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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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조선국민대회와 조선자주당연합회 명의로 공포된 전단정부(傳單政府).
조선민국임시정부 (朝鮮民國臨時政府)
1919년 조선국민대회와 조선자주당연합회 명의로 공포된 전단정부(傳單政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기리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정한 국가의 공식 기념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大韓民國 臨時政府 樹立 記念日)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기리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정한 국가의 공식 기념일.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 사망했다. 1919년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요인 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으며, 한국민족혁명당 조직,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조선의용대 편성 등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부분 주요직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에 주력했다. 여운형 암살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등을 역임하다 1958년 숙청당했다.
김원봉 (金元鳳)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 사망했다. 1919년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요인 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으며, 한국민족혁명당 조직,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조선의용대 편성 등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부분 주요직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에 주력했다. 여운형 암살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등을 역임하다 1958년 숙청당했다.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노인단 (老人團)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행정 조직의 하나.
법무부 (法務部)
대한민국 임시정부 행정 조직의 하나.
도인권은 일제강점기, 안악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평양 3·1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 국장, 무관학교 교관, 임시 의정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감리교 목사이다. 구한국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무관학교 군사특과에 들어가 졸업한 뒤 하사관 간부 훈련 교관으로 임관되었으며,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이후부터 국권 회복 운동에 투신하였다.
도인권 (都寅權)
도인권은 일제강점기, 안악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평양 3·1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 국장, 무관학교 교관, 임시 의정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감리교 목사이다. 구한국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무관학교 군사특과에 들어가 졸업한 뒤 하사관 간부 훈련 교관으로 임관되었으며,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이후부터 국권 회복 운동에 투신하였다.
김희남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1929년 이래 중국, 만주에서 중국 항일군, 중국 철혈군 또는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중국 동삼성에 거주하는 한인을 보호하고 항일군의 통합적인 활동을 위하여 애썼다.
김희남 (金熙南)
김희남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1929년 이래 중국, 만주에서 중국 항일군, 중국 철혈군 또는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중국 동삼성에 거주하는 한인을 보호하고 항일군의 통합적인 활동을 위하여 애썼다.
일제강점기 때, 대동단에서 의친왕 망명 계획에 가담하였으며, 한국노병회 이사, 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 임시정부 경무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나창헌 (羅昌憲)
일제강점기 때, 대동단에서 의친왕 망명 계획에 가담하였으며, 한국노병회 이사, 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 임시정부 경무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신익희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후 상해로 떠나 26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았다. 귀국 후 임시정부 계통과 노선을 달리했고,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유세활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익희 (申翼熙)
신익희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후 상해로 떠나 26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았다. 귀국 후 임시정부 계통과 노선을 달리했고,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유세활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평안도 일대에서 설립이 추진되던 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 (新韓民國政府)
1919년 3·1운동 직후 평안도 일대에서 설립이 추진되던 임시정부.
일제강점기 때, 한성임시정부 참모부총장, 노령대한국민회의 참모총장, 상해임시정부 군무총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군인·정치인·독립운동가.
유동열 (柳東說)
일제강점기 때, 한성임시정부 참모부총장, 노령대한국민회의 참모총장, 상해임시정부 군무총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군인·정치인·독립운동가.
엄항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경기 여주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 시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전까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위원, 한국독립당 조직책,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8년 4월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1950년 납북되었으며, 1958년 반당·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후 4년 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엄항섭 (嚴恒燮)
엄항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경기 여주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 시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전까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위원, 한국독립당 조직책,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8년 4월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1950년 납북되었으며, 1958년 반당·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후 4년 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75년(고종 12)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유학과 정치활동을 했다. 광복 후 38선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1948년 실시된 총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에서 제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취임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발췌개헌안’,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켜 재선·3선에 성공했다. 4선 도전에서도 무투표로 당선됐으나 4·19혁명이 발발하자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승만 (李承晩)
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75년(고종 12)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유학과 정치활동을 했다. 광복 후 38선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1948년 실시된 총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에서 제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취임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발췌개헌안’,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켜 재선·3선에 성공했다. 4선 도전에서도 무투표로 당선됐으나 4·19혁명이 발발하자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했다.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경위대에서 임시정부 경비, 요원 양성 등의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영길 (李永吉)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경위대에서 임시정부 경비, 요원 양성 등의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원익은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외교위원회위원, 임시정부 서무국장, 인사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1885년(고종 22)에 태어나 1963년에 사망했다. 1919년 의주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의용군을 모집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4월 김병조·장덕로 등과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여운형이 파리에 파견될 때, 한국시정진술서를 국제연맹 장로교만국연합총회 및 미주 각 교회에 보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독립운동 자금조달차 입국했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이원익 (李元益)
이원익은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외교위원회위원, 임시정부 서무국장, 인사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1885년(고종 22)에 태어나 1963년에 사망했다. 1919년 의주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의용군을 모집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4월 김병조·장덕로 등과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여운형이 파리에 파견될 때, 한국시정진술서를 국제연맹 장로교만국연합총회 및 미주 각 교회에 보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독립운동 자금조달차 입국했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 재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
재무부 (財務部)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 재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다. 성균관 수료 후 일본에 유학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1950년 총선에서 전국최다득표자로 선출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조소앙 (趙素昻)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다. 성균관 수료 후 일본에 유학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1950년 총선에서 전국최다득표자로 선출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은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외적, 대내적인 혼란을 타개하고자 특무활동을 위한 기구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한인애국단 (韓人愛國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은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외적, 대내적인 혼란을 타개하고자 특무활동을 위한 기구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때의 수석 국무위원에 대한 명칭.
주석 (主席)
대한민국임시정부 때의 수석 국무위원에 대한 명칭.
김탕은 일제강점기 때,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외교관이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었다. 일제의 압박과 폭력적인 사건을 계속해서 유럽 언론에 폭로하는 일을 맡았으며, 한일합병이 강제적이며 불법적인 조약임으로 취소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국 사정, 임시정부의 활동, 외교사 등의 기사들이 실린 여러 책자를 프랑스어 또는 영어로 발간하였다. 김탕이 활동한 주 파리위원부는 최초의 대한민국 해외 대표부로서 유럽 각지에서의 독립활동에 도화선 역할을 했다.
김탕 (金湯)
김탕은 일제강점기 때,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외교관이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었다. 일제의 압박과 폭력적인 사건을 계속해서 유럽 언론에 폭로하는 일을 맡았으며, 한일합병이 강제적이며 불법적인 조약임으로 취소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국 사정, 임시정부의 활동, 외교사 등의 기사들이 실린 여러 책자를 프랑스어 또는 영어로 발간하였다. 김탕이 활동한 주 파리위원부는 최초의 대한민국 해외 대표부로서 유럽 각지에서의 독립활동에 도화선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