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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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법은1962년 농업의 발전, 농민의 복지향상, 농촌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 농업과 관련된 과학기술의 연구 개발, 보급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여 농촌 지역의 진흥을 꾀하고자 제정한 법이다. 농림수산부 장관 소속 농촌진흥청, 도지사 소속 농촌진흥원, 시장·군수 소속 농촌지도소를 기구로 설정하고 있다. 농촌진흥법은 농업 기술의 연구와 개발, 농민 교육, 농촌 경제 향상 등을 목적으로 하며, 농업인에게 기술 지도와 자문 제공을 규정하고, 농업 생산성 향상과 농촌 생활의 질 개선을 위한 정부 지원과 협력을 명시하였다.
농촌진흥법 (農村振興法)
농촌진흥법은1962년 농업의 발전, 농민의 복지향상, 농촌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 농업과 관련된 과학기술의 연구 개발, 보급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여 농촌 지역의 진흥을 꾀하고자 제정한 법이다. 농림수산부 장관 소속 농촌진흥청, 도지사 소속 농촌진흥원, 시장·군수 소속 농촌지도소를 기구로 설정하고 있다. 농촌진흥법은 농업 기술의 연구와 개발, 농민 교육, 농촌 경제 향상 등을 목적으로 하며, 농업인에게 기술 지도와 자문 제공을 규정하고, 농업 생산성 향상과 농촌 생활의 질 개선을 위한 정부 지원과 협력을 명시하였다.
산업금융채권은 1954년부터 한국산업은행이 국가의 기간산업 등에 대한 자금 지원을 목적으로 발행하고 있는 특수 채권이다. 이 채권은 특정 산업 부문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발행되며, 주로 정부, 정부 산하 기관, 또는 금융 기관이 산업 발전을 촉진하고 기업의 자금 조달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한다. 특히, 기업이 대규모 자본을 필요로 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나 인프라 개발에 활용되며, 안정적인 이자율을 제공하는 투자 수단으로 평가된다.
산업금융채권 (産業金融債券)
산업금융채권은 1954년부터 한국산업은행이 국가의 기간산업 등에 대한 자금 지원을 목적으로 발행하고 있는 특수 채권이다. 이 채권은 특정 산업 부문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발행되며, 주로 정부, 정부 산하 기관, 또는 금융 기관이 산업 발전을 촉진하고 기업의 자금 조달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한다. 특히, 기업이 대규모 자본을 필요로 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나 인프라 개발에 활용되며, 안정적인 이자율을 제공하는 투자 수단으로 평가된다.
애국복권은 1951년 대한민국 정부가 「애국복권발행법」을 제정하고 발행했고, 1956년 2월 산업 부흥 자금과 사회복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한 복권이다. 1951년에는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재민 구호를 목적으로, 1956년 서울 환도 후 전쟁복구 자금을 위해 발행되었다. 1951년 1회차 복권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1956년 2회차 복권의 성과는 저조했다. 게다가 조흥은행 직원들의 복권 횡령 사건과 공무원 급료 강제 공제로 인해 논란이 일었고, 결국 2차 애국복권은 10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애국복권 (愛國福券)
애국복권은 1951년 대한민국 정부가 「애국복권발행법」을 제정하고 발행했고, 1956년 2월 산업 부흥 자금과 사회복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한 복권이다. 1951년에는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재민 구호를 목적으로, 1956년 서울 환도 후 전쟁복구 자금을 위해 발행되었다. 1951년 1회차 복권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1956년 2회차 복권의 성과는 저조했다. 게다가 조흥은행 직원들의 복권 횡령 사건과 공무원 급료 강제 공제로 인해 논란이 일었고, 결국 2차 애국복권은 10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조선방직사건은 1951년 4월 귀속재산이었던 조선방직의 경영진이 고의로 불량 소재를 사용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이래, 1952년 3월 조선방직 파업이 종결될 때까지 조선방직회사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이다. 해방 후 일제의 적산 중 최대 방직공장이던 조선방직을 불하받을 유력 인물이 야당 국회의원 김지태였는데, 이승만 정부는 경영진을 구속하고 불하를 취소한 후 이승만의 심복 강일매로 하여금 경영권을 장악하게 하였고, 이에 반발하는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항의를 진압하였다. 그리고 조선방직은 이승만의 정치적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조선방직사건 (朝鮮紡織事件)
