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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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거부운동은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주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신앙수호를 위한 항일운동이다. 일제는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와 사상통일을 위한 신사참배를 식민지에도 강요하여 식민지의 민족혼까지 말살하려 했다. 1930년대에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기독교계는 신사참배 강요금지 청원운동과 더불어 신사참배 거부권유 운동을 전개하여 맞서 싸웠다. 이 투쟁으로 투옥된 이가 2,000여 명에 이르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만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신사참배 거부운동 (神社參拜 拒否運動)
신사참배거부운동은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주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신앙수호를 위한 항일운동이다. 일제는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와 사상통일을 위한 신사참배를 식민지에도 강요하여 식민지의 민족혼까지 말살하려 했다. 1930년대에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기독교계는 신사참배 강요금지 청원운동과 더불어 신사참배 거부권유 운동을 전개하여 맞서 싸웠다. 이 투쟁으로 투옥된 이가 2,000여 명에 이르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만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다른 나라 공용기관이나 민간으로부터 자금 또는 상품을 꾸어들이는 일을 가리키는 경제용어.
차관 (借款)
다른 나라 공용기관이나 민간으로부터 자금 또는 상품을 꾸어들이는 일을 가리키는 경제용어.
입학사정관제는 대입 전형의 선진화를 위하여 대학별 특성에 맞춰 신입생을 선발하는 제도이다. 입학사정관제는 학교교육의 정상화 도모, 대입전형의 다양화 및 특성화, 다양한 전형 요소를 평가에 반영하고자 하였다. 또한 잠재력 있는 학생의 선발과 대학 교육의 연계성 강화 등을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입학사정관제는 정량적 수치 비교에서 정성적 평가 방식인 질적 평가로의 변화이다. 이는 다양한 학생을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해야 된다는 기본 전제를 지닌 평가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
입학사정관제 (入學査定官制)
입학사정관제는 대입 전형의 선진화를 위하여 대학별 특성에 맞춰 신입생을 선발하는 제도이다. 입학사정관제는 학교교육의 정상화 도모, 대입전형의 다양화 및 특성화, 다양한 전형 요소를 평가에 반영하고자 하였다. 또한 잠재력 있는 학생의 선발과 대학 교육의 연계성 강화 등을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입학사정관제는 정량적 수치 비교에서 정성적 평가 방식인 질적 평가로의 변화이다. 이는 다양한 학생을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해야 된다는 기본 전제를 지닌 평가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1890년 7월 조선 정부의 토지 제공으로 조성된 외국인 묘지이다. 서울외국인묘지라고도 한다. 1890년 7월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요청으로 양화진 언덕 일대를 외국인 매장지로 획정하였다. 1985년 6월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에서 묘지 경내에 기념관을 건축하고, 1986년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06년 5월 묘역의 공식 명칭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개칭하였다. 묘원의 면적은 13,224㎡, 안장자 수는 15개국 417명이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楊花津 外國人 宣敎師 廟院)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1890년 7월 조선 정부의 토지 제공으로 조성된 외국인 묘지이다. 서울외국인묘지라고도 한다. 1890년 7월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요청으로 양화진 언덕 일대를 외국인 매장지로 획정하였다. 1985년 6월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에서 묘지 경내에 기념관을 건축하고, 1986년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06년 5월 묘역의 공식 명칭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개칭하였다. 묘원의 면적은 13,224㎡, 안장자 수는 15개국 417명이다.
1885년 4월 백홍준, 이성하, 서상륜 등 초기 개종자들의 전도로 평안북도 의주에 설립된 장로교회.
의주서교회 (義州西敎會)
1885년 4월 백홍준, 이성하, 서상륜 등 초기 개종자들의 전도로 평안북도 의주에 설립된 장로교회.
평양에 설립된 감리교의 홀기념병원과 장로교의 평양제중병원, 감리교 여선교회의 평양부인병원이 통합되어 합동으로 경영하던 기독교 의료 기관.
평양연합기독병원 (平壤聯合基督病院)
평양에 설립된 감리교의 홀기념병원과 장로교의 평양제중병원, 감리교 여선교회의 평양부인병원이 통합되어 합동으로 경영하던 기독교 의료 기관.
