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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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년(고종 6) 10월, 의주(義州) 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저항. 의주적의 난은 1219년(고종 6) 10월 의주(義州) 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저항이다. 이 저항은 일차적으로 지방관들의 가혹한 수탈에서 기인하였다. 또한 의주 지역은 1216년(고종 3)부터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에 따른 전쟁터였고, 이로 인한 극심한 역(役)의 착취가 이루어졌으며, 주민들이 계속해서 전투에 동원됨으로써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에 집권자 최우(崔瑀)는 지방관들을 귀양 보냄으로써 저항 세력을 무마하려 하였지만, 의주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다.# 발단 1219년(고종 6) 10월 의주(義州)의 저항은 지방관들의 가혹한 수탈이 그 원인이었다. 또한 의주는 북방 민족과 교역의 중심지였는데...
의주적의 난 (義州賊의 亂)
1219년(고종 6) 10월, 의주(義州) 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저항. 의주적의 난은 1219년(고종 6) 10월 의주(義州) 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저항이다. 이 저항은 일차적으로 지방관들의 가혹한 수탈에서 기인하였다. 또한 의주 지역은 1216년(고종 3)부터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에 따른 전쟁터였고, 이로 인한 극심한 역(役)의 착취가 이루어졌으며, 주민들이 계속해서 전투에 동원됨으로써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에 집권자 최우(崔瑀)는 지방관들을 귀양 보냄으로써 저항 세력을 무마하려 하였지만, 의주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다.# 발단 1219년(고종 6) 10월 의주(義州)의 저항은 지방관들의 가혹한 수탈이 그 원인이었다. 또한 의주는 북방 민족과 교역의 중심지였는데...
1173년(명종 3), 8월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있던 김보당 등 문신 계열이 동계(東界)에서 일으킨 반란. 김보당의 난은 1173년(명종 3) 8월에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김보당 등 문신 계열이 동계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김보당은 무신 정변 이후, 공부시랑과 간의대부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그의 반란은 무신 정변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문신 계열이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이의방 등의 일방적인 정국 주도에 반발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반란을 통해 거제에 부처 되었던 전 왕인 의종을 경주로 피신시켜 구지배 체제로의 복구를 시도했지만, 문신의 대대적인 살육과 의종 시해로 끝을 맺었다.# 발단 1173년(명종 3) 계사년(癸巳年)에 일어났으므로 ‘계사(癸巳)의 난’이라고도 한다. 김보당(金甫當)은 무신정변(武臣政變) 이후...
김보당의 난 (金甫當의 亂)
1173년(명종 3), 8월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있던 김보당 등 문신 계열이 동계(東界)에서 일으킨 반란. 김보당의 난은 1173년(명종 3) 8월에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김보당 등 문신 계열이 동계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김보당은 무신 정변 이후, 공부시랑과 간의대부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그의 반란은 무신 정변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문신 계열이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이의방 등의 일방적인 정국 주도에 반발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반란을 통해 거제에 부처 되었던 전 왕인 의종을 경주로 피신시켜 구지배 체제로의 복구를 시도했지만, 문신의 대대적인 살육과 의종 시해로 끝을 맺었다.# 발단 1173년(명종 3) 계사년(癸巳年)에 일어났으므로 ‘계사(癸巳)의 난’이라고도 한다. 김보당(金甫當)은 무신정변(武臣政變) 이후...
1170년(의종 24) 정중부 등이 문신귀족정치에 반발해 일으킨 난. # 역사적 배경 예종 때 여진의 정벌,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 등으로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하였다. 그러나 문존무비(文尊武卑)의 풍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은 고사하고라도 군사행동에서 문신이 지휘관이 되고 무신은 아래에서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군인들이 적과 싸워 공을 세워도 불력(佛力)에 의한 것이라 하여 그 공을 부처에 돌리는 수가 많았다. 특히, 난이 일어날 무렵 문신귀족의 횡포와 수탈은 농촌경제를 크게 압박해 유민(流民)이 속출되고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가 동요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예종 때부터 나타나 의종 때는 자못...