조선방직사건은 1951년 4월 귀속재산이었던 조선방직의 경영진이 고의로 불량 소재를 사용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이래, 1952년 3월 조선방직 파업이 종결될 때까지 조선방직회사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이다. 해방 후 일제의 적산 중 최대 방직공장이던 조선방직을 불하받을 유력 인물이 야당 국회의원 김지태였는데, 이승만 정부는 경영진을 구속하고 불하를 취소한 후 이승만의 심복 강일매로 하여금 경영권을 장악하게 하였고, 이에 반발하는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항의를 진압하였다. 그리고 조선방직은 이승만의 정치적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김기범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산청군 생비량면 출신으로 1919년 3월 23일 합천군 삼가면 장날 만세시위에 생비량면 주민들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삼가 시위는 3월 18일 400명의 1차 시위에 이어, 3월 23일 합천군 쌍백면 · 가회면 · 삼가면, 산청군 생비량면 등이 연합하여 2차로 1만 3,000명의 대규모 만세시위로 전개되었다. 김기범은 만세시위에 앞장서다가 일경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김기범 (金箕範)
김기범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산청군 생비량면 출신으로 1919년 3월 23일 합천군 삼가면 장날 만세시위에 생비량면 주민들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삼가 시위는 3월 18일 400명의 1차 시위에 이어, 3월 23일 합천군 쌍백면 · 가회면 · 삼가면, 산청군 생비량면 등이 연합하여 2차로 1만 3,000명의 대규모 만세시위로 전개되었다. 김기범은 만세시위에 앞장서다가 일경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김순이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부산 출신 17세 여성으로, 경상남도 통영에서 유치원 보모로 일하였다. 통영 청년 18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동료 문복숙과 태극기를 만들다가 1919년 3월 14일 새벽에 체포되었다.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부산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건강 악화로 1919년 9월 6일 가출옥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6개월 후에 사망하였다.
김순이 (金順伊)
김순이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부산 출신 17세 여성으로, 경상남도 통영에서 유치원 보모로 일하였다. 통영 청년 18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동료 문복숙과 태극기를 만들다가 1919년 3월 14일 새벽에 체포되었다.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부산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건강 악화로 1919년 9월 6일 가출옥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6개월 후에 사망하였다.
강시만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합천군 대양면 출신이다. 1919년 3월 19일 합천면과 대양면 주민 300여 명이 합천 읍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17명이 구금되었다. 3월 20일 구금자 구출을 위한 시위가 다시 전개되었다. 강시만은 대양면 12인 결사대의 한 사람으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대에 앞장서다가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강시만 (姜時晩)
강시만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합천군 대양면 출신이다. 1919년 3월 19일 합천면과 대양면 주민 300여 명이 합천 읍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17명이 구금되었다. 3월 20일 구금자 구출을 위한 시위가 다시 전개되었다. 강시만은 대양면 12인 결사대의 한 사람으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대에 앞장서다가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공재규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8일, 삼가 장터에서 1차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3일 합천군 쌍백면 주민 4,000여 명과 함께 쌍백면사무소를 방화한 후, 삼가 장터의 합천군 쌍백면 · 가회면 · 삼가면, 산청군 생비량면 등 1만 3000여 명의 연합 시위에 참여하였다. 일본 경찰의 총격에 항의하며 시위대에 앞장서다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공재규 (孔在奎)
공재규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8일, 삼가 장터에서 1차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3일 합천군 쌍백면 주민 4,000여 명과 함께 쌍백면사무소를 방화한 후, 삼가 장터의 합천군 쌍백면 · 가회면 · 삼가면, 산청군 생비량면 등 1만 3000여 명의 연합 시위에 참여하였다. 일본 경찰의 총격에 항의하며 시위대에 앞장서다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낙수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울산군 상등면 출신으로, 1919년 4월 2일 울산군 언양 장날 만세시위는 언양 천도교인과 유림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김낙수는 시위 현장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으며, 시위는 일제의 발포에 투석전으로 맞서는 등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김낙수는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김낙수 (金洛綬)
