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오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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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개척단운동은 1961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이 전개한 전국적 농촌활동이다. 1961년 7월 19일 공식 출범한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은 주로 방학을 이용해 전국 각지로 내려가 다양한 농촌 조사, 계몽, 봉사, 지도 활동을 전개했다. 정부의 재건국민운동과 연결되어 1960년대 전반기에는 학생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으나, 196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견제를 받다가 1970년대 정부의 탄압과 통제 속에서 점차 힘을 잃었다.
향토개척단운동 (鄕土開拓團運動)
향토개척단운동은 1961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이 전개한 전국적 농촌활동이다. 1961년 7월 19일 공식 출범한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은 주로 방학을 이용해 전국 각지로 내려가 다양한 농촌 조사, 계몽, 봉사, 지도 활동을 전개했다. 정부의 재건국민운동과 연결되어 1960년대 전반기에는 학생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으나, 196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견제를 받다가 1970년대 정부의 탄압과 통제 속에서 점차 힘을 잃었다.
개헌안부결반대운동(改憲案否決反對運動)은 1952년에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가 국회를 압박하여 결과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전개한 대중집회와 시위이다. 1952년 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큰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국회의원 소환, 국회 해산 등을 주장하는 집회와 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어졌다.
개헌안 부결 반대운동 (改憲案 否決 反對運動)
개헌안부결반대운동(改憲案否決反對運動)은 1952년에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가 국회를 압박하여 결과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전개한 대중집회와 시위이다. 1952년 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큰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국회의원 소환, 국회 해산 등을 주장하는 집회와 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어졌다.
유월항쟁(六月抗爭)은 1987년 6월,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를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전개된 대규모 시민 항쟁이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기획한 6·10국민대회를 기점으로 시작된 유월항쟁 당시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직선제 개헌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본격적인 민주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6월항쟁 (六月抗爭)
유월항쟁(六月抗爭)은 1987년 6월,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를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전개된 대규모 시민 항쟁이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기획한 6·10국민대회를 기점으로 시작된 유월항쟁 당시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직선제 개헌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본격적인 민주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협상선거법은 1958년 1월에 선거공영제와 참관인 권한 확대를 골자로, 여야 합의에 의해 개정된 선거법 개정안이다. 1958년 5월에 4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 등은 선거법을 개정하기 위한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자유당이 주장한 선거공영제와 야당 측이 주장한 참관인 권한 확대를 모두 수용하는 방식으로 협상이 타결되었다. 언론 조항 때문에 논란이 일었지만 여야가 합의한 선거법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협상선거법으로 치러진 1958년 4대 총선 결과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가 확립되었다.
협상선거법 (協商選擧法)
협상선거법은 1958년 1월에 선거공영제와 참관인 권한 확대를 골자로, 여야 합의에 의해 개정된 선거법 개정안이다. 1958년 5월에 4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 등은 선거법을 개정하기 위한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자유당이 주장한 선거공영제와 야당 측이 주장한 참관인 권한 확대를 모두 수용하는 방식으로 협상이 타결되었다. 언론 조항 때문에 논란이 일었지만 여야가 합의한 선거법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협상선거법으로 치러진 1958년 4대 총선 결과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가 확립되었다.
KBS사태는 1990년 3~5월, 언론민주화 과정에서 발생한 KBS 노동조합의 파업 농성 사건이다. 노태우 정부는 KBS의 민주화에 불만을 품고 당시 KBS 노동조합에 유화적이던 한국방송공사 사장 서영훈을 경영상 문제를 이유로 1990년 3월 초 해임하고 4월 초 후임 사장으로 서기원을 선임하였다. 이에 KBS 노동조합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서기원의 출근을 저지하는 한편 파업 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방송사에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다수의 노동조합원들이 연행되었고, 결국 5월 중순 노동조합이 제작에 복귀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KBS사태 (KBS事態)
KBS사태는 1990년 3~5월, 언론민주화 과정에서 발생한 KBS 노동조합의 파업 농성 사건이다. 노태우 정부는 KBS의 민주화에 불만을 품고 당시 KBS 노동조합에 유화적이던 한국방송공사 사장 서영훈을 경영상 문제를 이유로 1990년 3월 초 해임하고 4월 초 후임 사장으로 서기원을 선임하였다. 이에 KBS 노동조합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서기원의 출근을 저지하는 한편 파업 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방송사에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다수의 노동조합원들이 연행되었고, 결국 5월 중순 노동조합이 제작에 복귀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개헌서명운동(改憲署名運動)은 1986년에 신한민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주도로 전개된 대통령직선제 개헌 추진 운동이다. 1985년 2 · 12총선 승리로 제1야당이 된 신한민주당은 민주화추진협의회과 함께 1986년부터 1천만 개헌서명운동에 돌입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순차적으로 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 및 현판식이 진행되었고, 종교계와 지식인들의 공개서명 및 시국선언이 잇따랐다. 이에 정부와 여당도 한발 물러서 국회 개헌특위 설치에 합의하였지만, 여야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며 결국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조치’가 나왔다.
개헌서명운동 (改憲署名運動)
개헌서명운동(改憲署名運動)은 1986년에 신한민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주도로 전개된 대통령직선제 개헌 추진 운동이다. 1985년 2 · 12총선 승리로 제1야당이 된 신한민주당은 민주화추진협의회과 함께 1986년부터 1천만 개헌서명운동에 돌입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순차적으로 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 및 현판식이 진행되었고, 종교계와 지식인들의 공개서명 및 시국선언이 잇따랐다. 이에 정부와 여당도 한발 물러서 국회 개헌특위 설치에 합의하였지만, 여야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며 결국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조치’가 나왔다.