정중부의 난 (鄭仲夫의 亂)
1170년(의종 24) 정중부 등이 문신귀족정치에 반발해 일으킨 난. # 역사적 배경 예종 때 여진의 정벌,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 등으로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하였다. 그러나 문존무비(文尊武卑)의 풍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은 고사하고라도 군사행동에서 문신이 지휘관이 되고 무신은 아래에서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군인들이 적과 싸워 공을 세워도 불력(佛力)에 의한 것이라 하여 그 공을 부처에 돌리는 수가 많았다. 특히, 난이 일어날 무렵 문신귀족의 횡포와 수탈은 농촌경제를 크게 압박해 유민(流民)이 속출되고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가 동요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예종 때부터 나타나 의종 때는 자못...
1400년(정종 2)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 내용 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朴包)의 난이라고도 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 사병을 거느린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이 여럿 있고, 그들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이방원으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항상 그들을 견제하였다.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功勳)·위세가 이방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마침 지중추부사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제2차 왕자의 난 (第二次 王子의 亂)
1400년(정종 2)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 내용 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朴包)의 난이라고도 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 사병을 거느린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이 여럿 있고, 그들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이방원으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항상 그들을 견제하였다.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功勳)·위세가 이방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마침 지중추부사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 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승려 묘청을 비롯하여 문신 정지상(鄭知常), 일자(日者)인 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군의 세력이 당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설을 근거로 삼아 개경에서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金國征伐)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자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등의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사상을 근거로 삼아 개경으로부터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였으나, 반대에 부딪치자...
묘청의 난 (妙淸의 亂)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 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승려 묘청을 비롯하여 문신 정지상(鄭知常), 일자(日者)인 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군의 세력이 당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설을 근거로 삼아 개경에서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金國征伐)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자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등의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사상을 근거로 삼아 개경으로부터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였으나, 반대에 부딪치자...
1193년(명종 23),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사(雲門寺)를 중심으로 김사미가 일으킨 저항. 김사미의 난은 1193년(명종 23)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사(雲門寺)를 중심으로 김사미가 일으킨 저항이다. 김사미는 ‘사미(沙彌)’라는 이름에서 운문사와 관계된 ‘수원승도(隨院僧徒)’일 가능성도 있다. 이 저항이 초전(草田)의 효심(孝心), 밀성(密城)의 저전촌(楮田村) 등의 저항과 같이 벌어졌던 점에서 경상도 전역에서 저항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최고 집정자 이의민의 지역적 기반이 경주(慶州)였고, 이를 중심으로 한 이의민의 재지 기반 확대가 경상도 일대의 재지 세력과 일반 민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음을 보여 준다.# 발단 1183년(명종 13) 7월 경대승(慶大升)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여 파행적인 정치 운영을...
김사미의 난 (金沙彌의 亂)
1193년(명종 23),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사(雲門寺)를 중심으로 김사미가 일으킨 저항. 김사미의 난은 1193년(명종 23)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사(雲門寺)를 중심으로 김사미가 일으킨 저항이다. 김사미는 ‘사미(沙彌)’라는 이름에서 운문사와 관계된 ‘수원승도(隨院僧徒)’일 가능성도 있다. 이 저항이 초전(草田)의 효심(孝心), 밀성(密城)의 저전촌(楮田村) 등의 저항과 같이 벌어졌던 점에서 경상도 전역에서 저항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최고 집정자 이의민의 지역적 기반이 경주(慶州)였고, 이를 중심으로 한 이의민의 재지 기반 확대가 경상도 일대의 재지 세력과 일반 민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음을 보여 준다.# 발단 1183년(명종 13) 7월 경대승(慶大升)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여 파행적인 정치 운영을...
