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적의 난은 1219년(고종 6) 10월 의주(義州) 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저항이다. 이 저항은 일차적으로 지방관들의 가혹한 수탈에서 기인하였다. 또한 의주 지역은 1216년(고종 3)부터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에 따른 전쟁터였고, 이로 인한 극심한 역(役)의 착취가 이루어졌으며, 주민들이 계속해서 전투에 동원됨으로써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에 집권자 최우(崔瑀)는 지방관들을 귀양 보냄으로써 저항 세력을 무마하려 하였지만, 의주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다.
1219년(고종 6) 10월 의주(義州)의 저항은 지방관들의 가혹한 수탈이 그 원인이었다. 또한 의주는 북방 민족과 교역의 중심지였는데, 1216년(고종 3)부터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에 따른 전쟁으로 교역이 중단됨으로써 주민들의 생계가 어려워져 그 불만이 저항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집권자 최우(崔瑀: 개명 최이(崔怡))는 지방관들을 귀양 보냄으로써 저항 세력을 무마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1219년 최충헌(崔忠獻)의 사망으로 인한 권력 유지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고 최우 자신의 권력 계승을 미화하려는 차원이었다. 그 역시 토지 탈점과 사적 지배 기구를 통하여 대민 수탈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은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의주의 저항 세력이 계속해서 저항한 것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의주 별장(別將) 한순(韓恂)과 낭장(郎將) 다지(多智) 등이 중심이 되어 그곳의 방수장군(防守將軍) 조선(趙宣)과 수령 이체(李棣)를 죽이고 스스로 원수(元帥)라고 칭하였다. 이어 감창사(監倉使)와 대간(臺諫) 등의 관서(官署)를 두고 창고를 열어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이에 서북 지역의 농민들이 호응하여 그 저항의 범위가 확산되었다.
저항군은 이웃 지방의 저항군과 합세해 포악한 지방관과 토호(土豪)들을 처단하고 세력을 넓혀갔는데,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 · 구주(龜州: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 · 연주(延州: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 · 성주(成州: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를 제외한 서북 지방의 모든 성(城)을 장악하였다.
한편,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김군수(金君綏)로부터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장군 조염경(趙廉卿)과 낭장 이공로(李公老)를 보내어 농민들을 위무하게 하고 김군수를 상장군(上將軍) 오수기(吳壽祺)와 교체시켰다. 선유사(宣諭使) 조염경 등이 돌아와 “ 병마사 조충(趙冲) · 김군수 · 정공수(丁公壽) 등은 청백하고 백성을 사랑하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포악해 백성을 억압하고 수탈하기에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난을 일으켰다.”라는 의주 농민의 말을 전하였다.
집권자 최우는 농민들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안영린(安永麟) · 유비(柳庇) · 준필(俊弼) · 이정수(李貞壽) · 최수웅(崔守雄) · 이세분(李世芬) · 고세림(高世霖) · 홍문서(洪文敍) · 이윤공(李允恭) · 최효전(崔孝全) · 송자공(宋自恭) · 이원미(李元美) · 최밀(崔謐) 등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이들은 최충헌에게 아첨해 안찰사(按察使) · 분도(分道) · 분대(分臺) · 감창사 등의 관직을 얻어 착취를 일삼은 사람들이었다. 이에 최 씨 정권에서는 주(州)의 장군을 교체하여 그들을 무마하려 하였다. 또한 이 저항에 가담하지 않았던 지역의 주리(州吏)에게는 참직(叅職)을 제수하여 지방 사회 내의 분열을 조장하려 하였고, 그에 따라 재지 세력 중에는 의주의 저항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 세력으로 나타나는 예도 있었다.
한편 최씨 정권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이극서(李克敍)에게 중군(中軍)을, 이적유(李迪儒)에게 후군(後軍)을, 김취려(金就礪)에게 우군(右軍)을 거느리게 하여 저항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11월이 되자 저항군은 더욱 기세를 올려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를 공격하였다. 이후 저항군과 관군 사이에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저항이 장기화하였다. 1220년(고종 7) 2월 조정에서는 중군병마사 이극서를 평장사(平章事)로, 우군병마사 김취려를 중군병마사로, 서북면병마사 오수기를 우군병마사로, 전(前) 서북면병마사 좌간의대부 김군수를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삼는 등 지휘관을 교체해 진압을 재촉하였다.
이처럼 관군의 공세가 강화되는 가운데 저항군 지휘부를 구성한 한순 · 다지 등은 저항을 실패로 이끌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즉, 그들은 청천강(淸川江)을 경계로 삼아 동진(東眞: 대진국(大眞國))에 투항했는데, 몰래 금나라 장수 우가하(汚哥下)의 군대를 끌어들여 의주에 주둔(駐屯)하게 하고 자신들은 여러 성의 군사를 거느리고 박주(博州: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에 둔을 치고서 서로 성원하였다. 이에 중군(中軍)에서는 지병마사 김군수가 선무사(宣撫使) 이공로(李公老)와 의논해 낭장 윤충효(尹忠孝) · 박홍보(朴洪輔) 등을 우가하에게 파견하여, 편지를 전해 화복(禍福)으로 타이르고 맹약(盟約)을 어긴 것을 책망하였다. 이때 관군의 뜻을 알고 마음을 돌린 우가하는 겉으로 성내면서 윤충효 등을 가두고 낭장 곽윤창(郭允昌)을 보내어 한순 · 다지를 불렀다. 한순 · 다지가 군사의 호위를 받고 오자, 우가하는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다가 매복시킨 군사를 동원해 모두 죽였다. 그리고 윤충효 등에게 자신의 문첩(文牒)과 한순 · 다지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저항은 일단락되어 4월 중군병마사 김취려가 곽원고(郭元固) · 김보정(金甫貞) · 종주질(宗周秩) · 종주뢰(宗周賚) 등을 의주에 보내어 남은 사람들을 편안히 모여 살게 하였다. 그러나 종주뢰가 탐욕을 부려 뇌물에 따라 일을 처리하자, 이를 원망한 저항군들이 다시 싸우기 위해 외부의 저항군을 불러들였다. 이때 윤창(尹昌) 등이 의주성을 공격해 종주뢰 등을 죽이고 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김취려는 판관 최홍(崔弘)과 녹사 박문정(朴文挺)을 보내어 화복으로 타이르고, 이어 대장군 조염경과 장군 박문분(朴文賁)에게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후 힘의 열세를 느낀 저항군은 산간 지대로 흩어져 저항하였지만, 1221년(고종 8) 3월 윤창 등 3명의 지도부가 체포됨으로써 의주의 저항은 점차 막을 내렸다. 이후 의주는 반역이 일어났다 하여 함신진(咸新鎭)으로 강등되었다가 얼마 후에 예전대로 복구하였다.
한순과 다지가 스스로 원수라 칭하고 감창사와 대간 등의 관서를 두었다는 것은 단순한 저항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부군이 반격을 시작하고 서북계 전역에서 호응하지 않음으로써 한순과 다지는 동진에 투항하였다. 따라서 이 반란은 주도층이 고려 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여, 자신들의 봉기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정치적 성격이 강하였다.
최 씨 정권은 이러한 지방 사회의 동요를 무마하고 이들의 역량을 통합하기보다는 자신의 정권 보위에 급급할 뿐이었다. 이는 재지 세력과 저항 세력의 결합, 재지 세력 내의 대립, 외적에 투항하는 변칙적인 저항 등을 부추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