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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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읍지』는 1899년 평안북도 창성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간행한 읍지이다. 1책의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책 첫머리에 채색 지도 1장을 실었다. 일반적인 읍지 체제를 따라 구성하였는데, 호구와 전답 항목에 1895년의 수치와 증가 추세를 상세하게 기재한 점이 눈에 띈다.
창성읍지 (昌城邑誌)
『창성읍지』는 1899년 평안북도 창성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간행한 읍지이다. 1책의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책 첫머리에 채색 지도 1장을 실었다. 일반적인 읍지 체제를 따라 구성하였는데, 호구와 전답 항목에 1895년의 수치와 증가 추세를 상세하게 기재한 점이 눈에 띈다.
조선 후기에, 고령진첨사, 창성부사, 동래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강응환 (姜膺煥)
조선 후기에, 고령진첨사, 창성부사, 동래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고려 후기에, 판밀직, 평리, 창성군 등을 역임한 문신.
노진 (盧稹)
고려 후기에, 판밀직, 평리, 창성군 등을 역임한 문신.
금입택은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던 귀족들의 대주택이다. 쇠드리댁·금드리댁으로 불리며 금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금입택의 집 이름으로는 재매정택, 지상택 등이 있으며 『삼국유사』에 39채가 기록되어 있다. 금입택은 삼국통일 전쟁의 포상으로 받은 지방의 토지와 관직 독점으로 이룩한 진골귀족들의 재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력을 가진 금입택의 주인은 불교 사원 건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금입택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사치 생활은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국가 권력의 약화를 보여준다.
금입택 (金入宅)
금입택은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던 귀족들의 대주택이다. 쇠드리댁·금드리댁으로 불리며 금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금입택의 집 이름으로는 재매정택, 지상택 등이 있으며 『삼국유사』에 39채가 기록되어 있다. 금입택은 삼국통일 전쟁의 포상으로 받은 지방의 토지와 관직 독점으로 이룩한 진골귀족들의 재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력을 가진 금입택의 주인은 불교 사원 건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금입택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사치 생활은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국가 권력의 약화를 보여준다.
조선후기 문인 차좌일의 시 「계춘소집」·「대설운」·「우음」 등을 수록하여 1914년에 간행한 시집.
사명자시집 (四名子詩集)
조선후기 문인 차좌일의 시 「계춘소집」·「대설운」·「우음」 등을 수록하여 1914년에 간행한 시집.
북한의 평안북도(平安北道) 북동부에 있는 군(郡)이다. 동쪽은 운산군(雲山郡)과 자강도(慈江道)의 우시군(雩時郡) · 송원군(松源郡), 서쪽은 창성군(昌城郡) · 대관군(大館郡), 남쪽은 태천군(泰川郡), 북쪽은 벽동군(碧潼郡)과 접하고 있다. 1952년 평안북도 창성군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군을 신설하였다. 대표적 하천으로는 창성강(昌城江)과 그 지류인 동창강(東創江)이 있다. 농산업과 축산업의 비중이 크다. 동창강가에는 예로부터 ‘청산팔경(靑山八景)’의 하나로 이름이 나 있는 당아산(當峨山)이 있는데 이곳은 동물보호구로 지정되어 있다.
동창군 (東倉郡)
북한의 평안북도(平安北道) 북동부에 있는 군(郡)이다. 동쪽은 운산군(雲山郡)과 자강도(慈江道)의 우시군(雩時郡) · 송원군(松源郡), 서쪽은 창성군(昌城郡) · 대관군(大館郡), 남쪽은 태천군(泰川郡), 북쪽은 벽동군(碧潼郡)과 접하고 있다. 1952년 평안북도 창성군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군을 신설하였다. 대표적 하천으로는 창성강(昌城江)과 그 지류인 동창강(東創江)이 있다. 농산업과 축산업의 비중이 크다. 동창강가에는 예로부터 ‘청산팔경(靑山八景)’의 하나로 이름이 나 있는 당아산(當峨山)이 있는데 이곳은 동물보호구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 부산성(慶州 富山城)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195-2 일대에 있는 포곡식 석축 산성으로 둘레는 약 9㎞이고 남은 성벽의 높이는 2m이다. 신라 진평왕 대에 초축되었다는 설과 문무왕 대에 축성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경주 남산신성(南山新城)의 서창지와 비슷한 규모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신라시대에 초축된 경주 부산성은 왕경의 외곽을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 경주와 영천, 포항 지역을 관할하는 군창의 역할을 담당한 중요한 관방시설이었다.
