던 안재홍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기획하였다. 1930년 7월 23일부터 8월 7일까지의 여행 기록을 담았고, 같은 해 8월 11부터 9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 후 1931년 유성사(流星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백두산의 자연에 대한 꼼꼼하고도 간결한 묘사, 변경민의 척박한 삶을 향한 애정어린 시선, 백두산 곳곳에 얽힌 조선상고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준다.
백두산등척기 (白頭山登陟記)
「백두산등척기」는 1930년 안재홍(安在鴻)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백두산 기행문이다. 조선일보 부사장이던 안재홍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기획하였다. 1930년 7월 23일부터 8월 7일까지의 여행 기록을 담았고, 같은 해 8월 11부터 9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 후 1931년 유성사(流星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백두산의 자연에 대한 꼼꼼하고도 간결한 묘사, 변경민의 척박한 삶을 향한 애정어린 시선, 백두산 곳곳에 얽힌 조선상고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준다.
「백두산 설화」는 백두산 및 백두산과 관련된 인물·사건·지형, 그리고 백두산에 서식하는 동식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백두산의 내력에 관한 신화적 서사뿐 아니라 백두산과 관련된 유명한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 백두산에 있는 바위나 호수에 관한 이야기, 백두산에 사는 호랑이나 그 밖의 특별한 동식물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포함된다. 백두산은 그 자체로 오랜 세월 동안 신화적 공간으로 표상됐으므로 백두산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특정한 신화적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백두산 설화 (白頭山 說話)
「백두산 설화」는 백두산 및 백두산과 관련된 인물·사건·지형, 그리고 백두산에 서식하는 동식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백두산의 내력에 관한 신화적 서사뿐 아니라 백두산과 관련된 유명한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 백두산에 있는 바위나 호수에 관한 이야기, 백두산에 사는 호랑이나 그 밖의 특별한 동식물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포함된다. 백두산은 그 자체로 오랜 세월 동안 신화적 공간으로 표상됐으므로 백두산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특정한 신화적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간도는 17세기, 중국의 지린성[吉林省] 동남부와 압록강·두만강 너머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국과 한국 간 분쟁하던 지역이다. 19세기 중반부터 만주에 사는 조선인이 미간지를 개발하고 정착하면서 분쟁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변두리였던 만주가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간도 문제는 국제 문제와 연동되었다. 1907년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간도협약’으로 인해 간도는 중국으로 귀속되었다. 한일합방 후 민족운동가들은 1870년대부터 형성된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시도하였고 이를 탄압하는 일제의 침략이 지속되었다.
간도 (間島)
간도는 17세기, 중국의 지린성[吉林省] 동남부와 압록강·두만강 너머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국과 한국 간 분쟁하던 지역이다. 19세기 중반부터 만주에 사는 조선인이 미간지를 개발하고 정착하면서 분쟁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변두리였던 만주가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간도 문제는 국제 문제와 연동되었다. 1907년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간도협약’으로 인해 간도는 중국으로 귀속되었다. 한일합방 후 민족운동가들은 1870년대부터 형성된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시도하였고 이를 탄압하는 일제의 침략이 지속되었다.
함경북도 무산군의 연혁·인문지리·행정 등을 수록하여 1899년에 편찬한 읍지.
무산군읍지 (茂山郡邑誌)
함경북도 무산군의 연혁·인문지리·행정 등을 수록하여 1899년에 편찬한 읍지.
만주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요령성 · 길림성 · 흑룡강성 및 내몽고 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포괄한 지역이다. 고대부터 여러 종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중국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변경지역이었다. 1870년대~1900년대까지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한인사회를 이루며 항일민족운동을 벌인 곳이다. 농민으로 구성된 한인사회는 민족운동의 기반이었다. 20세기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 1932년 만주국을 건국하였고 일제는 전쟁과 개발에 동원하기 위하여 조선인에 대한 정책이민을 추진하였다. 조선인은 '불령선인'에서 '개척자'로 불렸다.
