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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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는 고려 후기에 판서운관사를 역임한 과학기술자로 천문과 역법에 능통하였다. 최성지로부터 수시력법을 전수받아 서운관에 근무하면서 서운사력, 서운정을 거쳐 벼슬이 판서운관사에 이르렀다. 『수시력첩법입성』을 저술하였다.
강보 (姜保)
강보는 고려 후기에 판서운관사를 역임한 과학기술자로 천문과 역법에 능통하였다. 최성지로부터 수시력법을 전수받아 서운관에 근무하면서 서운사력, 서운정을 거쳐 벼슬이 판서운관사에 이르렀다. 『수시력첩법입성』을 저술하였다.
강호문은 고려 후기 판전교시사를 역임한 문신이다.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전교시사에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유교 지식인들과의 교유도 활발하여 같은 시기에 급제한 이숭인, 정도전과 돈독하게 지냈고, 이색, 정몽주와도 친교를 맺었다.
강호문 (康好文)
강호문은 고려 후기 판전교시사를 역임한 문신이다.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전교시사에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유교 지식인들과의 교유도 활발하여 같은 시기에 급제한 이숭인, 정도전과 돈독하게 지냈고, 이색, 정몽주와도 친교를 맺었다.
경사만은 고려 후기 우대언(右代言)을 역임한 충숙왕 측근 문신이다. 그는 충숙왕 환국 운동을 전개한 충숙왕 측근 세력이다. 충숙왕비 덕비(德妃)의 조카사위이기도 한 경사만은 1321년(충숙왕 8) 이후 좌부대언, 우대언을 역임하였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김인연 등과 함께 왕의 환국을 요청하다가 심왕파의 미움을 받아 순군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경사만 (慶斯萬)
경사만은 고려 후기 우대언(右代言)을 역임한 충숙왕 측근 문신이다. 그는 충숙왕 환국 운동을 전개한 충숙왕 측근 세력이다. 충숙왕비 덕비(德妃)의 조카사위이기도 한 경사만은 1321년(충숙왕 8) 이후 좌부대언, 우대언을 역임하였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김인연 등과 함께 왕의 환국을 요청하다가 심왕파의 미움을 받아 순군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고용보는 고려 후기 원나라 황실에서 활동한 고려 출신 환관이다. 원나라에서 휘정원사(徽政院使)로 활동했던 고려 출신 환관 정투멘데르[鄭禿透滿迭兒]와는 다른 사람이다. 충혜왕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진 후 기황후 세력으로 활동하였으며, 1343년(충혜왕 복위 4) 11월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로 압송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의 난 때 피신하여 죽음을 면하고 해인사에 숨어 지내다가 1362년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 정지상에게 주살되었다.
고용보 (高龍普)
고용보는 고려 후기 원나라 황실에서 활동한 고려 출신 환관이다. 원나라에서 휘정원사(徽政院使)로 활동했던 고려 출신 환관 정투멘데르[鄭禿透滿迭兒]와는 다른 사람이다. 충혜왕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진 후 기황후 세력으로 활동하였으며, 1343년(충혜왕 복위 4) 11월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로 압송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의 난 때 피신하여 죽음을 면하고 해인사에 숨어 지내다가 1362년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 정지상에게 주살되었다.
공민왕은 고려 후기 제31대(재위: 1351~1374) 국왕이다. 1351년(충정왕 3) 10월에 즉위하여 1374년(공민왕 23) 9월에 시해되기까지 23년간 재위하였다. 공민왕의 재위 기간은 원나라 간섭이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가 건국되어 원명 교체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탈과 홍건적 침입으로 토지가 황폐되고 인명 손실이 커서 민생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이 같은 국내외 정세 속에서 여러 차례 개혁 정치를 추진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공민왕 (恭愍王)
공민왕은 고려 후기 제31대(재위: 1351~1374) 국왕이다. 1351년(충정왕 3) 10월에 즉위하여 1374년(공민왕 23) 9월에 시해되기까지 23년간 재위하였다. 공민왕의 재위 기간은 원나라 간섭이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가 건국되어 원명 교체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탈과 홍건적 침입으로 토지가 황폐되고 인명 손실이 커서 민생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이 같은 국내외 정세 속에서 여러 차례 개혁 정치를 추진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공은은 고려 후기 척불소를 올렸던 문신이다. 원나라의 한림학사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창원백(昌原伯)에 봉해진 공소(孔紹)의 손자이며, 고려 말 예조총랑을 지낸 공부(孔俯)는 형이다. 척불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갔으며, 조선 건국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공은 (孔㒚)
공은은 고려 후기 척불소를 올렸던 문신이다. 원나라의 한림학사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창원백(昌原伯)에 봉해진 공소(孔紹)의 손자이며, 고려 말 예조총랑을 지낸 공부(孔俯)는 형이다. 척불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갔으며, 조선 건국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권고는 고려 후기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역임한 세족(世族) 출신 문신이다. 1327년(충숙왕 14) 경주부윤(慶州府尹)에 부임한 바 있고, 지첨의부사를 지내고, 뒤에 문화군(文化君)으로 봉해졌다가 1355년(공민왕 4) 영가군(永嘉君)으로 봉해졌다. 벼슬이 검교시중에 이르렀으며, 86세에 죽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권고 (權皐)
권고는 고려 후기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역임한 세족(世族) 출신 문신이다. 1327년(충숙왕 14) 경주부윤(慶州府尹)에 부임한 바 있고, 지첨의부사를 지내고, 뒤에 문화군(文化君)으로 봉해졌다가 1355년(공민왕 4) 영가군(永嘉君)으로 봉해졌다. 벼슬이 검교시중에 이르렀으며, 86세에 죽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기철은 고려 후기 요양행성(遼陽行省) 평장정사(平章政事)를 역임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이다. 몽골식 이름은 바얀부카[伯顔不花]로, 누이동생이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이다. 원나라로부터 요양행성 평장정사에 임명되고, 고려에서는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로 압송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황후의 위세를 믿고 토지를 점탈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고, 쌍성총관부 반민과 역모를 꾸몄다는 점을 들어 권겸(權謙)·노책(盧頙)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기철 (奇轍)
기철은 고려 후기 요양행성(遼陽行省) 평장정사(平章政事)를 역임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이다. 몽골식 이름은 바얀부카[伯顔不花]로, 누이동생이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이다. 원나라로부터 요양행성 평장정사에 임명되고, 고려에서는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로 압송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황후의 위세를 믿고 토지를 점탈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고, 쌍성총관부 반민과 역모를 꾸몄다는 점을 들어 권겸(權謙)·노책(盧頙)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김규는 고려 후기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한 문신이자 개혁가이다. 충목왕대 서연(書筵)에서 시독관으로 활동하였고,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整治官)이 되어 개혁에 참여하였다. 공민왕 초에 경복흥(慶復興)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을 탄핵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홍건적 2차 침입 때에는 절영책(岊嶺柵)을 수비하기도 하였다. 신돈이 실각하여 수원으로 유배된 후, 왕명에 따라 임박(林樸)과 함께 신돈을 처형하는 임무를 맡았다.