1182년(명종 12), 전라도 전주에서 죽동과 관노들이 일으킨 반란. 죽동의 난은 1182년(명종 12) 전라도 전주에서 죽동과 관노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무신정권 수립 후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는데, 전주에서는 주현군의 기두 죽동이 관노들과 함께 난을 일으키고 전주성을 장악하여 40여 일간 저항하였다.# 경과 및 결과 그러자 1182년(명종 12) 3월 주현군(州縣軍)의 기두(旗頭) 죽동(竹同) 등 6명이 관노(官奴)와 불만의 무리를 모아, 진대유를 산사(山寺)로 내쫓고 이택민 등 10여 인의 집을 불태웠으며 판관(判官) 고효승(高孝升)을 협박하여 주리(州吏)를 바꾸었다. 안찰사(按察使) 박유보(朴惟甫)가 전주에 들어가자 죽동 등은 군세를 가다듬고 한편으로는 진대유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였다. 이에 안찰사는 진대유를...
죽동의 난 (竹同의 亂)
1182년(명종 12), 전라도 전주에서 죽동과 관노들이 일으킨 반란. 죽동의 난은 1182년(명종 12) 전라도 전주에서 죽동과 관노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무신정권 수립 후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는데, 전주에서는 주현군의 기두 죽동이 관노들과 함께 난을 일으키고 전주성을 장악하여 40여 일간 저항하였다.# 경과 및 결과 그러자 1182년(명종 12) 3월 주현군(州縣軍)의 기두(旗頭) 죽동(竹同) 등 6명이 관노(官奴)와 불만의 무리를 모아, 진대유를 산사(山寺)로 내쫓고 이택민 등 10여 인의 집을 불태웠으며 판관(判官) 고효승(高孝升)을 협박하여 주리(州吏)를 바꾸었다. 안찰사(按察使) 박유보(朴惟甫)가 전주에 들어가자 죽동 등은 군세를 가다듬고 한편으로는 진대유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였다. 이에 안찰사는 진대유를...
1202년(신종 5) 경주에서 이비(利備)·패좌(孛佐)가 주동이 되어 일어난 반란. 이비·패좌의 난은 1202년(신종 5) 경주에서 이비·패좌가 주동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다. 이 난은 경주 관내 농민이 신라부흥 운동을 표방하며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충헌의 강력한 진압책에 대항하고자 일어났다. 이비(利備)는 경주토호로 신라부흥의지가 있었던 사람이고, 패좌(?佐)는 최충헌정권의 수탈체제에 저항한 농민군 지도자였다. 이들은 3군을 편성해 스스로 나라를 바로잡는 군대인 정국병마(正國兵馬)라 칭하면서 관군에 대항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난은 일관된 계획하에 조직적으로 편성되어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정치적 반란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역사적 배경 『동국이상국집』에 따르면 의비(義庇)와 발좌(勃左)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비·패좌의 난 (利備·孛佐의 亂)
1202년(신종 5) 경주에서 이비(利備)·패좌(孛佐)가 주동이 되어 일어난 반란. 이비·패좌의 난은 1202년(신종 5) 경주에서 이비·패좌가 주동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다. 이 난은 경주 관내 농민이 신라부흥 운동을 표방하며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충헌의 강력한 진압책에 대항하고자 일어났다. 이비(利備)는 경주토호로 신라부흥의지가 있었던 사람이고, 패좌(?佐)는 최충헌정권의 수탈체제에 저항한 농민군 지도자였다. 이들은 3군을 편성해 스스로 나라를 바로잡는 군대인 정국병마(正國兵馬)라 칭하면서 관군에 대항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난은 일관된 계획하에 조직적으로 편성되어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정치적 반란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역사적 배경 『동국이상국집』에 따르면 의비(義庇)와 발좌(勃左)의 난이라고도 한다....
