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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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대외 선전활동을 위해 만든 미국의 해외선전방송.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한국어 방송 (美國의 소리(voice of america) 韓國語 放送)
1942년 대외 선전활동을 위해 만든 미국의 해외선전방송.
한길수는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중한민중동맹단 대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미국방공작봉사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 경기도 장단 출생으로 1905년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해 어린 시절부터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다. 1919년 호놀룰루에 있는 하와이방위군에 입대하였으며, 제대 후 하와이의 구세군에 가입하여 한인구세군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이후 한길수는 하와이 내 일본인의 위협성을 고발하는 강력한 반일운동을 펼쳤다. 1938년 중한민중동맹단의 대표로 미국 본토에서 일본의 팽창위협과 전쟁음모를 폭로하는 등 활발한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길수 (韓吉洙)
한길수는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중한민중동맹단 대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미국방공작봉사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 경기도 장단 출생으로 1905년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해 어린 시절부터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다. 1919년 호놀룰루에 있는 하와이방위군에 입대하였으며, 제대 후 하와이의 구세군에 가입하여 한인구세군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이후 한길수는 하와이 내 일본인의 위협성을 고발하는 강력한 반일운동을 펼쳤다. 1938년 중한민중동맹단의 대표로 미국 본토에서 일본의 팽창위협과 전쟁음모를 폭로하는 등 활발한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의 주필, 주미 외교위원부 외교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한인재단 총무 등을 역임하며 한인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언론인·정치인·독립운동가.
김원용 (金元容)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의 주필, 주미 외교위원부 외교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한인재단 총무 등을 역임하며 한인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언론인·정치인·독립운동가.
『재미한인 50년사』는 김원용이 하와이 초기 이민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미주 한인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1959년에 간행한 역사서이다.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 역사를 후대가 잊지 않고 계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김호가 김원용에게 의뢰해 편찬되었다. 1959년 필사본으로 출간되었으며 2004년에 현대어로 교정하고 사진 자료를 포함하여 재출간되었다. 한인들의 이민과 생활상, 정치, 교육 및 교회 활동 등 미주 한인사회의 전반적인 활동을 7장에 걸쳐 다루고 있다. 미주 한인의 전 영역을 최초로 정리한 중요한 역사서로 의의가 있으나 반이승만적 정서가 투영되어 있다.
재미한인 50년사 (在美韓人 五十年事)
『재미한인 50년사』는 김원용이 하와이 초기 이민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미주 한인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1959년에 간행한 역사서이다.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 역사를 후대가 잊지 않고 계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김호가 김원용에게 의뢰해 편찬되었다. 1959년 필사본으로 출간되었으며 2004년에 현대어로 교정하고 사진 자료를 포함하여 재출간되었다. 한인들의 이민과 생활상, 정치, 교육 및 교회 활동 등 미주 한인사회의 전반적인 활동을 7장에 걸쳐 다루고 있다. 미주 한인의 전 영역을 최초로 정리한 중요한 역사서로 의의가 있으나 반이승만적 정서가 투영되어 있다.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미주 한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최대의 학생단체이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개최될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하기 위해 1919년 1월 1일 오하이오주에서 미주대한인학생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미국 각지에서 한인학생들의 독자활동이 전개되자, 1921년 각 지역 학생회를 통합한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를 결성하였다. 1945년까지 활동하면서 영문·국문잡지를 발간하고, 국내에 의연금을 송금하며, 일제 침략규탄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학생신분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해방 후 근대 국가건설을 위한 인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北美大韓人留學生總會)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미주 한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최대의 학생단체이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개최될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하기 위해 1919년 1월 1일 오하이오주에서 미주대한인학생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미국 각지에서 한인학생들의 독자활동이 전개되자, 1921년 각 지역 학생회를 통합한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를 결성하였다. 1945년까지 활동하면서 영문·국문잡지를 발간하고, 국내에 의연금을 송금하며, 일제 침략규탄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학생신분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해방 후 근대 국가건설을 위한 인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하와이로 노동 이민하여 임시정부후원회 이사부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국방위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독립운동가.
