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평화"
검색결과 총 68건
일몰 후 주로 옥외에서 촛불을 들고 진행하는 집회.
촛불집회 (촛불集會)
일몰 후 주로 옥외에서 촛불을 들고 진행하는 집회.
일제강점기 때, 헤이그특사로 파견되었고,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글과 선언문을 발표하며 외교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위종 (李瑋鍾)
일제강점기 때, 헤이그특사로 파견되었고,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글과 선언문을 발표하며 외교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중동지역의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있는 공화국.
레바논 (Lebanon)
중동지역의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있는 공화국.
대한제국기 때,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며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학자·독립운동가.
이승희 (李承熙)
대한제국기 때,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며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학자·독립운동가.
1955년 5월 25일에 결성된 친북성향의 재일동포 단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
1955년 5월 25일에 결성된 친북성향의 재일동포 단체.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원세훈 (元世勳)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9년 3월 25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문익환 목사 일행이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한 사건.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 (文益煥 牧師 訪北事件)
1989년 3월 25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문익환 목사 일행이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한 사건.
신기하는 해방 이후 12·13·14·15대 국회의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법조인이다. 1941년 전남 함평 출생으로 1969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1980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민주화 관계 인사 600여 명에 대한 무료변론을 맡아 인권변호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광주 동구 지역구 의원으로 12·13·14·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85년 5월 개원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폭로하였으며, 1995년 12월 ‘5·18특별법’이 여야합의로 통과되는 데 기여하였다.
신기하 (辛基夏)
신기하는 해방 이후 12·13·14·15대 국회의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법조인이다. 1941년 전남 함평 출생으로 1969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1980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민주화 관계 인사 600여 명에 대한 무료변론을 맡아 인권변호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광주 동구 지역구 의원으로 12·13·14·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85년 5월 개원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폭로하였으며, 1995년 12월 ‘5·18특별법’이 여야합의로 통과되는 데 기여하였다.
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오하영 (吳夏英)
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신흥무관학교 교장, 임시정부 군무차장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정치인·독립운동가.
윤기섭 (尹琦燮)
일제강점기 때, 신흥무관학교 교장, 임시정부 군무차장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정치인·독립운동가.
서울 동대문(흥인지문)과 동대문역사문화박물관(구 서울운동장) 사이 청계천 변 가까이에 형성된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전문 도매상가.
평화시장 (平和市場)
서울 동대문(흥인지문)과 동대문역사문화박물관(구 서울운동장) 사이 청계천 변 가까이에 형성된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전문 도매상가.
남북상호불가침협정은 1974년 1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북한 측에 제의한 협정이다. 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력침범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 상호 내정간섭을 하지 말 것, 정전협정의 효력 존속이다. 남한은 북한에 촉구해 오던 무력도발 포기를 남북 간 협정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정전협정의 존속을 전제로 남북 간 협정을 제안했다. 이 협정은 같은 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를 통해 발표된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으로 구체화되었다. 남북상호불가침협정은 1991년 12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체결로 현실화되었다.
남북상호불가침협정 (南北相互不可侵協定)
남북상호불가침협정은 1974년 1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북한 측에 제의한 협정이다. 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력침범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 상호 내정간섭을 하지 말 것, 정전협정의 효력 존속이다. 남한은 북한에 촉구해 오던 무력도발 포기를 남북 간 협정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정전협정의 존속을 전제로 남북 간 협정을 제안했다. 이 협정은 같은 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를 통해 발표된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으로 구체화되었다. 남북상호불가침협정은 1991년 12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체결로 현실화되었다.
김석형은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15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북한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며 북한 역사학 정립에 기여했다. 특히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김석형 (金錫亨)
김석형은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15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북한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며 북한 역사학 정립에 기여했다. 특히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동티모르에 파견된 한국의 평화유지활동 부대.
상록수부대 (常綠樹部隊)
동티모르에 파견된 한국의 평화유지활동 부대.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에 있는 공화국.
크로아티아 (Croatia)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에 있는 공화국.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선언은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제37차 총회에서 통일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의견을 우리 민족과 온 세계에 발표한 선언이다. 1981년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에서 분단된 국가의 통일이 곧 교회의 과제임이 언급되었다. 1982년 한독교회협의회의 권고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통일문제연구원을 조직하였다. 이후 선언의 초안 작성, 수정안 작성, 공청회 등을 거쳐 1988년에 선언이 채택되었다. 선언의 주 내용은 통일 운동을 ‘민중 주체, 평화의 통일’로 규정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해 평화 교류를 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선언 (民族의 統一과 平和에 關한 韓國基督敎會宣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선언은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제37차 총회에서 통일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의견을 우리 민족과 온 세계에 발표한 선언이다. 1981년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에서 분단된 국가의 통일이 곧 교회의 과제임이 언급되었다. 1982년 한독교회협의회의 권고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통일문제연구원을 조직하였다. 이후 선언의 초안 작성, 수정안 작성, 공청회 등을 거쳐 1988년에 선언이 채택되었다. 선언의 주 내용은 통일 운동을 ‘민중 주체, 평화의 통일’로 규정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해 평화 교류를 한다는 것이다.
엄항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경기 여주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 시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전까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위원, 한국독립당 조직책,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8년 4월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1950년 납북되었으며, 1958년 반당·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후 4년 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엄항섭 (嚴恒燮)
엄항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경기 여주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 시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전까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위원, 한국독립당 조직책,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8년 4월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1950년 납북되었으며, 1958년 반당·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후 4년 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북한의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외곽단체로 대남 당국 및 민간 협상 단체.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朝鮮Asia太平洋平和委員會)
북한의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외곽단체로 대남 당국 및 민간 협상 단체.
아프리카 서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공화국.
코트디부아르 (Cote D’Ivoire)
아프리카 서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공화국.
해방 이후 「다정불심」, 「사」, 「심」 등을 그린 판화가. 서양화가.
이항성 (李恒星)
해방 이후 「다정불심」, 「사」, 「심」 등을 그린 판화가.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