1398년(태조 7)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제1차 왕자의 난은 1398년(태조 7) 8월 이방원이 이복동생 이방석과 이방번을 비롯해 정도전 등을 죽이고 권력을 얻은 싸움이다. 이 난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자 간의 싸움이자 이방원과 정도전 일당의 권력다툼이기도 하다.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했으나 이방원은 개국공신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는 등 권력에서 밀려났다. 게다가 정도전 등이 사병혁파와 한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하려 하자 이방원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살해하고 이방석과 이방번을 죽였다. 실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사병을 혁파하고 제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내용 일명 방원(芳遠)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定社),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제1차 왕자의 난 (第一次 王子의 亂)
1398년(태조 7)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제1차 왕자의 난은 1398년(태조 7) 8월 이방원이 이복동생 이방석과 이방번을 비롯해 정도전 등을 죽이고 권력을 얻은 싸움이다. 이 난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자 간의 싸움이자 이방원과 정도전 일당의 권력다툼이기도 하다.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했으나 이방원은 개국공신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는 등 권력에서 밀려났다. 게다가 정도전 등이 사병혁파와 한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하려 하자 이방원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살해하고 이방석과 이방번을 죽였다. 실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사병을 혁파하고 제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내용 일명 방원(芳遠)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定社),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소민(所民)의 저항. 망이·망소이의 난은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소민(所民)의 저항이다. 이 저항은 무신정변을 전후해서 비등해졌던 사회 경제적 폐단에 따른 가중된 수탈 정책에 맞선 것이었다. 망이, 망소이 등 소민이 허위적이긴 하였으나 소(所)를 현(縣)으로 승격시키는 중앙의 양보를 얻어냈다는 점은 이후의 저항 세력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이들이 저항의 효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근거지였던 명학소의 지역적 특성 및 소의 주민과 같은 불만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시대적 분위기였을 것이다.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소(所)의 주민은 공장(工匠)과 같이 천업(賤業)^2] 종사자라는 이유로 양민보다 낮은 지위에 놓여 있었다. 또한...
망이·망소이의 난 (亡伊·亡所伊의 亂)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소민(所民)의 저항. 망이·망소이의 난은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소민(所民)의 저항이다. 이 저항은 무신정변을 전후해서 비등해졌던 사회 경제적 폐단에 따른 가중된 수탈 정책에 맞선 것이었다. 망이, 망소이 등 소민이 허위적이긴 하였으나 소(所)를 현(縣)으로 승격시키는 중앙의 양보를 얻어냈다는 점은 이후의 저항 세력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이들이 저항의 효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근거지였던 명학소의 지역적 특성 및 소의 주민과 같은 불만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시대적 분위기였을 것이다.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소(所)의 주민은 공장(工匠)과 같이 천업(賤業)^2] 종사자라는 이유로 양민보다 낮은 지위에 놓여 있었다. 또한...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사노비 만적(萬積) 등이 신분 해방을 위해 일으킨 노비 저항. 만적의 난은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사노비 만적(萬積) 등이 신분 해방을 위해 일으킨 노비 저항이다. '노비'는 남자 종 '노(奴)'와 여자 종 '비(婢)'를 합하여 부른 말이다. 개경은 정치와 경제·문화 등의 중심지였다. 그곳의 노비들은 다른 지방의 노비들보다 사회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무신 정변 이후 정치적 격변 속에서 만적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국가 권력을 잡겠다는 이상을 가졌다. 하지만 같은 노비 출신인 순정(順貞)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말았다.망소이의 난(亡伊 · 亡所伊)이나, 1182년(명종 12) 전주(全州)에서 일어난 관노(官奴)^3]들의 봉기 등이 대표적이다. 1196년(명종 26)에는 [최충헌(崔忠獻)의...
