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신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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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서울에서 창립한 민족협동전선.
신간회 (新幹會)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서울에서 창립한 민족협동전선.
조병옥은 일제강점기 신우회 회원, 신간회 재정부장, 총무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4년에 태어나 1960년에 사망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신간회 간부로 일했으며 광주학생운동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서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사망했다.
조병옥 (趙炳玉)
조병옥은 일제강점기 신우회 회원, 신간회 재정부장, 총무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4년에 태어나 1960년에 사망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신간회 간부로 일했으며 광주학생운동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서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사망했다.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선전부 총무간사, 조선일보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독립운동가.
이승복 (李昇馥)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선전부 총무간사, 조선일보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독립운동가.
김병로는 해방 이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부장, 대법원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64년에 사망했다. 1910년 일본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하며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했다.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하며 다방면의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 초대 및 제2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대법원장 재임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온갖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김병로 (金炳魯)
김병로는 해방 이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부장, 대법원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64년에 사망했다. 1910년 일본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하며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했다.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하며 다방면의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 초대 및 제2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대법원장 재임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온갖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안재홍 (安在鴻)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흥업구락부는 1925년 3월 이승만의 독립혁명동지회와 연계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이다. 서울 신흥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흥업구락부가 조직되었으며, 창립회원 대부분은 YMCA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진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이었다. 이들은 실력양성운동을 수행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관련자 54명이 체포되었다. 1938년 9월 일제는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에게 ‘전향 성명서’를 받은 후, 이들을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하였다.
흥업구락부 (興業俱樂部)
흥업구락부는 1925년 3월 이승만의 독립혁명동지회와 연계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이다. 서울 신흥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흥업구락부가 조직되었으며, 창립회원 대부분은 YMCA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진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이었다. 이들은 실력양성운동을 수행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관련자 54명이 체포되었다. 1938년 9월 일제는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에게 ‘전향 성명서’를 받은 후, 이들을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하였다.
연정회는 1923년 말부터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자치운동단체이다. 민족주의 계열에서 추진했던 실력양성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23년 12월에 연정회를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절대 독립에 대한 부정은 사회주의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1925년 이후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부활 계획이 다시 시도되었으나, 1927년 신간회의 결성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연정회 (硏政會)
연정회는 1923년 말부터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자치운동단체이다. 민족주의 계열에서 추진했던 실력양성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23년 12월에 연정회를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절대 독립에 대한 부정은 사회주의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1925년 이후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부활 계획이 다시 시도되었으나, 1927년 신간회의 결성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전진한은 해방 이후 초대 사회부장관, 민정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사회운동가이다. 1901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서울로 상경해 고학 중 1920년 기미육영회의 동경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유학시절인 1926년 동지들과 ‘협동조합운동사’를 만들어 항일운동, 노동운동, 협동조합운동, 대중운동의 발판을 삼았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냈다. 5차례의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정당 부총재, 민중당 지도위원 등을 지냈으며,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으며, 1972년 4월 별세했다.
전진한 (錢鎭漢)
전진한은 해방 이후 초대 사회부장관, 민정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사회운동가이다. 1901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서울로 상경해 고학 중 1920년 기미육영회의 동경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유학시절인 1926년 동지들과 ‘협동조합운동사’를 만들어 항일운동, 노동운동, 협동조합운동, 대중운동의 발판을 삼았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냈다. 5차례의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정당 부총재, 민중당 지도위원 등을 지냈으며,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으며, 1972년 4월 별세했다.
권동진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천도교가 창건할 때부터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6 · 10만세운동 당시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신간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였다.
권동진 (權東鎭)
권동진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천도교가 창건할 때부터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6 · 10만세운동 당시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신간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전라청년연맹 상임위원, 전남청년연맹 위원장, 신간회 상무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제2차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장석천 (張錫天)
일제강점기 때, 전라청년연맹 상임위원, 전남청년연맹 위원장, 신간회 상무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제2차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자, 빈민층을 변호하였으며, 해방 이후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정치인·독립운동가.
허헌 (許憲)
일제강점기 때,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자, 빈민층을 변호하였으며, 해방 이후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정치인·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여성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정치인.
