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제헌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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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조선일보 영업국장, 동아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국회의원, 초대 법제사법위원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정치인·독립운동가.
백관수 (白寬洙)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조선일보 영업국장, 동아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국회의원, 초대 법제사법위원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정치인·독립운동가.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 제헌국회 국회법제정 기초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농민운동가.
서정희 (徐廷禧)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 제헌국회 국회법제정 기초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농민운동가.
국회의원, 의원공권제한 국회심사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이종순 (李鍾純)
국회의원, 의원공권제한 국회심사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세화당 제육지식회사 대표 취체역, 국회의원, 국회 산업노동분야 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기업인.
이진수 (李鎭洙)
세화당 제육지식회사 대표 취체역, 국회의원, 국회 산업노동분야 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기업인.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전라남도 일대 민정조사반, 교통체신위원회 등에서 활동한 정치인.
김교중 (金敎中)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전라남도 일대 민정조사반, 교통체신위원회 등에서 활동한 정치인.
미군정청 관재처 감찰관,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김덕열 (金德烈)
미군정청 관재처 감찰관,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일제강점기 때, 한성은행 본정지점 지배인 대리, 동아일보 여수지국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 문화부장,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김문평 (金汶枰)
일제강점기 때, 한성은행 본정지점 지배인 대리, 동아일보 여수지국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 문화부장,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김익노는 국회의원, 국회징계자격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이승만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활동에 일조한 정치인이다. 1905년 경북 칠곡 출생으로 일본 도쿄농업대학에서 수학한 후 경북 달성군청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청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1950년, 1954년, 1958년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54년 9월 이승만의 3선 개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 1958년 4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부정행위로 인해 기소된 후, 이듬해 대법원에서 선거무효 판결을 받았다.
김익노 (金益魯)
김익노는 국회의원, 국회징계자격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이승만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활동에 일조한 정치인이다. 1905년 경북 칠곡 출생으로 일본 도쿄농업대학에서 수학한 후 경북 달성군청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청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1950년, 1954년, 1958년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54년 9월 이승만의 3선 개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 1958년 4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부정행위로 인해 기소된 후, 이듬해 대법원에서 선거무효 판결을 받았다.
김종선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 서울 천도교 홍제소년군 단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운동과 빈민구제활동에 참여한 정치인·기업인이다.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세브란스의약품주식회사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1900년 출생으로,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후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을 역임하며 대자산가이자 전라도 대지주가 되었다.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교육운동과 소년운동을 이끌었으며, 다양한 구제 활동을 벌였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 산업노동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피살되었다.
김종선 (金鍾善)
김종선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 서울 천도교 홍제소년군 단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운동과 빈민구제활동에 참여한 정치인·기업인이다.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세브란스의약품주식회사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1900년 출생으로,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후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을 역임하며 대자산가이자 전라도 대지주가 되었다.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교육운동과 소년운동을 이끌었으며, 다양한 구제 활동을 벌였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 산업노동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피살되었다.
문시환은 일제강점기 국민대표회 개조파 간부, 의열단 군자금 모집요원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897년 부산 출생 독립운동가로 만주와 상해에서 활동하며 의열단에 입단해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1923년 국내에서 활동을 전개하다가 제2차 의열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해방 후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근로자 권익과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1948년 초대 경상남도 도지사로 임명되었으나, 이승만의 사퇴 종용으로 사임했다. 1973년 사망하였으며, 1995년 정부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문시환 (文時煥)
문시환은 일제강점기 국민대표회 개조파 간부, 의열단 군자금 모집요원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897년 부산 출생 독립운동가로 만주와 상해에서 활동하며 의열단에 입단해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1923년 국내에서 활동을 전개하다가 제2차 의열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해방 후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근로자 권익과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1948년 초대 경상남도 도지사로 임명되었으나, 이승만의 사퇴 종용으로 사임했다. 1973년 사망하였으며, 1995년 정부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국제평론사 사장, 제헌국회의원, 대한국민당 전형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박준 (朴峻)
국제평론사 사장, 제헌국회의원, 대한국민당 전형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일제강점기 때 판사 · 변호사로 활동하고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법조인 · 정치인이다. 1882년 2월 14일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1918년 11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판사로 임명되었다. 1921년 10월 북경에서 열린 국제변호사회의에 조선인 변호사 대표로 참석했다. 1932년 9월 ‘대구노동회(勞働會) 사건’으로 노동회 서부 총무로서 검거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1948년 5월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밀양 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박해극 (朴海克)
