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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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열 투쟁을 벌이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과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김창숙이 제공한 자금을 기반으로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 들어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나석주 (羅錫疇)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열 투쟁을 벌이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과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김창숙이 제공한 자금을 기반으로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 들어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국책회사이다. 농업 경영과 이민 사업 등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7년 「동양척식주식회사법」 개정 이후 사업 범위를 만주 및 해외로 확장하였고,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개발 금융기관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1930년대 이후부터 식민지 군수 공업화에 편승하여 대출 업무 이외에 관계 회사 설립 및 출자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지주회사(持株會社)의 성격을 강화해 나갔다.
동양척식주식회사 (東洋拓殖株式會社)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국책회사이다. 농업 경영과 이민 사업 등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7년 「동양척식주식회사법」 개정 이후 사업 범위를 만주 및 해외로 확장하였고,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개발 금융기관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1930년대 이후부터 식민지 군수 공업화에 편승하여 대출 업무 이외에 관계 회사 설립 및 출자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지주회사(持株會社)의 성격을 강화해 나갔다.
1905년 한성(지금의 서울)에 설립되었던 고등교육기관.
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
1905년 한성(지금의 서울)에 설립되었던 고등교육기관.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등을 역임한 정치인. 경제인, 친일반민족행위자.
한상룡 (韓相龍)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등을 역임한 정치인. 경제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고려대학교 (高麗大學校)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2가에 있는 부산 근현대사 중심의 역사 박물관.
부산근대역사관 (釜山近代歷史館)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2가에 있는 부산 근현대사 중심의 역사 박물관.
조선흥업주식회사는 1904년 한국에서 소작제 대농장 경영을 목적으로 설립된 일본인 지주회사이다. 1904년 9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의 주도로 설립되었으며, 전국에 6개의 농장 관리소를 두었는데, 경지 면적은 1만 7300여 정보, 소작인은 1만 6500여 명에 달하였다. 조선흥업주식회사는 일본인 지주 자본 중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제외하면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 규모의 토지를 보유한 회사였다.
조선흥업주식회사 (朝鮮興業株式會社)
조선흥업주식회사는 1904년 한국에서 소작제 대농장 경영을 목적으로 설립된 일본인 지주회사이다. 1904년 9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의 주도로 설립되었으며, 전국에 6개의 농장 관리소를 두었는데, 경지 면적은 1만 7300여 정보, 소작인은 1만 6500여 명에 달하였다. 조선흥업주식회사는 일본인 지주 자본 중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제외하면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 규모의 토지를 보유한 회사였다.
1936년 8월 조선에 설립된 선만척식주식회사(鮮滿拓植株式會社)가 만주국 지점으로 신경(新京)에 설립한 조선인 이민사업을 전담한 만주국의 국책회사.
만선척식주식회사 (滿鮮拓殖株式會社)
1936년 8월 조선에 설립된 선만척식주식회사(鮮滿拓植株式會社)가 만주국 지점으로 신경(新京)에 설립한 조선인 이민사업을 전담한 만주국의 국책회사.
부령수력발전소는 함경북도 부령군에 있는 소규모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이다. 두만강 수계에 최초로 건설된 수력발전소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자금을 투자하여 건설하였다. 1936년 7월 건설 허가를 획득하고 공사를 시작해 1940년 1만 3400㎾급 제1발전소를 필두로 9,400㎾급 제2발전소와 5,200㎾급 제3발전소를 준공하였다. 생산된 전력은 모두 공공용 전원으로 전력 체계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일부 시설이 파괴되었지만, 자력으로 복구공사를 하여 1956년 제1발전소와 제2발전소를 재가동하였고, 1960년 제4발전소를 건설하였다.