경주 부산성 (慶州 富山城)
경주 부산성(慶州 富山城)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195-2 일대에 있는 포곡식 석축 산성으로 둘레는 약 9㎞이고 남은 성벽의 높이는 2m이다. 신라 진평왕 대에 초축되었다는 설과 문무왕 대에 축성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경주 남산신성(南山新城)의 서창지와 비슷한 규모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신라시대에 초축된 경주 부산성은 왕경의 외곽을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 경주와 영천, 포항 지역을 관할하는 군창의 역할을 담당한 중요한 관방시설이었다.
경창군은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의 서(庶) 9남이다. 어머니는 홍여겸의 딸인 정빈 남양홍씨이며, 선조의 서 8녀 정정옹주가 친누나이다. 8세에 봉군되었다. 15세에 부사(府使) 증 좌의정 조명욱(曺明勗)의 딸 창녕조씨와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고, 측실에게서 2남 2녀를 두었다. 인조 때에 종부시 도제조와 총친부 유사당상을 지내면서 종친을 관리하였다.
경창군 (慶昌君)
경창군은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의 서(庶) 9남이다. 어머니는 홍여겸의 딸인 정빈 남양홍씨이며, 선조의 서 8녀 정정옹주가 친누나이다. 8세에 봉군되었다. 15세에 부사(府使) 증 좌의정 조명욱(曺明勗)의 딸 창녕조씨와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고, 측실에게서 2남 2녀를 두었다. 인조 때에 종부시 도제조와 총친부 유사당상을 지내면서 종친을 관리하였다.
사천 선진리성은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장 모리 요시나리(毛利吉城)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쌓은 왜성이다. 해안에 위치한 평산성으로 표고 30m인 북쪽 정상부를 석성으로 두른 내성과 내성의 동쪽과 남쪽을 토성으로 두른 외성으로 구분된다. 1597년(선조 30) 10월 하순 왜군의 철수 거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왜장 모리 요시나리 부자(父子)를 비롯한 여러 왜장들이 협력하여 12월 26일 단기간에 준공하였다. 이듬해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수비하면서 수축하였으며, 사천읍성을 지성(支城)으로 두었다.
사천 선진리성 (泗川 船津里城)
사천 선진리성은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장 모리 요시나리(毛利吉城)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쌓은 왜성이다. 해안에 위치한 평산성으로 표고 30m인 북쪽 정상부를 석성으로 두른 내성과 내성의 동쪽과 남쪽을 토성으로 두른 외성으로 구분된다. 1597년(선조 30) 10월 하순 왜군의 철수 거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왜장 모리 요시나리 부자(父子)를 비롯한 여러 왜장들이 협력하여 12월 26일 단기간에 준공하였다. 이듬해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수비하면서 수축하였으며, 사천읍성을 지성(支城)으로 두었다.
대유동광산은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로동자구에 있는 금광이다. 대유동광산은 1901년 프랑스인 살타렐이 특허를 취득하였으며, 고려시대부터 사금 채취로 유명하였다. 1914년 500명의 광부가, 1937년 일본광업에 매각될 당시에는 3,800명의 광부가 3교대로 일하였다. 당시 관리자의 잔인한 대우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담은 협박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행정 주소 변경 전 주소는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이었으며, 북한의 주요 금광 중 하나로 꼽힌다.