김낙수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울산군 상등면 출신으로, 1919년 4월 2일 울산군 언양 장날 만세시위는 언양 천도교인과 유림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김낙수는 시위 현장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으며, 시위는 일제의 발포에 투석전으로 맞서는 등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김낙수는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김영기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9일 합천 · 대양 시위대의 합천 읍내 만세시위에서 17명이 구금되자, 3월 20일 구금자 구출을 위하여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대양면에서는 12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합천경찰서로 돌입하였다. 김영기는 12인 결사대의 한 사람으로 시위대에 앞장서다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김영기 (金永琪)
김영기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9일 합천 · 대양 시위대의 합천 읍내 만세시위에서 17명이 구금되자, 3월 20일 구금자 구출을 위하여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대양면에서는 12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합천경찰서로 돌입하였다. 김영기는 12인 결사대의 한 사람으로 시위대에 앞장서다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김호준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합천군 대양면 출신으로 합천 읍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9일 합천면과 대양면 시위대의 합천 읍내 만세시위에서 17명이 구금되자 구금자 구출을 위하여 3월 20일 시위가 다시 전개되었다. 대양면에서는 12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합천경찰서로 돌입하였다. 김호준은 12인 결사대의 한 사람으로 시위대에 앞장서다가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김호준 (金浩俊)
김호준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합천군 대양면 출신으로 합천 읍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9일 합천면과 대양면 시위대의 합천 읍내 만세시위에서 17명이 구금되자 구금자 구출을 위하여 3월 20일 시위가 다시 전개되었다. 대양면에서는 12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합천경찰서로 돌입하였다. 김호준은 12인 결사대의 한 사람으로 시위대에 앞장서다가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박권세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0일 단성면과 신등면 주민들은 30리 거리의 두 면 장터를 돌며 만세시위를 벌이다 29명이 검거되자 3월 21일 다시 만세시위를 벌였다. 신등면 출신의 박권세는 신등면과 단성면 주민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일본 헌병과 대치하다 헌병의 발포로 순국하였다.
박권세 (朴權世)
박권세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0일 단성면과 신등면 주민들은 30리 거리의 두 면 장터를 돌며 만세시위를 벌이다 29명이 검거되자 3월 21일 다시 만세시위를 벌였다. 신등면 출신의 박권세는 신등면과 단성면 주민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일본 헌병과 대치하다 헌병의 발포로 순국하였다.
1919년 3월 5일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남대문역[현 서울역] 광장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운동.
서울역전광장 3·1운동 (서울驛前廣場 三一運動)
1919년 3월 5일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남대문역[현 서울역] 광장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운동.
1919년 3월 30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비석거리에서 2천여 명의 면민이 벌인 독립 만세 시위운동.
시흥군 수암면 3·1운동 (始興郡 秀岩面 三一運動)
1919년 3월 30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비석거리에서 2천여 명의 면민이 벌인 독립 만세 시위운동.
1919년 4월 1일과 4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운동.
안성군 이죽면 3·1운동 (安城郡 二竹面 三一運動)
1919년 4월 1일과 4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운동.
1919년 4월 3일 경기도 수원군[현 화성시] 장안면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운동.
수원군 장안면 3·1운동 (水原郡 長安面 三一運動)
1919년 4월 3일 경기도 수원군[현 화성시] 장안면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