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박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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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적·사회적 운동을 가리키는 정치용어다. 용어 그대로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반공주의의 기원은 민족주의자들과 기독교인, 일본 식민지 권력에 의해 수행되었다. 해방 이후 냉전의 고착화에 따라 국가의 정통성과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으로 변화되었다. 반공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는 민족을 배반한 이들이며, 오직 대한민국 정부만이 한민족의 진정한 정부가 된다. 반공은 국민을 하나의 이념으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정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반공 (反共)
반공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적·사회적 운동을 가리키는 정치용어다. 용어 그대로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반공주의의 기원은 민족주의자들과 기독교인, 일본 식민지 권력에 의해 수행되었다. 해방 이후 냉전의 고착화에 따라 국가의 정통성과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으로 변화되었다. 반공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는 민족을 배반한 이들이며, 오직 대한민국 정부만이 한민족의 진정한 정부가 된다. 반공은 국민을 하나의 이념으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정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1948년 10월, 여수 주둔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
여수·순천 10·19사건 (麗水·順天 10·19事件)
1948년 10월, 여수 주둔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
국군 제3사단이 1950년 7월 16일부터 8월 17일까지 동해안의 영덕지역에서 유엔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제5사단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전투.
영덕지구 전투 (盈德地區 戰鬪)
국군 제3사단이 1950년 7월 16일부터 8월 17일까지 동해안의 영덕지역에서 유엔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제5사단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전투.
육군의 신병과 신병외에 국방부 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자에 대한 군사 기본훈련과 교육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육군 교육훈련 기관.
육군훈련소 (陸軍訓練所)
육군의 신병과 신병외에 국방부 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자에 대한 군사 기본훈련과 교육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육군 교육훈련 기관.
의정부전투는 6·25전쟁 초기 의정부 정면을 방어하던 국군이 북한군의 침공을 받아 싸운 방어전투이다. 1950년 6월 25일 동두천, 포천, 의정부를 공격해 서울을 점령하고 국군을 격멸할 계획을 세운 북한군이 4만 8천 명의 병력으로 공격해 왔다. 당시 의정부를 담당하는 국군은 4,500여 명만이 부대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동두천과 포천이 점령당하였다. 북한군의 서울 진입 방지를 위해 의정부를 사수하려고 인근 부대와 후방부대까지 투입했으나 실패하고 의정부는 6월 26일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의정부 전선이 무너지며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의정부전투 (議政府戰鬪)
의정부전투는 6·25전쟁 초기 의정부 정면을 방어하던 국군이 북한군의 침공을 받아 싸운 방어전투이다. 1950년 6월 25일 동두천, 포천, 의정부를 공격해 서울을 점령하고 국군을 격멸할 계획을 세운 북한군이 4만 8천 명의 병력으로 공격해 왔다. 당시 의정부를 담당하는 국군은 4,500여 명만이 부대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동두천과 포천이 점령당하였다. 북한군의 서울 진입 방지를 위해 의정부를 사수하려고 인근 부대와 후방부대까지 투입했으나 실패하고 의정부는 6월 26일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의정부 전선이 무너지며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전쟁 관련 각종 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하는 기념관.
전쟁기념관 (戰爭記念館)
전쟁 관련 각종 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하는 기념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연변의 초산을 점령한 공격전투.
초산전투 (楚山戰鬪)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연변의 초산을 점령한 공격전투.