만적의 난 (萬積의 亂)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사노비 만적(萬積) 등이 신분 해방을 위해 일으킨 노비 저항. 만적의 난은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사노비 만적(萬積) 등이 신분 해방을 위해 일으킨 노비 저항이다. '노비'는 남자 종 '노(奴)'와 여자 종 '비(婢)'를 합하여 부른 말이다. 개경은 정치와 경제·문화 등의 중심지였다. 그곳의 노비들은 다른 지방의 노비들보다 사회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무신 정변 이후 정치적 격변 속에서 만적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국가 권력을 잡겠다는 이상을 가졌다. 하지만 같은 노비 출신인 순정(順貞)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말았다.망소이의 난(亡伊 · 亡所伊)이나, 1182년(명종 12) 전주(全州)에서 일어난 관노(官奴)^3]들의 봉기 등이 대표적이다. 1196년(명종 26)에는 [최충헌(崔忠獻)의...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마지막 해에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일으킨 반란. 비담의 난은 신라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 해에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다. 비담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에 올라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1년 가량 뒤에 비담은 염종 등과 함께 ‘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선덕여왕을 옹위하던 김유신·김춘추 편의 군사와 대치하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이로써 선덕여왕에서 진덕여왕으로 이어지는 성골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 세력은 후퇴하고 김유신·김춘추 등 율령국가를 지향하는 세력이 승리해 장차 무열왕계의 전제 왕조가 성립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貴族會議)의 의장인 상대등에 올랐던 것을 보면 본래 진골(眞骨) 신분이었던 것으로...
비담의 난 (毗曇의 亂)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마지막 해에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일으킨 반란. 비담의 난은 신라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 해에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다. 비담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에 올라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1년 가량 뒤에 비담은 염종 등과 함께 ‘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선덕여왕을 옹위하던 김유신·김춘추 편의 군사와 대치하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이로써 선덕여왕에서 진덕여왕으로 이어지는 성골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 세력은 후퇴하고 김유신·김춘추 등 율령국가를 지향하는 세력이 승리해 장차 무열왕계의 전제 왕조가 성립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貴族會議)의 의장인 상대등에 올랐던 것을 보면 본래 진골(眞骨) 신분이었던 것으로...
770년(혜공왕 6) 신라의 대아찬(大阿飡) 김융이 일으킨 반란. 다만 혜공왕 4년에 일어난 대공(大恭)의 난 뒤로 계속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김융의 난도 그러한 난 중의 하나라 할 것이며, 이러한 난들이 모두 혜공왕의 난정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미추왕죽엽군조(未鄒王竹葉軍條)에서 김유신의 혼령이 미추왕릉 안에서 말하기를 “신이 생전에는 국난을 구하고 삼국을 통일하였으며 지금은 영혼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있는데,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없이 죽음을 당하니 군신이 나의 공렬을 생각지 않음이라 신이 멀리 떠나고자 하는 바 입니다.”라고 한 경술년이 바로 김융의 난이 일어난 혜공왕 6년에 해당하기 때문에 김융이 김유신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한다. 또, 『삼국사기』김유신전에 보면...
김융의 난 (金融의 亂)
770년(혜공왕 6) 신라의 대아찬(大阿飡) 김융이 일으킨 반란. 다만 혜공왕 4년에 일어난 대공(大恭)의 난 뒤로 계속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김융의 난도 그러한 난 중의 하나라 할 것이며, 이러한 난들이 모두 혜공왕의 난정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미추왕죽엽군조(未鄒王竹葉軍條)에서 김유신의 혼령이 미추왕릉 안에서 말하기를 “신이 생전에는 국난을 구하고 삼국을 통일하였으며 지금은 영혼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있는데,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없이 죽음을 당하니 군신이 나의 공렬을 생각지 않음이라 신이 멀리 떠나고자 하는 바 입니다.”라고 한 경술년이 바로 김융의 난이 일어난 혜공왕 6년에 해당하기 때문에 김융이 김유신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한다. 또, 『삼국사기』김유신전에 보면...