강영각 (姜泳珏)
일제강점기 때, 하와이로 노동 이민하여 임시정부후원회 이사부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국방위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독립운동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는 미주 한인들에 의해 설립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중국에서 활동 중인 민족혁명당을 후원하고 미주 내 선전 및 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된다는 사실을 접하고 1942년에 결성했다. 결성 초기 회장은 변준호, 총무는 김강 등 대부분 미국 내 진보적인 한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에 대한 자금원조 및 군사 운동을 위한 군사금 모금 활동에 주력했다. 기관지 『독립』을 발행했는데 1955년까지 지속했다. 이 단체는 미주한인사회에 새로운 정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朝鮮民族革命黨 美州總支部)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는 미주 한인들에 의해 설립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중국에서 활동 중인 민족혁명당을 후원하고 미주 내 선전 및 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된다는 사실을 접하고 1942년에 결성했다. 결성 초기 회장은 변준호, 총무는 김강 등 대부분 미국 내 진보적인 한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에 대한 자금원조 및 군사 운동을 위한 군사금 모금 활동에 주력했다. 기관지 『독립』을 발행했는데 1955년까지 지속했다. 이 단체는 미주한인사회에 새로운 정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미주 독립운동단체였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후신.
북미대한인국민회 (北美大韓人國民會)
미주 독립운동단체였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후신.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대한인동지회 총회장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전주의 신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UCLA 등을 다녔다. 1921년에 설립된 이승만의 대한인동지회에 적극 참여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위원으로 맹호군의 재정을 담당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광복 후에도 한인회관의 전신인 한인센터(Korea Community Center)와 무궁화한국학교를 설립하여 한인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송철 (宋喆)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대한인동지회 총회장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전주의 신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UCLA 등을 다녔다. 1921년에 설립된 이승만의 대한인동지회에 적극 참여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위원으로 맹호군의 재정을 담당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광복 후에도 한인회관의 전신인 한인센터(Korea Community Center)와 무궁화한국학교를 설립하여 한인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1942년 8월 29일 국기(태극기)를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청의 깃대에 게양한 행사.
태극기 현기식 (太極旗 懸旗式)
1942년 8월 29일 국기(태극기)를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청의 깃대에 게양한 행사.
독립운동 지원과 난민 구제를 위해서 멕시코와 쿠바 한인이 펼친 모금 운동을 말한다.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 사회는 대한인국민회,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독립성금을 모아 대한인국민회에 보냈다. 광복 이후에도 대한인국민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조국의 난민을 구제하자는 데 뜻을 모아 모금 활동을 계속 펴나갔다. 한인들이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발전을 기원하면서 하나로 단결한 대표적인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범대한인국민회 기부금 운동 (汎大韓人國民會 寄附金 運動)
독립운동 지원과 난민 구제를 위해서 멕시코와 쿠바 한인이 펼친 모금 운동을 말한다.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 사회는 대한인국민회,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독립성금을 모아 대한인국민회에 보냈다. 광복 이후에도 대한인국민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조국의 난민을 구제하자는 데 뜻을 모아 모금 활동을 계속 펴나갔다. 한인들이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발전을 기원하면서 하나로 단결한 대표적인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국방을 후원하기 위해 미주 한인들이 미국방 공채를 발매하고 승전후원금을 모금한 활동.
한미승전후원금 모금활동 (韓美勝戰後援金 募金活動)
미국국방을 후원하기 위해 미주 한인들이 미국방 공채를 발매하고 승전후원금을 모금한 활동.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된 이승만 후원단체.
동지회 북미지방총회 (同志會 北美地方總會)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된 이승만 후원단체.
최봉윤은 일제강점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 평양에서 평양기독학생종교부회총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맥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 미국 이주 후에는 국어 교육에 앞장섰으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최초 한인 교수가 되었다. 1941년부터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관료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남북통일 방략으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제안하였다.
최봉윤 (崔鳳潤)
최봉윤은 일제강점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 평양에서 평양기독학생종교부회총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맥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 미국 이주 후에는 국어 교육에 앞장섰으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최초 한인 교수가 되었다. 1941년부터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관료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남북통일 방략으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제안하였다.
심영신은 일제강점기에 하와이에서 대한인부인회 위원으로서 하와이 한인들에 대한 계몽 활동과 구제 활동을 펼쳤고, 대한부인구제회 부회장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민회측 대표를 지내며 독립운동 단체 통합 활동과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심영신 (沈永信)
심영신은 일제강점기에 하와이에서 대한인부인회 위원으로서 하와이 한인들에 대한 계몽 활동과 구제 활동을 펼쳤고, 대한부인구제회 부회장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민회측 대표를 지내며 독립운동 단체 통합 활동과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