만주 (滿洲)
만주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요령성 · 길림성 · 흑룡강성 및 내몽고 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포괄한 지역이다. 고대부터 여러 종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중국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변경지역이었다. 1870년대~1900년대까지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한인사회를 이루며 항일민족운동을 벌인 곳이다. 농민으로 구성된 한인사회는 민족운동의 기반이었다. 20세기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 1932년 만주국을 건국하였고 일제는 전쟁과 개발에 동원하기 위하여 조선인에 대한 정책이민을 추진하였다. 조선인은 '불령선인'에서 '개척자'로 불렸다.
1712년 접반사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조사과정을 기록한 일지. 공무일기.
북정일기 (北征日記)
1712년 접반사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조사과정을 기록한 일지. 공무일기.
보천군은 양강도 북동부에 있는 군이다. 1952년 혜산군의 보천면, 대진면과 운흥면의 일부 지역을 합쳐 신설하였다. 이 지역의 중심을 이루는 보천보가 있는 보천면의 이름을 따 보천군이라 칭하였다. 2003년 현재 행정 구역은 1개 읍, 2개 노동자구, 17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보천읍이며 인구는 3만 67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1,500m 이상의 산지이다. 축산업이 발달하였으며 아마와 호프가 특산물로 유명하다. 군 전체가 백두산식물보호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업이 주요 산업이다.
보천군 (普天郡)
보천군은 양강도 북동부에 있는 군이다. 1952년 혜산군의 보천면, 대진면과 운흥면의 일부 지역을 합쳐 신설하였다. 이 지역의 중심을 이루는 보천보가 있는 보천면의 이름을 따 보천군이라 칭하였다. 2003년 현재 행정 구역은 1개 읍, 2개 노동자구, 17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보천읍이며 인구는 3만 67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1,500m 이상의 산지이다. 축산업이 발달하였으며 아마와 호프가 특산물로 유명하다. 군 전체가 백두산식물보호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업이 주요 산업이다.
양강도 삼지연시에 있는 호수.
삼지연 (三池淵)
양강도 삼지연시에 있는 호수.
삼지연시는 북한의 양강도 북동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은 대홍단군·백암군, 남쪽은 보천군, 서쪽과 북쪽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여 있다. 1961년에 양강도 보천군의 일부 지역과 함경북도 연사군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군을 새로 만들었다. 명칭은 삼지연호수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2019년 12월에 시로 승격되었다. 우리나라 지붕으로 불리는 백두용암대지 위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연평균기온이 가장 낮은 곳으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 지역이다. 유적으로는 백두산정계비가 남아 있으며, 동쪽 언덕에는 신무성이 있다.
삼지연시 (三池淵市)
삼지연시는 북한의 양강도 북동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은 대홍단군·백암군, 남쪽은 보천군, 서쪽과 북쪽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여 있다. 1961년에 양강도 보천군의 일부 지역과 함경북도 연사군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군을 새로 만들었다. 명칭은 삼지연호수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2019년 12월에 시로 승격되었다. 우리나라 지붕으로 불리는 백두용암대지 위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연평균기온이 가장 낮은 곳으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 지역이다. 유적으로는 백두산정계비가 남아 있으며, 동쪽 언덕에는 신무성이 있다.
조선후기 북부지방과 만주지방에 관한 군사적인 용도로 제작한 지도. 관방지도.
서북강계도 (西北彊界圖)
조선후기 북부지방과 만주지방에 관한 군사적인 용도로 제작한 지도. 관방지도.