김규 (金虯)
김규는 고려 후기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한 문신이자 개혁가이다. 충목왕대 서연(書筵)에서 시독관으로 활동하였고,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整治官)이 되어 개혁에 참여하였다. 공민왕 초에 경복흥(慶復興)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을 탄핵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홍건적 2차 침입 때에는 절영책(岊嶺柵)을 수비하기도 하였다. 신돈이 실각하여 수원으로 유배된 후, 왕명에 따라 임박(林樸)과 함께 신돈을 처형하는 임무를 맡았다.
김남득은 고려 후기 상주목사, 서해도관찰사, 문하평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공민왕 즉위 초 양광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홀치[忽赤] 소속 관리들을 처벌하여 기강을 세웠으나, 기철 등 부원세력이 숙청될 때 그 당여로 몰려 장형을 당하였다. 상주목사 재직 때 관아를 중건하고 풍영루라는 정자를 건립하였으며, 공양왕 즉위 초에는 도평의사사 청사 건립의 감독을 맡았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그 당여로 몰려 우현보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김남득 (金南得)
김남득은 고려 후기 상주목사, 서해도관찰사, 문하평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공민왕 즉위 초 양광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홀치[忽赤] 소속 관리들을 처벌하여 기강을 세웠으나, 기철 등 부원세력이 숙청될 때 그 당여로 몰려 장형을 당하였다. 상주목사 재직 때 관아를 중건하고 풍영루라는 정자를 건립하였으며, 공양왕 즉위 초에는 도평의사사 청사 건립의 감독을 맡았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그 당여로 몰려 우현보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노선은 고려 후기 공민왕 때 자제위(子弟衛) 소속 관리이다. 1374년(공민왕 23) 9월 환관 최만생과 홍륜을 비롯한 자제위 소속 관리들이 공민왕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노선은 끝까지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결국 참수되었다.
노선 (盧瑄)
노선은 고려 후기 공민왕 때 자제위(子弟衛) 소속 관리이다. 1374년(공민왕 23) 9월 환관 최만생과 홍륜을 비롯한 자제위 소속 관리들이 공민왕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노선은 끝까지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결국 참수되었다.
신돈은 고려 후기 공민왕 대 개혁정치를 추진한 승려이다. 신돈에 대해서는 『고려사』 등에서 요승(妖僧), 사승(邪僧), 용승(庸僧), 미승(微僧), 노호(老狐) 등으로 지칭하는 부정적 평가도 있으나, 개혁가로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전민변정 사업을 추진하여 토지와 예속민 문제를 해결하고 국학 중흥책을 실시한 점, 산관의 통제와 순자격제의 시행으로 관리 기강을 확립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신돈 (辛旽)
신돈은 고려 후기 공민왕 대 개혁정치를 추진한 승려이다. 신돈에 대해서는 『고려사』 등에서 요승(妖僧), 사승(邪僧), 용승(庸僧), 미승(微僧), 노호(老狐) 등으로 지칭하는 부정적 평가도 있으나, 개혁가로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전민변정 사업을 추진하여 토지와 예속민 문제를 해결하고 국학 중흥책을 실시한 점, 산관의 통제와 순자격제의 시행으로 관리 기강을 확립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춘부는 고려 후기 공민왕 때 도첨의시중을 역임한 문신이다. 충정왕 때 우대언·밀직부사 등을 지내고, 공민왕 때에는 지추밀원사·판추밀원사·도첨의찬성사 등을 거쳐, 1368년(공민왕 17) 수상직인 도첨의시중에 올랐다. 두 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홍건적 침입 때는 안동으로 피란하는 왕을 호종하고 군사를 징발하여 전투를 지휘하였다. 신돈 집권기에 그 지지 세력으로 활동하다가 신돈 실각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춘부 (李春富)
이춘부는 고려 후기 공민왕 때 도첨의시중을 역임한 문신이다. 충정왕 때 우대언·밀직부사 등을 지내고, 공민왕 때에는 지추밀원사·판추밀원사·도첨의찬성사 등을 거쳐, 1368년(공민왕 17) 수상직인 도첨의시중에 올랐다. 두 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홍건적 침입 때는 안동으로 피란하는 왕을 호종하고 군사를 징발하여 전투를 지휘하였다. 신돈 집권기에 그 지지 세력으로 활동하다가 신돈 실각과 함께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