춘천지구전투는 6·25전쟁 초기 국군 제6사단이 춘천∼홍천 지역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을 저지하여 국군의 조기 붕괴를 막아낸 전투이다. 국군 제6사단은 춘천의 소양강과 홍천의 말고개 일대에서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로 이용하여 6일 동안 방어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춘천~홍천 축선 진출을 지연시켰다. 북한군은 제2군단 예하 병력을 춘천∼홍천∼이천∼수원 축선으로 우회 기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국군의 병력 증원과 퇴로를 차단하려는 북한군의 작전계획은 큰 차질을 빚었고 국군은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춘천지구 전투 (春川地區 戰鬪)
춘천지구전투는 6·25전쟁 초기 국군 제6사단이 춘천∼홍천 지역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을 저지하여 국군의 조기 붕괴를 막아낸 전투이다. 국군 제6사단은 춘천의 소양강과 홍천의 말고개 일대에서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로 이용하여 6일 동안 방어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춘천~홍천 축선 진출을 지연시켰다. 북한군은 제2군단 예하 병력을 춘천∼홍천∼이천∼수원 축선으로 우회 기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국군의 병력 증원과 퇴로를 차단하려는 북한군의 작전계획은 큰 차질을 빚었고 국군은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팀스피리트훈련은 1976년부터 1993년까지 매년 2월에서 5월에 한반도에서 실시되었던 한미 양국군의 연합군사훈련이다. 1975년 베트남 공산화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와 북한의 도발 위협 고조에 따라 한미 안보협력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이 훈련의 배경에는 1969년 이후 제기된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기 위한 한미연합공수기동훈련이 있었다. 총 17회 실시되었으나 1994년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중단하였다. 이후 한미 연합훈련은 키리졸브·독수리연습으로 개칭하여 실시되고 있다.
팀스피리트훈련 (TeamSpirit訓練)
팀스피리트훈련은 1976년부터 1993년까지 매년 2월에서 5월에 한반도에서 실시되었던 한미 양국군의 연합군사훈련이다. 1975년 베트남 공산화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와 북한의 도발 위협 고조에 따라 한미 안보협력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이 훈련의 배경에는 1969년 이후 제기된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기 위한 한미연합공수기동훈련이 있었다. 총 17회 실시되었으나 1994년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중단하였다. 이후 한미 연합훈련은 키리졸브·독수리연습으로 개칭하여 실시되고 있다.
파로호전투는 1951년 5월 26일에서 28일까지 국군이 화천저수지 일대에서 전개하여 중공군에게 승리한 전투이다. 파로호는 이 전투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이 전투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중서부 전선인 문산~간성지역에서 진행된 반격작전의 일환이었다. 27일에서 28일까지 중공군을 격멸한 뒤 28일에 미군이 화천을 점령하고 국군이 화천저수지 남쪽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퇴로가 막힌 중공군이 화천저수지에서 익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최소 2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았다.
파로호전투 (破虜湖戰鬪)
파로호전투는 1951년 5월 26일에서 28일까지 국군이 화천저수지 일대에서 전개하여 중공군에게 승리한 전투이다. 파로호는 이 전투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이 전투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중서부 전선인 문산~간성지역에서 진행된 반격작전의 일환이었다. 27일에서 28일까지 중공군을 격멸한 뒤 28일에 미군이 화천을 점령하고 국군이 화천저수지 남쪽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퇴로가 막힌 중공군이 화천저수지에서 익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최소 2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았다.
1950년 8월 10일부터 31일까지 포항지구에서 학도병, 국군 제3사단, 민부대(민기식 부대)가 북한군 제5·12사단, 제766부대의 공격을 저지한 방어전투.
포항지구 전투 (浦項地區 戰鬪)
1950년 8월 10일부터 31일까지 포항지구에서 학도병, 국군 제3사단, 민부대(민기식 부대)가 북한군 제5·12사단, 제766부대의 공격을 저지한 방어전투.
6·25전쟁이 교착전 단계로 접어든 직후 국군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이 향로봉 북쪽의 주요 고지군 확보를 위해 924·884고지의 북한군을 격퇴하고 남강 선으로 진출한 공격전투.
향로봉전투 (香爐峰戰鬪)
6·25전쟁이 교착전 단계로 접어든 직후 국군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이 향로봉 북쪽의 주요 고지군 확보를 위해 924·884고지의 북한군을 격퇴하고 남강 선으로 진출한 공격전투.
현리전투는 중공군의 5월 공세 때 국군이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하여 현리지역에서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한 전투이다. ‘5월 공세’는 1951년 5월 16일부터 중공군이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공격으로 국군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마치고개까지 점령당했다. 국군은 후퇴하여 하진부리 부근에 집결, 부대를 재편성하였으나 철수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퇴각하였다. 이 결과 국군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이 손실을 입었으며, 주요 장비를 거의 모두 파괴하거나 유기하였다. 6·25전쟁 사상 가장 큰 패전으로 기록되었다.