정칠성 (丁七星)
일제강점기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여성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정치인.
방향전환론은 사회주의운동의 방향 전환에 부응해 자연생장적 문학운동을 목적의식적 문학운동으로 전환시키려 한 문예운동론이다. 1927년 박영희가 최초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동경의 제3전선파인 이북만과 한설야는 정치투쟁과 보다 밀접히 연결된 방향전환론을 제시했다. 1930년부터 임화·안막·권환 등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약칭 카프) 소장파는 볼세비키화를 본격화하였다. 볼세비키화에 따라 카프의 정치주의적 편향은 심화됐고 프로문학운동의 이념과 전략은 극좌화되었다. 그 결과 카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어 프로문학운동은 쇠락하게 된다.
방향전환론 (方向轉換論)
방향전환론은 사회주의운동의 방향 전환에 부응해 자연생장적 문학운동을 목적의식적 문학운동으로 전환시키려 한 문예운동론이다. 1927년 박영희가 최초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동경의 제3전선파인 이북만과 한설야는 정치투쟁과 보다 밀접히 연결된 방향전환론을 제시했다. 1930년부터 임화·안막·권환 등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약칭 카프) 소장파는 볼세비키화를 본격화하였다. 볼세비키화에 따라 카프의 정치주의적 편향은 심화됐고 프로문학운동의 이념과 전략은 극좌화되었다. 그 결과 카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어 프로문학운동은 쇠락하게 된다.
곽상훈은 동래3·1운동 참가, 신간회 활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 부산 동래 출신으로, 1919년 고교 재학 중 고향으로 내려가 3·1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후반,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 검찰 차장을 지냈다. 2대∼5대 민의원, 1960년 4·19 직후 대통령권한대행, 같은 해 민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5·16군사정변 당시 민주당 탈당 후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 비난을 받았다.
곽상훈 (郭尙勳)
곽상훈은 동래3·1운동 참가, 신간회 활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 부산 동래 출신으로, 1919년 고교 재학 중 고향으로 내려가 3·1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후반,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 검찰 차장을 지냈다. 2대∼5대 민의원, 1960년 4·19 직후 대통령권한대행, 같은 해 민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5·16군사정변 당시 민주당 탈당 후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 비난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주치의로 활동하며 독립군을 치료하고, 병원 수입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한 의사·독립운동가.
김필순 (金弼淳)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주치의로 활동하며 독립군을 치료하고, 병원 수입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한 의사·독립운동가.
김한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본 유학을 경험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법부 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회주의운동과 의혈 투쟁에 투신하여 무산자동지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김한 (金翰)
김한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본 유학을 경험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법부 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회주의운동과 의혈 투쟁에 투신하여 무산자동지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에 있는 항일 독립운동 기념관이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교문화권의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사·연구·보존·전시하고, 그 정신을 교육·계승하는 데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다. 전시와 연수 교육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기념관으로 연 2회 이상의 기획전시와 삼일절·현충일·광복절 선양 행사, 그리고 교육 연수를 통해 독립운동사의 가치와 교훈을 알리는 일을 추진하였다. 1894년 갑오의병에서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지역인들이 전개한 항일투쟁을 기리고, 교육하는 곳이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慶尙北道獨立運動記念館)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에 있는 항일 독립운동 기념관이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교문화권의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사·연구·보존·전시하고, 그 정신을 교육·계승하는 데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다. 전시와 연수 교육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기념관으로 연 2회 이상의 기획전시와 삼일절·현충일·광복절 선양 행사, 그리고 교육 연수를 통해 독립운동사의 가치와 교훈을 알리는 일을 추진하였다. 1894년 갑오의병에서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지역인들이 전개한 항일투쟁을 기리고, 교육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 신간회 중앙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장병준 (張柄俊)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 신간회 중앙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남화한인청년연맹 흑색공포단, 조선민족혁명당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용준 (李容俊)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남화한인청년연맹 흑색공포단, 조선민족혁명당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서 3·1운동을 준비하고 참여했으며, 신간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한 천도교인·정치인·독립운동가.
이병헌 (李炳憲)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서 3·1운동을 준비하고 참여했으며, 신간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한 천도교인·정치인·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