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에서의 난은 지방관들의 가혹한 수탈이 그 원인이었다. 또한 의주는 북방민족과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전쟁으로 교역이 중단됨으로써 주민들의 생계가 어려워져 그 불만이 항쟁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의주 별장(別將) 한순(韓恂)과 낭장(郎將) 다지(多智) 등이 중심이 되어 그곳의 방수장군(防戍將軍) 조선(趙宣)과 수령 이체(李棣)를 죽이고 스스로 원수(元帥)라고 칭하였다. 이어 감창사(監倉使)와 대간(臺諫) 등의 관서(官署)를 두고 창고를 열어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이에 서북지역의 농민들이 호응하여 그 항쟁의 범위가 확산되었다.
이어 농민군은 이웃 지방의 농민과 합세해 포악한 지방관과 토호(土豪)들을 처단하고 세력을 넓혀갔는데, 10월이 가기 전에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구주(龜州: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연주(延州: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성주(成州: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를 제외한 서북지방의 모든 성(城)을 장악하였다.
한편,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김군수(金君綏)로부터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장군 조염경(趙廉卿)과 낭장 이공로(李公老)를 보내어 농민들을 초무(招撫)하게 하고 김군수를 상장군(上將軍) 오수기(吳壽祺)와 교체시켰다.
선유사(宣諭使) 조염경 등은 돌아와 “병마사 조충(趙沖)·김군수·정공수(丁公壽) 등은 청백하고 백성을 사랑하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탐욕스럽고 잔인, 포악해 백성을 억압, 수탈하기에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난을 일으켰다.”라는 의주농민의 말을 전하였다.
이에 실권자인 최우(崔瑀)는 농민들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안영린(安永麟)·유비(柳庇)·준필(俊弼)·이정수(李貞壽)·최수웅(崔守雄)·이세분(李世芬)·고세림(高世霖)·홍문서(洪文敍)·이윤공(李允恭)·최효전(崔孝全)·송자공(宋自恭)·이원미(李元美)·최밀(崔謐) 등을 섬으로 귀양보냈다. 이들은 최충헌(崔忠獻)에게 아첨해 안찰사(按察使)·분도(分道)·분대(分臺)·감창사 등의 관직을 얻어 착취를 일삼은 사람들이었다.
한편으로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이극서(李克敍)에게 중군(中軍)을, 이적유(李迪儒)에게 후군(後軍)을, 김취려(金就礪)에게 우군(右軍)을 거느리게 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11월이 되자 농민군은 더욱 기세를 올려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를 공격하였다. 이후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난이 장기화되었다.
이듬해 2월 조정에서는 중군병마사 이극서를 평장사(平章事)로, 우군병마사 김취려를 중군병마사로, 서북면병마사 오수기를 우군병마사로, 전(前) 서북면병마사·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김군수를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삼는 등 지휘관을 교체해 진압을 재촉하였다.
이와 같이 관군의 공세가 강화되는 가운데 농민군 지휘부를 구성한 한순·다지 등은 난을 실패로 이끌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즉, 그들은 청천강(淸川江)을 경계로 삼아 동진(東眞 : 대진국)에 투항했는데, 몰래 금나라 장수 우가하(汚哥下)의 군대를 끌어들여 의주에 둔치게 하고 자신들은 여러 성의 군사를 거느리고 박주(博州: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에 둔치고서 서로 성원했던 것이다.
이에 중군(中軍)에서는 지병마사 김군수가 선무사(宣撫使) 이공로(李公老)와 의논해 낭장 윤충효(尹忠孝)·박홍보(朴洪輔) 등을 우가하에게 파견, 편지를 전해 화복(禍福)으로 타이르고 맹약(盟約)을 어긴 것을 책망하였다.
이 때 관군의 뜻을 알고 마음을 돌린 우가하는 겉으로 성내면서 윤충효 등을 가두고 낭장 곽윤창(郭允昌)을 보내어 한순·다지를 불렀다.
한순·다지가 군사의 호위를 받고 오자, 우가하는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다가 매복시킨 군사를 동원해 모두 죽였다. 그리고 윤충효 등에게 자신의 문첩(文牒)과 한순·다지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난은 일단락되어 4월 중군병마사 김취려가 곽원고(郭元固)·김보정(金甫貞)·종주질(宗周秩)·종주뢰(宗周賚) 등을 의주에 보내어 남은 사람들을 편안히 모여 살게 하였다.
그러나 종주뢰가 탐욕을 부려 뇌물에 따라 일을 처리하자, 이를 원망한 농민들이 다시 싸우기 위해 외부의 농민군을 불러들였다. 이 때 윤창(尹昌) 등이 의주성을 공격해 종주뢰 등을 죽이고 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김취려는 판관(判官) 최홍(崔弘)과 녹사(綠事) 박문정(朴文挺)을 보내어 화복으로 타이르고, 이어 대장군(大將軍) 조염경과 장군 박문분(朴文賁)에게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후 힘의 열세를 느낀 농민군은 산간지대로 흩어져 투쟁했지만, 이듬해 3월 윤창 등 3명의 지도부가 체포됨으로써 의주농민군의 투쟁은 점차 막을 내렸다.
한순과 다지가 스스로를 원수라 칭하고 감창사와 대간 등의 관서를 두었다는 것은 단순한 민란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정부군의 반격과 서북계 전역에서 호응을 하지 않음으로써 한순과 다지는 동진에 투항하였다.
따라서 이 반란은 주도층이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고, 자신들의 봉기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봉기의 원인이 지방관의 탐학에 있으며, 청천강 이북의 여러 성이 거의 호응하는 대반란이었음을 볼 때 민중항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