조선후기 우리나라의 북방에 관한 군사적인 용도로 제작한 지도. 관방지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
조선후기 우리나라의 북방에 관한 군사적인 용도로 제작한 지도. 관방지도.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대사간,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유명응 (兪命凝)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대사간,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화산지형은 마그마가 지표면으로 분출하여 화산가스·용암·화산쇄설물의 형태로 지상에 방출·퇴적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지형이다. 마그마의 분출구를 화구라고 하며, 화구 주위에는 분출물이 퇴적하여 화산체를 형성한다. 폭발적인 분화에 따른 붕괴나 함몰로 형성된 지형도 화산지형에 포함된다. 한반도는 중생대에 화산활동이 활발했지만 풍화·침식으로 인해 당시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는 백두산과 그 주변의 용암대지, 철원·평강·신계·곡산의 용암대지, 제주도·울릉도 등에서 화산지형을 볼 수 있는데 주로 제4기 플라이스토세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다.
화산지형 (火山地形)
화산지형은 마그마가 지표면으로 분출하여 화산가스·용암·화산쇄설물의 형태로 지상에 방출·퇴적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지형이다. 마그마의 분출구를 화구라고 하며, 화구 주위에는 분출물이 퇴적하여 화산체를 형성한다. 폭발적인 분화에 따른 붕괴나 함몰로 형성된 지형도 화산지형에 포함된다. 한반도는 중생대에 화산활동이 활발했지만 풍화·침식으로 인해 당시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는 백두산과 그 주변의 용암대지, 철원·평강·신계·곡산의 용암대지, 제주도·울릉도 등에서 화산지형을 볼 수 있는데 주로 제4기 플라이스토세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경희대학교 부속 박물관.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 (慶熙大學校 惠靜博物館)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경희대학교 부속 박물관.
조중변계조약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조약이다.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김일성이 '중조변계조약'을 체결하여, 압록강, 두만강 상의 섬과 사주의 분할 근거를 제시했다. 1964년 3월 20일 북경에서 천이(陳毅)와 박성철이 천지분할은 북한이 54.5%, 중국은 45.5% 점유하는 '중조변계의정서'에 서명하였다. 이 의정서로 백두산 천지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한반도 분단 해체 과정에서 고구려사 문제 등의 역사 논쟁과 더불어 간도조약에 기반한 북중국경조약이 논쟁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조중변계조약 (朝中邊界條約)
조중변계조약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조약이다.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김일성이 '중조변계조약'을 체결하여, 압록강, 두만강 상의 섬과 사주의 분할 근거를 제시했다. 1964년 3월 20일 북경에서 천이(陳毅)와 박성철이 천지분할은 북한이 54.5%, 중국은 45.5% 점유하는 '중조변계의정서'에 서명하였다. 이 의정서로 백두산 천지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한반도 분단 해체 과정에서 고구려사 문제 등의 역사 논쟁과 더불어 간도조약에 기반한 북중국경조약이 논쟁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올빼미목 올빼미과의 텃새.
긴점박이올빼미
올빼미목 올빼미과의 텃새.
『감계사등록』은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의 국경선을 획정할 때 조선측 대표인 이중하가 작성한 등록이다. 1860년 북경회담으로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자, 조선과 청은 두만강과 백두산 인근의 국경을 정비하는 감계 회담을 추진하였다. 당시 안변부사였던 이중하는 두 차례 회담에 조선 대표로 파견되었다. 그는 회담 진행 과정에서 작성된 각종 문서와 고종에게 직접 보고한 계초(啓草), 별단초(別單草) 및 회담 내용인 담초(談草) 등을 날짜순으로 정리하였다. 19세기 말 한국 북방 영토 연구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감계사등록 (勘界事謄錄)
『감계사등록』은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의 국경선을 획정할 때 조선측 대표인 이중하가 작성한 등록이다. 1860년 북경회담으로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자, 조선과 청은 두만강과 백두산 인근의 국경을 정비하는 감계 회담을 추진하였다. 당시 안변부사였던 이중하는 두 차례 회담에 조선 대표로 파견되었다. 그는 회담 진행 과정에서 작성된 각종 문서와 고종에게 직접 보고한 계초(啓草), 별단초(別單草) 및 회담 내용인 담초(談草) 등을 날짜순으로 정리하였다. 19세기 말 한국 북방 영토 연구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