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박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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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여러 관제에 대한 전고(典故)를 수록한 행정서.
각관단록 (閣館壇錄)
조선조의 여러 관제에 대한 전고(典故)를 수록한 행정서.
경상북도 예천유학자 반재원이 예천 집강소의 설치 배경과 해체에 관하여 기록한 실기. 일기.
갑오척사록 (甲午斥邪錄)
경상북도 예천유학자 반재원이 예천 집강소의 설치 배경과 해체에 관하여 기록한 실기. 일기.
조선 후기의 문신, 신응조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
강목집요 (綱目輯要)
조선 후기의 문신, 신응조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
개항기 때, 차도주를 역임한 천도교인.
강시원 (姜時元)
개항기 때, 차도주를 역임한 천도교인.
술의 원료가 되는 누룩을 만들던 양조회사.
국자회사 (麯子會社)
술의 원료가 되는 누룩을 만들던 양조회사.
일제강점기하 물산장려운동과 병행하여 전개된 민족경제 자립운동의 한 형태.
금주단연운동 (禁酒斷煙運動)
일제강점기하 물산장려운동과 병행하여 전개된 민족경제 자립운동의 한 형태.
일제강점기 때, 안창호의 지시를 받고 평양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김인근 (金仁根)
일제강점기 때, 안창호의 지시를 받고 평양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07년 대구에서 조직된 애국계몽단체.
끽연금지회 (喫煙禁止會)
1907년 대구에서 조직된 애국계몽단체.
대한제국기 때, 중추원의관, 비서감승, 규장각직학사 등을 역임한 문신.
민경호 (閔京鎬)
대한제국기 때, 중추원의관, 비서감승, 규장각직학사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후기 동지의금부사,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
민긍식 (閔肯植)
조선후기 동지의금부사,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
조선 후기에, 독판내무부사, 춘천부유수, 의정부찬정 등을 역임한 문신.
민두호 (閔斗鎬)
조선 후기에, 독판내무부사, 춘천부유수, 의정부찬정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후기에, 궁내부특진관, 종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한 문신.
민병승 (閔丙承)
조선 후기에, 궁내부특진관, 종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후기 황해도수군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
민성호 (閔成鎬)
조선후기 황해도수군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
대한제국기 때, 주차영국벨기에공사, 장례원소경, 경효전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민영돈 (閔泳敦)
대한제국기 때, 주차영국벨기에공사, 장례원소경, 경효전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개항기 예조판서, 내무아문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민영상 (閔泳商)
개항기 예조판서, 내무아문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조선 후기에, 충청북도관찰사, 경상남도관찰사, 봉상시 등을 역임한 문신.
민영선 (閔泳璇)
조선 후기에, 충청북도관찰사, 경상남도관찰사, 봉상시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민치서 (閔致序)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대한제국기 때, 궁내부특진관, 의정부찬정, 회계원경 등을 역임한 문신.
민치헌 (閔致憲)
대한제국기 때, 궁내부특진관, 의정부찬정, 회계원경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후기에, 내장사장, 시종원부경, 홍문관 등을 역임한 문신.
민형식 (閔亨植)
조선 후기에, 내장사장, 시종원부경, 홍문관 등을 역임한 문신.
박광호는 개항기 충청도 지방을 대표하여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인이다. 1871년 3월 영해에서 최초로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교조의 신원과 동학 포교에 대한 공인을 요구하는 공주와 삼례집회가 이어졌다. 동학지도부에서는 서울 복합상소를 결정하였고, 박광호를 소수(疏首)로 임명하였다. 박광호 등 40여 명은 1893년 과거시험을 치르는 선비들로 꾸미고 상경하여 광화문 앞에서 3일 낮밤을 절규하며 상소하였다. 그러나 동학교도에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고, 교조신원운동의 방향은 크게 전환되어 ‘척왜양창의’를 기치로 내건 보은집회가 일어났다.
박광호 (朴光浩)
박광호는 개항기 충청도 지방을 대표하여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인이다. 1871년 3월 영해에서 최초로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교조의 신원과 동학 포교에 대한 공인을 요구하는 공주와 삼례집회가 이어졌다. 동학지도부에서는 서울 복합상소를 결정하였고, 박광호를 소수(疏首)로 임명하였다. 박광호 등 40여 명은 1893년 과거시험을 치르는 선비들로 꾸미고 상경하여 광화문 앞에서 3일 낮밤을 절규하며 상소하였다. 그러나 동학교도에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고, 교조신원운동의 방향은 크게 전환되어 ‘척왜양창의’를 기치로 내건 보은집회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