775년(혜공왕 11) 6월 신라 중대 말 이찬(伊飡) 김은거가 일으킨 반란. # 내용 김은거는 768년 7월에 일어난 대공(大恭)·대렴(大廉)의 난을 수습한 뒤, 그 해 10월 이찬으로서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러나 770년 8월 김융(金融)의 난이 있은 뒤 12월에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正門)이 대신 시중 자리에 올랐다. 다시 774년 9월에는 이찬 김양상(金良相 : 뒤의 선덕왕)이 상대등(上大等)이 되면서, 이듬해 3월 이찬 김순(金順)이 시중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와중에 김은거는 시중에서 물러난 지 5년 뒤인 775년 6월에 난을 일으켰다. 김은거는 혜공왕 때 가장 규모가 큰 반란사건이었던 대공의 난을 수습한 직후에 시중이 된 것으로 보아 혜공왕의 측근이었을 것이다. 김융의 난이 진압된 직후에 은퇴한 점으로 보아 그가 정계에서 은퇴했을...
김은거의 난 (金隱居의 亂)
775년(혜공왕 11) 6월 신라 중대 말 이찬(伊飡) 김은거가 일으킨 반란. # 내용 김은거는 768년 7월에 일어난 대공(大恭)·대렴(大廉)의 난을 수습한 뒤, 그 해 10월 이찬으로서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러나 770년 8월 김융(金融)의 난이 있은 뒤 12월에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正門)이 대신 시중 자리에 올랐다. 다시 774년 9월에는 이찬 김양상(金良相 : 뒤의 선덕왕)이 상대등(上大等)이 되면서, 이듬해 3월 이찬 김순(金順)이 시중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와중에 김은거는 시중에서 물러난 지 5년 뒤인 775년 6월에 난을 일으켰다. 김은거는 혜공왕 때 가장 규모가 큰 반란사건이었던 대공의 난을 수습한 직후에 시중이 된 것으로 보아 혜공왕의 측근이었을 것이다. 김융의 난이 진압된 직후에 은퇴한 점으로 보아 그가 정계에서 은퇴했을...
780년(혜공왕 16) 2월에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 김지정(金志貞)의 난(亂)은 780년(혜공왕 16) 2월에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이다. 궁궐을 포위하였다가 같은 해 4월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의 군대에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와중에 혜공왕과 왕비가 살해되었다. 진압을 주도한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중대가 끝나고 하대가 시작된다.혜공왕 대는 768년(혜공왕 4) 7월 일길찬 대공(大恭)과 아찬 대렴(大廉) 형제의 반란과 구십육각간의 난, 770년(혜공왕 6) 대아찬 김융(金融)의 반란, 775년(혜공왕 11) 6월 김은거(金隱居)의 반란 등 고위층들의 반란이 연이어 발생한 혼란기였다. 김지정의 난은 혜공왕 대 반란의 마지막 결정타로서, 혜공왕과 왕비의 살해로 귀결되었다. 이후 김지정의 난 진압을 주도하였던 상대등 김양상이...
김지정의 난 (金志貞의 亂)
780년(혜공왕 16) 2월에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 김지정(金志貞)의 난(亂)은 780년(혜공왕 16) 2월에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이다. 궁궐을 포위하였다가 같은 해 4월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의 군대에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와중에 혜공왕과 왕비가 살해되었다. 진압을 주도한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중대가 끝나고 하대가 시작된다.혜공왕 대는 768년(혜공왕 4) 7월 일길찬 대공(大恭)과 아찬 대렴(大廉) 형제의 반란과 구십육각간의 난, 770년(혜공왕 6) 대아찬 김융(金融)의 반란, 775년(혜공왕 11) 6월 김은거(金隱居)의 반란 등 고위층들의 반란이 연이어 발생한 혼란기였다. 김지정의 난은 혜공왕 대 반란의 마지막 결정타로서, 혜공왕과 왕비의 살해로 귀결되었다. 이후 김지정의 난 진압을 주도하였던 상대등 김양상이...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의 도독(都督)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김헌창의 난은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의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이다. 김헌창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했다.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에게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오래지 않아 진압되었다. 배경에는 아버지 김주원이 무열왕계의 가장 유력한 왕족으로 선덕왕 사후 왕위에 추대되었지만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이후 무열왕계 귀족들은 왕위계승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金憲昌) 난(亂)의 성격」(황선영, 『부산사학(釜山史學)』35, 1998)...