일제강점기 때 판사 · 변호사로 활동하고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법조인 · 정치인이다. 1882년 2월 14일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1918년 11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판사로 임명되었다. 1921년 10월 북경에서 열린 국제변호사회의에 조선인 변호사 대표로 참석했다. 1932년 9월 ‘대구노동회(勞働會) 사건’으로 노동회 서부 총무로서 검거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1948년 5월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밀양 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배헌은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고국에 입국해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부터 신간회 운동을 전개하고, 1931년 이리야구협회 창립과 함께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대한국민당의 부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배헌 (裵憲)
배헌은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고국에 입국해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부터 신간회 운동을 전개하고, 1931년 이리야구협회 창립과 함께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대한국민당의 부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서우석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은행 촉탁, 해남흥산주식회사 지배인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민주당 고문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89년 전남 광주 출생으로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신간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상민대회 집행위원, 호남은행 촉탁, 해남흥산 지배인 등을 지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 위원, 한국민주당 광주지부 총무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퇴임 후에도 국민장위원회 위원과 민주당 창당 준비위원, 민주당 감찰위원, 민주당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서우석 (徐禹錫)
서우석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은행 촉탁, 해남흥산주식회사 지배인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민주당 고문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89년 전남 광주 출생으로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신간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상민대회 집행위원, 호남은행 촉탁, 해남흥산 지배인 등을 지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 위원, 한국민주당 광주지부 총무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퇴임 후에도 국민장위원회 위원과 민주당 창당 준비위원, 민주당 감찰위원, 민주당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송필만은 일제강점기 때, 이승만 지지 세력 규합을 위해 힘쓰던 정치인이다. 1890년 충북 진천 출생으로 일본 유학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유학을 전후로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도왔다. 해방 후 이승만 비서로 근무하며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 부장,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북 진천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5·16군사정변 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가 1963년 해금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지지 성명 발표에 참여하였으며, 1978년 사망하였다.
송필만 (宋必滿)
송필만은 일제강점기 때, 이승만 지지 세력 규합을 위해 힘쓰던 정치인이다. 1890년 충북 진천 출생으로 일본 유학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유학을 전후로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도왔다. 해방 후 이승만 비서로 근무하며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 부장,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북 진천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5·16군사정변 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가 1963년 해금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지지 성명 발표에 참여하였으며, 1978년 사망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상해군정서 전북군무총장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 정치인이다. 1888년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 마령면 평지리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1921년 조선독립군 청년단 의용군을 조직하다가 검거되어 1년간 복역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남도 진안군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49년 7월 대한노농당 소속으로 대한국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오기열 (吳基烈)
일제강점기 때 상해군정서 전북군무총장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 정치인이다. 1888년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 마령면 평지리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1921년 조선독립군 청년단 의용군을 조직하다가 검거되어 1년간 복역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남도 진안군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49년 7월 대한노농당 소속으로 대한국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대동청년당 묵호읍단부 단장 ·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12년 12월 2일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강릉 갑구 대동청년단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6월 국회 상임위원회 운수체신위원회에 소속되었다. 1955년 자유당 조사부 차장으로 재직했으며, 1956년 9월부터 사단법인 대한군경원호회 전임 부회장을 맡아 1960년 4·19혁명 때까지 재임했다. 1997년 대한민국 헌정회 편집위원회 의장, 대한민국 건국회 상임고문 및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2002년 2월 9일 사망했다.
원장길 (元長吉)
대동청년당 묵호읍단부 단장 ·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12년 12월 2일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강릉 갑구 대동청년단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6월 국회 상임위원회 운수체신위원회에 소속되었다. 1955년 자유당 조사부 차장으로 재직했으며, 1956년 9월부터 사단법인 대한군경원호회 전임 부회장을 맡아 1960년 4·19혁명 때까지 재임했다. 1997년 대한민국 헌정회 편집위원회 의장, 대한민국 건국회 상임고문 및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2002년 2월 9일 사망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에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00년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출생으로, 1923년 4월 도쿄에서 박열(朴烈) 등과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고, 1926년 11월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을 조직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경상북도 선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972년 제헌동지회 회원으로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서 발표에 동참했다. 1983년 7월 5일 사망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육홍균 (陸洪均)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에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00년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출생으로, 1923년 4월 도쿄에서 박열(朴烈) 등과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고, 1926년 11월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을 조직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경상북도 선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972년 제헌동지회 회원으로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서 발표에 동참했다. 1983년 7월 5일 사망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진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하고 청년운동을 벌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이강우 (李康雨)
일제강점기 때, 진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하고 청년운동을 벌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을 역임한 정치인.
이구수 (李龜洙)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을 역임한 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