부령수력발전소 (富寧水力發電所)
부령수력발전소는 함경북도 부령군에 있는 소규모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이다. 두만강 수계에 최초로 건설된 수력발전소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자금을 투자하여 건설하였다. 1936년 7월 건설 허가를 획득하고 공사를 시작해 1940년 1만 3400㎾급 제1발전소를 필두로 9,400㎾급 제2발전소와 5,200㎾급 제3발전소를 준공하였다. 생산된 전력은 모두 공공용 전원으로 전력 체계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일부 시설이 파괴되었지만, 자력으로 복구공사를 하여 1956년 제1발전소와 제2발전소를 재가동하였고, 1960년 제4발전소를 건설하였다.
신태화는 금은 세공 전문 수공업자 출신으로 신행상회(信行商會)를 남대문통에 설립하고, 이후 백화점의 대명사로 불린 화신상회(和信商會)를 창립하여 경영한 기업가이다. 1908년 김연학과 동업으로 신행상회를 설립하여 이후 금은 세공 업계를 제패했다. 1918년 3월경 동업을 해제했으며, 화신상회로 상호명을 고치고 서양식 2층 건물을 신축했다. 화신상회는 포목부를 두고 잡화도 취급하여 백화점으로 운영되었다. 1930년경 대공황으로 인한 경기 침체에 유동성 위기를 맞아 박흥식의 자금을 썼다가 결국 이를 갚지 못해 화신상회를 넘기게 되었다.
신태화 (申泰和)
신태화는 금은 세공 전문 수공업자 출신으로 신행상회(信行商會)를 남대문통에 설립하고, 이후 백화점의 대명사로 불린 화신상회(和信商會)를 창립하여 경영한 기업가이다. 1908년 김연학과 동업으로 신행상회를 설립하여 이후 금은 세공 업계를 제패했다. 1918년 3월경 동업을 해제했으며, 화신상회로 상호명을 고치고 서양식 2층 건물을 신축했다. 화신상회는 포목부를 두고 잡화도 취급하여 백화점으로 운영되었다. 1930년경 대공황으로 인한 경기 침체에 유동성 위기를 맞아 박흥식의 자금을 썼다가 결국 이를 갚지 못해 화신상회를 넘기게 되었다.
백인기는 일제강점기 한성농공은행 이사, 한일은행 전무,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한 기업가. 농업회사 합명회사 화성사를 설립, 경영한 대지주이다. 소유 재산의 대부분은 전주 아전 출신인 부친 백남신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한성공동창고회사와 한성농공은행 이사, 한일은행 전무,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했으며, 농업회사 합명회사화성사(華星社)를 설립한 지주였다. 경기도 도회 의원,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백인기 (白寅基)
백인기는 일제강점기 한성농공은행 이사, 한일은행 전무,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한 기업가. 농업회사 합명회사 화성사를 설립, 경영한 대지주이다. 소유 재산의 대부분은 전주 아전 출신인 부친 백남신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한성공동창고회사와 한성농공은행 이사, 한일은행 전무,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했으며, 농업회사 합명회사화성사(華星社)를 설립한 지주였다. 경기도 도회 의원,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대륙신부는 일제강점기 이식민 정책에 따라 만주에 이주한 청년 남성의 결혼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결혼 알선 정책에 동원된 여성이다. 일본인 대륙신부 알선 정책은 일본인 남성의 정착을 촉진하고 일본인의 순혈을 보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조선인의 순혈 보호는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인 대륙신부 알선 정책은 비체계적이고 임시방편적이었으며, 노동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일제의 대륙신부 양성 정책은 국가적 목적을 위해 여성과 가정을 동원하는 정책이자 일본인과 조선인 인구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을 반영한 정책이었다.
대륙신부 (大陸新婦|大陸の花嫁)
대륙신부는 일제강점기 이식민 정책에 따라 만주에 이주한 청년 남성의 결혼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결혼 알선 정책에 동원된 여성이다. 일본인 대륙신부 알선 정책은 일본인 남성의 정착을 촉진하고 일본인의 순혈을 보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조선인의 순혈 보호는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인 대륙신부 알선 정책은 비체계적이고 임시방편적이었으며, 노동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일제의 대륙신부 양성 정책은 국가적 목적을 위해 여성과 가정을 동원하는 정책이자 일본인과 조선인 인구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을 반영한 정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