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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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조건 정착을 위하여 강조한 통일정책 선언.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 (平和統一 三大 其本原則)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조건 정착을 위하여 강조한 통일정책 선언.
평화유지군은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유엔의 군사활동이다.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이 승리한 후 유엔은 국제적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항구적 평화체제 정착을 목표로 평화유지활동을 전개했다. 한국은 1991년 유엔 가입 이후, 1993년 평화유지활동을 위해 상록수 부대를 소말리아에 파견했다. 이후 1994년 서부사하라, 1999년 동티모르, 2002년 로스팔로스 등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파병활동은 세계민주주의를 위한 국제사회 노력에 동참한다는 명분 축적과 분쟁 종료 지역의 재건과 복구 참여한다는 국익 구현이 가능하다.
평화유지군 (平和維持軍)
평화유지군은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유엔의 군사활동이다.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이 승리한 후 유엔은 국제적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항구적 평화체제 정착을 목표로 평화유지활동을 전개했다. 한국은 1991년 유엔 가입 이후, 1993년 평화유지활동을 위해 상록수 부대를 소말리아에 파견했다. 이후 1994년 서부사하라, 1999년 동티모르, 2002년 로스팔로스 등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파병활동은 세계민주주의를 위한 국제사회 노력에 동참한다는 명분 축적과 분쟁 종료 지역의 재건과 복구 참여한다는 국익 구현이 가능하다.
서울 동대문(흥인지문)과 동대문역사문화박물관(구 서울운동장) 사이 청계천 변 가까이에 형성된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전문 도매상가.
평화시장 (平和市場)
서울 동대문(흥인지문)과 동대문역사문화박물관(구 서울운동장) 사이 청계천 변 가까이에 형성된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전문 도매상가.
평화통일정책 수립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해 1981년 5월 설치된 기관.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평화통일정책 수립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해 1981년 5월 설치된 기관.
6·23평화통일 외교정책선언은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을 위해 한국정부가 1973년 6월 23일에 발효한 정책선언이다. 1960년대 이후 국제간 긴장 완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중국이 유엔에 등장하고, 북한의 유엔 외교가 강화되면서 한국도 외교정책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간 상호 불가침,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 간 상호 내정불간섭과 상호 불가침,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 불반대, 공산권 국가에 대한 문호 개방,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등을 포함한 7개 항의 「6·23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2개 조선’ 조작 책동”이라고 비난했다.
6·23평화통일 외교정책선언 (六二三平和統一 外交政策宣言)
6·23평화통일 외교정책선언은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을 위해 한국정부가 1973년 6월 23일에 발효한 정책선언이다. 1960년대 이후 국제간 긴장 완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중국이 유엔에 등장하고, 북한의 유엔 외교가 강화되면서 한국도 외교정책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간 상호 불가침,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 간 상호 내정불간섭과 상호 불가침,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 불반대, 공산권 국가에 대한 문호 개방,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등을 포함한 7개 항의 「6·23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2개 조선’ 조작 책동”이라고 비난했다.
1990년 천주교 선교를 위해 개국된 특수방송.
가톨릭평화방송 (Catholic平和放送)
1990년 천주교 선교를 위해 개국된 특수방송.
8·15평화통일구상선언은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천명한 통일정책선언이다. 이 선언은 1969년 닉슨독트린 이후 미국의 아시아 개입전략 후퇴로 인해 국가안보에 대한 우려가 증대된 상황에서 발표되었다. 이 선언의 핵심은 평화통일 기반조성을 위해 북한이 적화통일 및 대한민국 전복 포기를 선언하고 실증하라는 데 있다. 이 선언은 남북한이 분단 현실을 인정하고 남북 간의 문제를 민족 내부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주적 노력을 경주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평화공존을 전제로 제한적 경쟁을 통해 체제 선택을 민족 구성원 전체의 의사에 맡기자는 민주의 원칙을 담고 있다.
8·15평화통일구상선언 (八一五平和統統一構想宣言)
8·15평화통일구상선언은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천명한 통일정책선언이다. 이 선언은 1969년 닉슨독트린 이후 미국의 아시아 개입전략 후퇴로 인해 국가안보에 대한 우려가 증대된 상황에서 발표되었다. 이 선언의 핵심은 평화통일 기반조성을 위해 북한이 적화통일 및 대한민국 전복 포기를 선언하고 실증하라는 데 있다. 이 선언은 남북한이 분단 현실을 인정하고 남북 간의 문제를 민족 내부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주적 노력을 경주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평화공존을 전제로 제한적 경쟁을 통해 체제 선택을 민족 구성원 전체의 의사에 맡기자는 민주의 원칙을 담고 있다.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선언은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제37차 총회에서 통일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의견을 우리 민족과 온 세계에 발표한 선언이다. 1981년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에서 분단된 국가의 통일이 곧 교회의 과제임이 언급되었다. 1982년 한독교회협의회의 권고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통일문제연구원을 조직하였다. 이후 선언의 초안 작성, 수정안 작성, 공청회 등을 거쳐 1988년에 선언이 채택되었다. 선언의 주 내용은 통일 운동을 ‘민중 주체, 평화의 통일’로 규정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해 평화 교류를 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선언 (民族의 統一과 平和에 關한 韓國基督敎會宣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선언은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제37차 총회에서 통일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의견을 우리 민족과 온 세계에 발표한 선언이다. 1981년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에서 분단된 국가의 통일이 곧 교회의 과제임이 언급되었다. 1982년 한독교회협의회의 권고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통일문제연구원을 조직하였다. 이후 선언의 초안 작성, 수정안 작성, 공청회 등을 거쳐 1988년에 선언이 채택되었다. 선언의 주 내용은 통일 운동을 ‘민중 주체, 평화의 통일’로 규정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해 평화 교류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외곽단체로 대남 당국 및 민간 협상 단체.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朝鮮Asia太平洋平和委員會)
북한의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외곽단체로 대남 당국 및 민간 협상 단체.