대유동광산 (大楡洞鑛山)
대유동광산은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로동자구에 있는 금광이다. 대유동광산은 1901년 프랑스인 살타렐이 특허를 취득하였으며, 고려시대부터 사금 채취로 유명하였다. 1914년 500명의 광부가, 1937년 일본광업에 매각될 당시에는 3,800명의 광부가 3교대로 일하였다. 당시 관리자의 잔인한 대우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담은 협박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행정 주소 변경 전 주소는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이었으며, 북한의 주요 금광 중 하나로 꼽힌다.
성사달은 고려 후기에 교주도병마사,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창성군에 봉해진 문신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공민왕 대 홍건적 제2차 침입 때 왕을 호종한 공로 등으로 거듭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1364년(공민왕 13) 동북면에 침입해 온 여진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성사달 (成士達)
성사달은 고려 후기에 교주도병마사,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창성군에 봉해진 문신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공민왕 대 홍건적 제2차 침입 때 왕을 호종한 공로 등으로 거듭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1364년(공민왕 13) 동북면에 침입해 온 여진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백제의 제31대 의자왕의 아들 또는 동생으로 추측되는 왕족.
선광왕 (善光王)
백제의 제31대 의자왕의 아들 또는 동생으로 추측되는 왕족.
충주 견학리 토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일대에 위치한 평지 토성이다. 가섭산 자락이 동쪽에서 평지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구릉 말단부에 만들어졌고, 동쪽으로 요도천과 평지가 보인다. 충주 견학리 토성과 관련된 문헌 자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1980년의 지표 조사 과정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두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남북 축으로 약 58m, 동서 축으로 49m의 방형임이 밝혀졌으며, 추정 둘레는 약 214m이다. 성벽은 중심 토루와 내외피 토루가 있는 토성임이 확인되었는데, 9세기를 전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충주 견학리 토성 (忠州 見鶴里 土城)
충주 견학리 토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일대에 위치한 평지 토성이다. 가섭산 자락이 동쪽에서 평지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구릉 말단부에 만들어졌고, 동쪽으로 요도천과 평지가 보인다. 충주 견학리 토성과 관련된 문헌 자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1980년의 지표 조사 과정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두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남북 축으로 약 58m, 동서 축으로 49m의 방형임이 밝혀졌으며, 추정 둘레는 약 214m이다. 성벽은 중심 토루와 내외피 토루가 있는 토성임이 확인되었는데, 9세기를 전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라 하대의 지방승관직.
주승정 (州僧正)
신라 하대의 지방승관직.
조민수는 고려 후기에 문하시중, 좌군도통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공민왕 대 중반부터 무장으로서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데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우왕 대에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좌군도통사로서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함께 전군을 이끌었고, 위화도회군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전제 개혁에 반대하며 이성계 일파와 대립하다가 유배되었다.
조민수 (曺敏修)
조민수는 고려 후기에 문하시중, 좌군도통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공민왕 대 중반부터 무장으로서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데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우왕 대에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좌군도통사로서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함께 전군을 이끌었고, 위화도회군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전제 개혁에 반대하며 이성계 일파와 대립하다가 유배되었다.
김홍빈은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인 평안북도 창성군 읍내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에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의 평안북도 창성군 장서(掌書)에 임명되었다. 1921년 7월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고취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중국 둥베이 지방(만주)을 거쳐 상하이로 귀환하던 도중 압록강 변에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이때 동지 두 명과 함께 강을 건너다가 익사, 순국하고 말았다.
김홍빈 (金洪斌)
김홍빈은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인 평안북도 창성군 읍내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에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의 평안북도 창성군 장서(掌書)에 임명되었다. 1921년 7월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고취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중국 둥베이 지방(만주)을 거쳐 상하이로 귀환하던 도중 압록강 변에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이때 동지 두 명과 함께 강을 건너다가 익사, 순국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