현리전투 (縣里戰鬪)
현리전투는 중공군의 5월 공세 때 국군이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하여 현리지역에서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한 전투이다. ‘5월 공세’는 1951년 5월 16일부터 중공군이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공격으로 국군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마치고개까지 점령당했다. 국군은 후퇴하여 하진부리 부근에 집결, 부대를 재편성하였으나 철수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퇴각하였다. 이 결과 국군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이 손실을 입었으며, 주요 장비를 거의 모두 파괴하거나 유기하였다. 6·25전쟁 사상 가장 큰 패전으로 기록되었다.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갑산과 혜산진에서 북한군 제42사단과 제126사단 소속의 패잔병을 격퇴하고 혜산진을 탈환한 전투.
혜산진전투 (惠山鎭戰鬪)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갑산과 혜산진에서 북한군 제42사단과 제126사단 소속의 패잔병을 격퇴하고 혜산진을 탈환한 전투.
횡성전투는 1951년 2월 11일부터 횡성 일대에서 전개된 전투이다. 이 전투의 배경은 유엔군이 남한산 교두교를 제외하고 한강 남안을 확보하며 중공군을 위기에 몰아넣은 것에 있었다. 중공군은 위기를 돌파하고자 가장 먼저 기동력과 화력이 약한 국군이 배치된 횡성 지역을 공격하였다. 국군은 중공군의 공격 3시간 후 후방이 차단되며 고립되었고 소규모 부대로 분산하거나 개별적으로 철수하였다. 국군을 지원하던 미군 지원부대도 화포와 차량 등을 버리고 철수하였다. 횡성전투 결과, 국군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인원은 장교 323명과 사병 7,142명으로 추산된다.
횡성전투 (橫城戰鬪)
횡성전투는 1951년 2월 11일부터 횡성 일대에서 전개된 전투이다. 이 전투의 배경은 유엔군이 남한산 교두교를 제외하고 한강 남안을 확보하며 중공군을 위기에 몰아넣은 것에 있었다. 중공군은 위기를 돌파하고자 가장 먼저 기동력과 화력이 약한 국군이 배치된 횡성 지역을 공격하였다. 국군은 중공군의 공격 3시간 후 후방이 차단되며 고립되었고 소규모 부대로 분산하거나 개별적으로 철수하였다. 국군을 지원하던 미군 지원부대도 화포와 차량 등을 버리고 철수하였다. 횡성전투 결과, 국군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인원은 장교 323명과 사병 7,142명으로 추산된다.
휴전회담은 6·25전쟁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이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지속한 군사회담이다. 1년 여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공산군측은 그들의 힘으로 전 한반도를 석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유엔군측도 힘에 의한 응징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소련이 제의하고 미국이 동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유엔군·북한군·중공군 사령관이 서명하면서 6·25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대한민국 대표는 휴전협정에 반대하면서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다.
휴전회담 (休戰會談)
휴전회담은 6·25전쟁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이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지속한 군사회담이다. 1년 여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공산군측은 그들의 힘으로 전 한반도를 석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유엔군측도 힘에 의한 응징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소련이 제의하고 미국이 동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유엔군·북한군·중공군 사령관이 서명하면서 6·25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대한민국 대표는 휴전협정에 반대하면서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다.
국군 제1해병연대가 양구 북방의 해안분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북한군 제1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924고지와 1026고지를 탈환한 전투.
924고지 및 1026고지전투 (九二四高地 및 一空二六高地戰鬪)
국군 제1해병연대가 양구 북방의 해안분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북한군 제1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924고지와 1026고지를 탈환한 전투.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모든 국가자원을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통제·관리·운용하는 국가행위.
국가동원 (國家動員)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모든 국가자원을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통제·관리·운용하는 국가행위.
대한민국 육·해·공군 정예간호장교 양성의 임무를 지닌 4년제 특수목적 대학.
국군간호사관학교 (國軍看護士官學校)
대한민국 육·해·공군 정예간호장교 양성의 임무를 지닌 4년제 특수목적 대학.
군병원의 총칭.
국군병원 (國軍病院)
군병원의 총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