국제평화지원단은 2010년 7월 1일에 대한민국의 국제평화유지활동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특수전사령부 예하로 창설된 부대이다. 줄여서 ‘국평단’이라고도 한다. 부대는 필요시 해외로 파병되어 유엔 평화유지활동 또는 다국적군 평화활동 임무를 수행하며, 해외파견 될 장병들에게 테러, 기습공격 등 각종 위험 상황에 대비한 대처 훈련과 경호 훈련뿐 아니라 현지 언어와 문화, 관습, 외국 현지인에 대한 대민 민사심리작전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기관 역할을 맡고 있다.
국제평화지원단 (國際平和支援團)
국제평화지원단은 2010년 7월 1일에 대한민국의 국제평화유지활동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특수전사령부 예하로 창설된 부대이다. 줄여서 ‘국평단’이라고도 한다. 부대는 필요시 해외로 파병되어 유엔 평화유지활동 또는 다국적군 평화활동 임무를 수행하며, 해외파견 될 장병들에게 테러, 기습공격 등 각종 위험 상황에 대비한 대처 훈련과 경호 훈련뿐 아니라 현지 언어와 문화, 관습, 외국 현지인에 대한 대민 민사심리작전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기관 역할을 맡고 있다.
김석형은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15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북한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며 북한 역사학 정립에 기여했다. 특히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김석형 (金錫亨)
김석형은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15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북한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며 북한 역사학 정립에 기여했다. 특히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중동지역의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있는 공화국.
레바논 (Lebanon)
중동지역의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있는 공화국.
리틀엔젤스예술단은 1962년 5월 5월 어린이날을 기해 한국문화재단이 창단한 어린이 예술단이다. ‘춤추고 노래하는 작은 천사들’, ‘평화의 천사’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창단 당시에는 전쟁과 빈곤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한국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깨끗이 씻어내는 민간 외교 사절의 역할을 했고, 현재는 한국의 우수한 전통 문화 예술을 세계에 소개하는 어린이 민간 외교 사절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리틀엔젤스예술단 (LittleAngels藝術團)
리틀엔젤스예술단은 1962년 5월 5월 어린이날을 기해 한국문화재단이 창단한 어린이 예술단이다. ‘춤추고 노래하는 작은 천사들’, ‘평화의 천사’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창단 당시에는 전쟁과 빈곤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한국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깨끗이 씻어내는 민간 외교 사절의 역할을 했고, 현재는 한국의 우수한 전통 문화 예술을 세계에 소개하는 어린이 민간 외교 사절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오하영 (吳夏英)
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기하는 해방 이후 12·13·14·15대 국회의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법조인이다. 1941년 전남 함평 출생으로 1969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1980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민주화 관계 인사 600여 명에 대한 무료변론을 맡아 인권변호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광주 동구 지역구 의원으로 12·13·14·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85년 5월 개원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폭로하였으며, 1995년 12월 ‘5·18특별법’이 여야합의로 통과되는 데 기여하였다.
신기하 (辛基夏)
신기하는 해방 이후 12·13·14·15대 국회의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법조인이다. 1941년 전남 함평 출생으로 1969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1980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민주화 관계 인사 600여 명에 대한 무료변론을 맡아 인권변호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광주 동구 지역구 의원으로 12·13·14·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85년 5월 개원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폭로하였으며, 1995년 12월 ‘5·18특별법’이 여야합의로 통과되는 데 기여하였다.
대한제국기 때,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며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학자·독립운동가.
이승희 (李承熙)
대한제국기 때,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며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학자·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신흥무관학교 교장, 임시정부 군무차장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정치인·독립운동가.
윤기섭 (尹琦燮)
일제강점기 때, 신흥무관학교 교장, 임시정부 군무차장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정치인·독립운동가.
엄항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경기 여주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 시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전까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위원, 한국독립당 조직책,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8년 4월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1950년 납북되었으며, 1958년 반당·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후 4년 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엄항섭 (嚴恒燮)
엄항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경기 여주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 시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전까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위원, 한국독립당 조직책,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8년 4월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1950년 납북되었으며, 1958년 반당·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후 4년 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해방 이후 「다정불심」, 「사」, 「심」 등을 그린 판화가. 서양화가.
이항성 (李恒星)
해방 이후 「다정불심」, 「사」, 「심」 등을 그린 판화가. 서양화가.
1955년 5월 25일에 결성된 친북성향의 재일동포 단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
1955년 5월 25일에 결성된 친북성향의 재일동포 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