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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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75년(고종 12)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유학과 정치활동을 했다. 광복 후 38선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1948년 실시된 총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에서 제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취임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발췌개헌안’,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켜 재선·3선에 성공했다. 4선 도전에서도 무투표로 당선됐으나 4·19혁명이 발발하자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승만 (李承晩)
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75년(고종 12)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유학과 정치활동을 했다. 광복 후 38선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1948년 실시된 총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에서 제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취임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발췌개헌안’,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켜 재선·3선에 성공했다. 4선 도전에서도 무투표로 당선됐으나 4·19혁명이 발발하자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했다.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 사망했다. 1919년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요인 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으며, 한국민족혁명당 조직,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조선의용대 편성 등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부분 주요직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에 주력했다. 여운형 암살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등을 역임하다 1958년 숙청당했다.
김원봉 (金元鳳)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 사망했다. 1919년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요인 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으며, 한국민족혁명당 조직,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조선의용대 편성 등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부분 주요직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에 주력했다. 여운형 암살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등을 역임하다 1958년 숙청당했다.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다. 성균관 수료 후 일본에 유학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1950년 총선에서 전국최다득표자로 선출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조소앙 (趙素昻)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다. 성균관 수료 후 일본에 유학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1950년 총선에서 전국최다득표자로 선출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은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외적, 대내적인 혼란을 타개하고자 특무활동을 위한 기구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한인애국단 (韓人愛國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은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외적, 대내적인 혼란을 타개하고자 특무활동을 위한 기구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신익희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후 상해로 떠나 26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았다. 귀국 후 임시정부 계통과 노선을 달리했고,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유세활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익희 (申翼熙)
신익희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후 상해로 떠나 26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았다. 귀국 후 임시정부 계통과 노선을 달리했고,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유세활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서영해는 일제강점기 프랑스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문필가, 언론인이다. 1902년 부산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해 김규식을 만났다. 김규식의 권고로 프랑스로 건너가 고려통신사라는 이름을 걸고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잔악한 만행을 알리는 3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하던 1932년 안창호가 체포되자 일본의 야만적 억압에 항의하는 호소문을 프랑스 언론에 배포하였다. 해방 후 귀국해 기자 자격으로 남북교섭에 참가하였으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회의를 느껴 프랑스로 돌아가던 중 소식이 끊겼다.
서영해 (徐嶺海)
서영해는 일제강점기 프랑스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문필가, 언론인이다. 1902년 부산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해 김규식을 만났다. 김규식의 권고로 프랑스로 건너가 고려통신사라는 이름을 걸고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잔악한 만행을 알리는 3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하던 1932년 안창호가 체포되자 일본의 야만적 억압에 항의하는 호소문을 프랑스 언론에 배포하였다. 해방 후 귀국해 기자 자격으로 남북교섭에 참가하였으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회의를 느껴 프랑스로 돌아가던 중 소식이 끊겼다.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노인단 (老人團)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1945년 월남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극우반공조직.
백의사 (白衣社)
1945년 월남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극우반공조직.
대한민국임시정부 때의 수석 국무위원에 대한 명칭.
주석 (主席)
대한민국임시정부 때의 수석 국무위원에 대한 명칭.
엄항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경기 여주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 시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전까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위원, 한국독립당 조직책,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8년 4월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1950년 납북되었으며, 1958년 반당·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후 4년 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엄항섭 (嚴恒燮)
엄항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경기 여주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 시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전까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위원, 한국독립당 조직책,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8년 4월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1950년 납북되었으며, 1958년 반당·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후 4년 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구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설립한 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 (白凡金九紀念館)
김구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설립한 기념관.
일제강점기 때, 한성임시정부 참모부총장, 노령대한국민회의 참모총장, 상해임시정부 군무총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군인·정치인·독립운동가.
유동열 (柳東說)
일제강점기 때, 한성임시정부 참모부총장, 노령대한국민회의 참모총장, 상해임시정부 군무총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군인·정치인·독립운동가.
이원익은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외교위원회위원, 임시정부 서무국장, 인사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1885년(고종 22)에 태어나 1963년에 사망했다. 1919년 의주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의용군을 모집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4월 김병조·장덕로 등과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여운형이 파리에 파견될 때, 한국시정진술서를 국제연맹 장로교만국연합총회 및 미주 각 교회에 보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독립운동 자금조달차 입국했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이원익 (李元益)
이원익은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외교위원회위원, 임시정부 서무국장, 인사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1885년(고종 22)에 태어나 1963년에 사망했다. 1919년 의주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의용군을 모집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4월 김병조·장덕로 등과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여운형이 파리에 파견될 때, 한국시정진술서를 국제연맹 장로교만국연합총회 및 미주 각 교회에 보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독립운동 자금조달차 입국했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194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진영 주도로 신탁통치 반대를 표방하며 결성된 대중단체 연대조직.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
194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진영 주도로 신탁통치 반대를 표방하며 결성된 대중단체 연대조직.
일제강점기 때, 대동단에서 의친왕 망명 계획에 가담하였으며, 한국노병회 이사, 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 임시정부 경무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나창헌 (羅昌憲)
일제강점기 때, 대동단에서 의친왕 망명 계획에 가담하였으며, 한국노병회 이사, 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 임시정부 경무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919년 조선국민대회와 조선자주당연합회 명의로 공포된 전단정부(傳單政府).
조선민국임시정부 (朝鮮民國臨時政府)
1919년 조선국민대회와 조선자주당연합회 명의로 공포된 전단정부(傳單政府).
해방 이후 극우반공단체인 백의사를 결성해 활동한 지도자. 반공주의자.
염응택 (廉應澤)
해방 이후 극우반공단체인 백의사를 결성해 활동한 지도자. 반공주의자.
1919년 3·1운동 직후 평안도 일대에서 설립이 추진되던 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 (新韓民國政府)
1919년 3·1운동 직후 평안도 일대에서 설립이 추진되던 임시정부.
1946년 임시정부 진영을 중심으로 소집·구성한 우익 정치세력들의 통일전선체.
비상정치회의주비회 (非常政治會議籌備會)
1946년 임시정부 진영을 중심으로 소집·구성한 우익 정치세력들의 통일전선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 재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
재무부 (財務部)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 재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