김헌창의 난 (金憲昌의 亂)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의 도독(都督)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김헌창의 난은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의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이다. 김헌창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했다.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에게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오래지 않아 진압되었다. 배경에는 아버지 김주원이 무열왕계의 가장 유력한 왕족으로 선덕왕 사후 왕위에 추대되었지만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이후 무열왕계 귀족들은 왕위계승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金憲昌) 난(亂)의 성격」(황선영, 『부산사학(釜山史學)』35, 1998)...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개경에서 일으킨 저항. 개경 승도의 난은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개경에서 일으킨 저항이다. 1174년(명종 4) 귀법사(歸法寺) 승려들의 저항을 시작으로 1217년(고종 4)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에 대비해 종군(從軍)하던 승려들이 저항을 일으켰다. 이들 저항의 이면에는 무신정변 이전까지 고려 불교계를 이끌었던 교종(敎宗) 교단이 무신정변으로 인하여 그들을 후원했던 왕실과 문벌 귀족들의 권력이 약화하고, 선종(禪宗) 교단으로의 교체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경과 및 결과 1174년(명종 4)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100여 명이 당시 횡포가 심하던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고 개성 북문(北門)을 침범하였다. 이에 이의방은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승려들을 쳐서...
개경 승도의 난 (開京 僧徒의 亂)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개경에서 일으킨 저항. 개경 승도의 난은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개경에서 일으킨 저항이다. 1174년(명종 4) 귀법사(歸法寺) 승려들의 저항을 시작으로 1217년(고종 4)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에 대비해 종군(從軍)하던 승려들이 저항을 일으켰다. 이들 저항의 이면에는 무신정변 이전까지 고려 불교계를 이끌었던 교종(敎宗) 교단이 무신정변으로 인하여 그들을 후원했던 왕실과 문벌 귀족들의 권력이 약화하고, 선종(禪宗) 교단으로의 교체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경과 및 결과 1174년(명종 4)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100여 명이 당시 횡포가 심하던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고 개성 북문(北門)을 침범하였다. 이에 이의방은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승려들을 쳐서...
768년(혜공왕 4) 7월에 일길찬 대공이 동생인 아찬 대렴과 함께 일으킨 반란. 대공(大恭)의 난(亂)은 768년(혜공왕 4) 7월에 일길찬 대공이 동생인 아찬 대렴과 함께 일으킨 반란이다. 33일 동안 왕궁을 포위하였다가 왕군에 의해 토벌되어 구족이 처형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혜공왕 대 반란의 출발점이 된다.『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2 혜공왕조」에서 혜공왕 2년 정미(丁未) 7월 3일 각간(角干)[^1] 대공(大恭)의 적(賊)이 흥기하자 왕도(王都)와 5도(道) 주군(州郡)의 96 각간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고 한 것과 같은 사건으로 보이나 시점에 차이가 있다. 『신당서(新唐書)』 「신라전(新羅傳)」의 대력(大曆) 연간(766년~779년) 초반에 재상(宰相)들이 권력을 다투어 서로 공격해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는 기록...