종교단체법은 일본 정부가 종교단체를 통제할 목적으로 1939년 제정 공포한 법률이다. 종교단체의 통제를 목적으로 일본 정부는 1939년 1월 37조로 된 종교단체법안을 제74회 제국의회에 제출하였다. 1939년 4월 8일 법률 제77호로 종교단체법이 공포되었다. 교단의 설립을 위해서는 문부대신에게 허가를 받아야 했다.(제3조) 주무대신은 공익을 해할 만한 행위를 한 종교단체는 허가를 취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17조) 1940년 6월 문부성은 종교단체법에 따라 교회수 50, 신도수 5,000명 이상이 못 되면 교단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종교단체법 (宗敎團體法)
종교단체법은 일본 정부가 종교단체를 통제할 목적으로 1939년 제정 공포한 법률이다. 종교단체의 통제를 목적으로 일본 정부는 1939년 1월 37조로 된 종교단체법안을 제74회 제국의회에 제출하였다. 1939년 4월 8일 법률 제77호로 종교단체법이 공포되었다. 교단의 설립을 위해서는 문부대신에게 허가를 받아야 했다.(제3조) 주무대신은 공익을 해할 만한 행위를 한 종교단체는 허가를 취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17조) 1940년 6월 문부성은 종교단체법에 따라 교회수 50, 신도수 5,000명 이상이 못 되면 교단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1925년에,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에서 청년들의 질적 향상과 신앙 훈련을 위하여 창간한 개신교 월간 잡지.
진생 (眞生)
1925년에,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에서 청년들의 질적 향상과 신앙 훈련을 위하여 창간한 개신교 월간 잡지.
해방 이후 고려신학교 교장, 총신대학 대학원장, 합동신학교 명예교장 등을 역임한 목사. 교육가, 신학자.
박윤선 (朴允善)
해방 이후 고려신학교 교장, 총신대학 대학원장, 합동신학교 명예교장 등을 역임한 목사. 교육가, 신학자.
최중진은 대한제국기 자유교회 창설자인 목사이다. 1870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으로, 1894년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다가 농민군이 해산된 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9월 제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태인, 정읍 지역 교회를 돌보다가 세례자 자격 제한 및 선교 재정 사용 차별에 불만을 품고 5개 항의 개선을 요구했다. 개선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1910년 노회로부터 독립을 선업하고, 1915년경 자유교회를 이끌고 장로회를 떠났다. 이후 조선일보 정읍지국장, 신간회 정읍지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1940년 사망하였다.
최중진 (崔重珍)
최중진은 대한제국기 자유교회 창설자인 목사이다. 1870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으로, 1894년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다가 농민군이 해산된 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9월 제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태인, 정읍 지역 교회를 돌보다가 세례자 자격 제한 및 선교 재정 사용 차별에 불만을 품고 5개 항의 개선을 요구했다. 개선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1910년 노회로부터 독립을 선업하고, 1915년경 자유교회를 이끌고 장로회를 떠났다. 이후 조선일보 정읍지국장, 신간회 정읍지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1940년 사망하였다.
대한제국기 연동교회 초대 장로, 장로회공의회 전도위원 등으로 활동한 개신교인. 사회운동가.
고찬익 (高燦益)
대한제국기 연동교회 초대 장로, 장로회공의회 전도위원 등으로 활동한 개신교인. 사회운동가.
일제강점기 평양 장대현교회, 철산군 세평교회, 평양 오촌리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
변인서 (邊麟瑞)
일제강점기 평양 장대현교회, 철산군 세평교회, 평양 오촌리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
평양 남산현교회는 1893년 4월 미북감리회 의료선교사 홀(W. J. Hall)과 조사 김창식이 평양에 설립한 교회이다. 홀은 1894년에 평양에서 교육 사업도 시작했는데 이것이 광성학교로 발전하였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교회의 교인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신홍식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는 등 3.1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4년 ‘애국기 헌납금’ 마련을 위한 교회 통폐합으로 폐교되었다. 해방 후 재건되었지만 1952년 담당 목사의 월남으로 폐교되었다.
평양 남산현교회 (平壤 南山峴敎會)
평양 남산현교회는 1893년 4월 미북감리회 의료선교사 홀(W. J. Hall)과 조사 김창식이 평양에 설립한 교회이다. 홀은 1894년에 평양에서 교육 사업도 시작했는데 이것이 광성학교로 발전하였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교회의 교인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신홍식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는 등 3.1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4년 ‘애국기 헌납금’ 마련을 위한 교회 통폐합으로 폐교되었다. 해방 후 재건되었지만 1952년 담당 목사의 월남으로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