1954년 10월 26일, 민주국민당의선전부장 함상훈(咸尙勳)이 신익희(申翼熙)가 1953년 7월 26일 인도 뉴델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납북당한 조소앙(趙素昻)을 비밀리에 만났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후 이어진 일련의 사건.
뉴델리 밀회사건 (New Delhi 密會事件)
1954년 10월 26일, 민주국민당의선전부장 함상훈(咸尙勳)이 신익희(申翼熙)가 1953년 7월 26일 인도 뉴델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납북당한 조소앙(趙素昻)을 비밀리에 만났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후 이어진 일련의 사건.
1960년 6월 12일,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이종률(李鍾律)의 지도와 영향 하에 결성된 청년운동 단체.
민주민족청년동맹 (民主民族靑年同盟)
1960년 6월 12일,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이종률(李鍾律)의 지도와 영향 하에 결성된 청년운동 단체.
1961년 2월 21일,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며 조직 구성을 추진했던 통일운동단체.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中立化祖國統一總聯盟)
1961년 2월 21일,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며 조직 구성을 추진했던 통일운동단체.
1960년 2월 28일 정부와 여당의 부당한 선거개입에 항의하며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벌인 학생시위.
2·28대구학생시위 (二二八大邱學生示威)
1960년 2월 28일 정부와 여당의 부당한 선거개입에 항의하며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벌인 학생시위.
1949년 6월 26일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한 사건.
김구 암살사건 (金九 暗殺事件)
1949년 6월 26일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한 사건.
1947년 7월 19일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 등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
여운형 암살사건 (呂運亨 暗殺事件)
1947년 7월 19일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 등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
1956년 1월 30일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金昌龍) 소장이 출근 도중 암살당한 사건.
김창룡 암살사건 (金昌龍 暗殺事件)
1956년 1월 30일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金昌龍) 소장이 출근 도중 암살당한 사건.
1989년 5월 3일 동의대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을 진압하던 경찰들이 화재로 희생된 사건.
동의대 사건 (東義大 事件)
1989년 5월 3일 동의대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을 진압하던 경찰들이 화재로 희생된 사건.
1984년 조직된 학생운동조직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주요 간부들이 1985년 구속된 사건.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民主化推進委員會 事件)
1984년 조직된 학생운동조직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주요 간부들이 1985년 구속된 사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1985년 9월 결성된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의 연합기구이다. 1983년 정부의 학원자율화 조치를 계기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만들어졌다. 강력한 재야통합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두 단체가 통합하여 민통련이 결성되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엽합과 서울노동운동연합 그리고 여러 개신교 운동단체 등이 추가로 가입하면서 폭넓은 운동 연합체로 성장하였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야당, 종교계와 연대하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약칭 고문공대위)’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民主統一民衆運動聯合)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1985년 9월 결성된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의 연합기구이다. 1983년 정부의 학원자율화 조치를 계기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만들어졌다. 강력한 재야통합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두 단체가 통합하여 민통련이 결성되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엽합과 서울노동운동연합 그리고 여러 개신교 운동단체 등이 추가로 가입하면서 폭넓은 운동 연합체로 성장하였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야당, 종교계와 연대하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약칭 고문공대위)’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68년 4월 3일 서울지검 공안부가반국가단체 구성·음모 혐의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내의 관련자들을 구속 기소한 사건.
서울사대 독서회 사건 (서울師大 讀書會 事件)
1968년 4월 3일 서울지검 공안부가반국가단체 구성·음모 혐의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내의 관련자들을 구속 기소한 사건.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은 1971년 4월 14일 결성된 대학생 이념서클들의 연합조직이다. 1971년 정부가 교련 강화책을 발표하자 학생들은 이에 반대 투쟁을 벌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서울대를 비롯한 12개 학교 300여 명의 학생이 모여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교련 철폐, 공명선거 캠페인 등을 행동강령으로 내걸었다. 출범 직후에는 대통령 선거의 부정을 감시하였고 선거 이후에는 부정선거 규탄 운동 등을 이어 나갔다. 후에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과 통합되어 ‘전국학생연맹’으로 거듭났다. 1970년대 최초의 학생운동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民主守護全國靑年學生聯盟)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은 1971년 4월 14일 결성된 대학생 이념서클들의 연합조직이다. 1971년 정부가 교련 강화책을 발표하자 학생들은 이에 반대 투쟁을 벌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서울대를 비롯한 12개 학교 300여 명의 학생이 모여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교련 철폐, 공명선거 캠페인 등을 행동강령으로 내걸었다. 출범 직후에는 대통령 선거의 부정을 감시하였고 선거 이후에는 부정선거 규탄 운동 등을 이어 나갔다. 후에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과 통합되어 ‘전국학생연맹’으로 거듭났다. 1970년대 최초의 학생운동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전개한 대규모 시위.
5·15서울역시위 (五一五서울驛示威)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전개한 대규모 시위.
1971년 8∼9월 이루어진 대학교수들의 대학 자주성 보장 요구운동.
대학자주화 선언운동 (大學自主化 宣言運動)
1971년 8∼9월 이루어진 대학교수들의 대학 자주성 보장 요구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