대공의 난 (大恭의 亂)
768년(혜공왕 4) 7월에 일길찬 대공이 동생인 아찬 대렴과 함께 일으킨 반란. 대공(大恭)의 난(亂)은 768년(혜공왕 4) 7월에 일길찬 대공이 동생인 아찬 대렴과 함께 일으킨 반란이다. 33일 동안 왕궁을 포위하였다가 왕군에 의해 토벌되어 구족이 처형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혜공왕 대 반란의 출발점이 된다.『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2 혜공왕조」에서 혜공왕 2년 정미(丁未) 7월 3일 각간(角干)[^1] 대공(大恭)의 적(賊)이 흥기하자 왕도(王都)와 5도(道) 주군(州郡)의 96 각간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고 한 것과 같은 사건으로 보이나 시점에 차이가 있다. 『신당서(新唐書)』 「신라전(新羅傳)」의 대력(大曆) 연간(766년~779년) 초반에 재상(宰相)들이 권력을 다투어 서로 공격해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는 기록...
768년(혜공왕 4) 7월에 대공이 일으킨 반란에 응하여 신라 왕도와 5도 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웠다는 사건. 구십육각간(九十六角干)의 난(亂)은 768년(혜공왕 4) 7월에 대공이 일으킨 반란에 응하여 신라 왕도와 5도 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웠다는 사건이다. 왕도를 33일 간 포위하여 신성과 장창이 불타는 등의 피해를 입혔으며, 전국적 진압에는 3개월이 소요되었다.난 도중에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탔으며, 난의 결과 대공의 가문이 망하였다. 그 가문의 재산과 보물 · 비단과 함께 사량부(沙梁部) · 모량부(牟梁部) 등 동리(洞里)에 있던 역당(逆黨)^2]들의 보곡(寶穀)도 왕궁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고려시대 [보(寶)의 용례에 기반하여, 왕궁으로 압수된 보곡(寶穀)을 대공가에서 백성들에게 대여해 주기 위해 비축해 두었던...
96각간의 난 (九十六角干의 亂)
768년(혜공왕 4) 7월에 대공이 일으킨 반란에 응하여 신라 왕도와 5도 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웠다는 사건. 구십육각간(九十六角干)의 난(亂)은 768년(혜공왕 4) 7월에 대공이 일으킨 반란에 응하여 신라 왕도와 5도 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웠다는 사건이다. 왕도를 33일 간 포위하여 신성과 장창이 불타는 등의 피해를 입혔으며, 전국적 진압에는 3개월이 소요되었다.난 도중에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탔으며, 난의 결과 대공의 가문이 망하였다. 그 가문의 재산과 보물 · 비단과 함께 사량부(沙梁部) · 모량부(牟梁部) 등 동리(洞里)에 있던 역당(逆黨)^2]들의 보곡(寶穀)도 왕궁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고려시대 [보(寶)의 용례에 기반하여, 왕궁으로 압수된 보곡(寶穀)을 대공가에서 백성들에게 대여해 주기 위해 비축해 두었던...
고려 무신정권 초기에 석령사가 일으킨 반란. 과연 문신들이 남적과 통모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무신들이 많은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단한 것을 보면 북쪽의 조위총(趙位寵)과 함께 남쪽의 석령사가 사회적으로 큰 불안의 대상이었음은 명확한 것 같다. # 의의와 평가 다만, 남적 석령사의 근거지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1176년(명종 6)충청도 공주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은 석령사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高麗 武人政權初期 民亂의 性格」(김당택, 『國史館論叢』 20, 1990.) - 「高麗時代 公州 鳴鶴所民의 蜂起에 대한 一硏究」(이정신, 『韓國史硏究』 61·62, 1988.)
석령사의 난 (石令史의 亂)
고려 무신정권 초기에 석령사가 일으킨 반란. 과연 문신들이 남적과 통모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무신들이 많은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단한 것을 보면 북쪽의 조위총(趙位寵)과 함께 남쪽의 석령사가 사회적으로 큰 불안의 대상이었음은 명확한 것 같다. # 의의와 평가 다만, 남적 석령사의 근거지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1176년(명종 6)충청도 공주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은 석령사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高麗 武人政權初期 民亂의 性格」(김당택, 『國史館論叢』 20, 1990.) - 「高麗時代 公州 鳴鶴所民의 蜂起에 대한 一硏究」(이정신, 『韓國史硏究』 61·62,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