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정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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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창은 조선시대에 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금강 하구 남단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고려시대에 금강 하구에 진성창이 있었는데 왜구의 침략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여 용안의 득성창과 함열의 덕성창을 설치하였다. 1512년 득성창을 폐쇄하고 옥구 군산포에 군산창을 신설하여 전주와 금산, 남원 등 20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용안에 성당창이 신설되면서 군산창의 수세 구역은 전주, 옥구 등 7개 고을로 축소되었다. 19세기에 조세의 금납화로 세곡 운송이 감소하면서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폐지되었다.
군산창 (群山倉)
군산창은 조선시대에 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금강 하구 남단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고려시대에 금강 하구에 진성창이 있었는데 왜구의 침략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여 용안의 득성창과 함열의 덕성창을 설치하였다. 1512년 득성창을 폐쇄하고 옥구 군산포에 군산창을 신설하여 전주와 금산, 남원 등 20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용안에 성당창이 신설되면서 군산창의 수세 구역은 전주, 옥구 등 7개 고을로 축소되었다. 19세기에 조세의 금납화로 세곡 운송이 감소하면서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폐지되었다.
공세곶창은 조선시대에 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공진창, 공세창, 아산창이라고도 부르는데, 『경국대전』에 수록된 조선 전기 전국 9개 조창 중 한 곳이다. 충청도 청주와 천안 등지의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 후기에 면포로 전세를 상납하면서 조창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공세곶창(공진창)은 15세기 후반 이래 아산만 일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조선시대 충청도 서부 권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공세곶창 (貢稅串倉)
공세곶창은 조선시대에 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공진창, 공세창, 아산창이라고도 부르는데, 『경국대전』에 수록된 조선 전기 전국 9개 조창 중 한 곳이다. 충청도 청주와 천안 등지의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 후기에 면포로 전세를 상납하면서 조창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공세곶창(공진창)은 15세기 후반 이래 아산만 일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조선시대 충청도 서부 권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견아상입지는 지방 행정단위 간에 경계선의 굴곡이 심하여, 영역이 서로 얽혀 있는 형태로 행정 경계가 편성된 지역이다. 군현 간의 경계가 마치 개의 이빨이 위 아래로 서로 얽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그 경계가 북두칠성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두입지라고도 한다. 산과 골짜기가 구불구불한 한반도의 지형적 특징에 기인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현재도 몇몇 지역 행정단위에서 존속되고 있는데 인천 계양구 둑실동, 금산군 복수면, 완주군의 상관면과 구이면,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견아상입지 (犬牙相入地)
견아상입지는 지방 행정단위 간에 경계선의 굴곡이 심하여, 영역이 서로 얽혀 있는 형태로 행정 경계가 편성된 지역이다. 군현 간의 경계가 마치 개의 이빨이 위 아래로 서로 얽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그 경계가 북두칠성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두입지라고도 한다. 산과 골짜기가 구불구불한 한반도의 지형적 특징에 기인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현재도 몇몇 지역 행정단위에서 존속되고 있는데 인천 계양구 둑실동, 금산군 복수면, 완주군의 상관면과 구이면,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마산창은 고려 석두창의 후신으로 1403년에 폐지되었다가 1760년 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에 다시 설치되었던 조선시대의 조창이다. 경상도 남부 지역에 설치된 가산창, 삼랑창과 함께 삼조창으로 불렸다. 이 지역의 세금은 지토선과 민간선반으로만 이동하였는데, 운송기간이 길어져 곡식이 손상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창원과 그 주변 함안·칠원·진해·거제 등 8개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세의 금납화로 인해 19세기 말 조운제도가 사실상 폐지되자 마산창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마산창 (馬山倉)
마산창은 고려 석두창의 후신으로 1403년에 폐지되었다가 1760년 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에 다시 설치되었던 조선시대의 조창이다. 경상도 남부 지역에 설치된 가산창, 삼랑창과 함께 삼조창으로 불렸다. 이 지역의 세금은 지토선과 민간선반으로만 이동하였는데, 운송기간이 길어져 곡식이 손상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창원과 그 주변 함안·칠원·진해·거제 등 8개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세의 금납화로 인해 19세기 말 조운제도가 사실상 폐지되자 마산창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조선시대에 현 북한 황해남도 배천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금곡포창 (金谷浦倉)
조선시대에 현 북한 황해남도 배천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경창은 전근대 왕조 국가의 수도에 설치되어, 중앙 정부에서 지출하는 미곡 등 현물 재원을 보관하고 지출하던 국영 창고의 총칭이다. 조운을 통해 거두어들인 조세를 모아서 보관하고 지출한 창고였다. 신라에 좌창과 우창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수도 개경에 좌창, 우창, 용문창, 운흥창, 신흥창이 있었다. 고려의 경창은 담장은 있으나 지붕은 없는 노적창(露積倉)이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경창은 호조 소속의 군자감과 광흥창, 풍저창이다. 이후 중앙 정부의 재정 규모가 확대되고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국영 창고가 증가하였다.
경창 (京倉)
경창은 전근대 왕조 국가의 수도에 설치되어, 중앙 정부에서 지출하는 미곡 등 현물 재원을 보관하고 지출하던 국영 창고의 총칭이다. 조운을 통해 거두어들인 조세를 모아서 보관하고 지출한 창고였다. 신라에 좌창과 우창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수도 개경에 좌창, 우창, 용문창, 운흥창, 신흥창이 있었다. 고려의 경창은 담장은 있으나 지붕은 없는 노적창(露積倉)이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경창은 호조 소속의 군자감과 광흥창, 풍저창이다. 이후 중앙 정부의 재정 규모가 확대되고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국영 창고가 증가하였다.
법성창은 조선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고려시대에 전라도 영광 지역에는 부용창이 있었으나 고려 말기에 폐쇄되었다. 1472년(성종 3)에 법성창이 설치되었다. 1512년 나주 영산창이 폐지되면서 영산창의 담당 지역 세곡도 수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각 고을별로 지토선에 의한 세곡 운송이 늘면서 조창의 필요성이 감소하였다. 19세기 말이 되면 조세의 금납화가 일반화되면서 조운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법성창은 조선 말기까지 기능이 유지된 전라도 남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법성창 (法聖倉)
법성창은 조선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고려시대에 전라도 영광 지역에는 부용창이 있었으나 고려 말기에 폐쇄되었다. 1472년(성종 3)에 법성창이 설치되었다. 1512년 나주 영산창이 폐지되면서 영산창의 담당 지역 세곡도 수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각 고을별로 지토선에 의한 세곡 운송이 늘면서 조창의 필요성이 감소하였다. 19세기 말이 되면 조세의 금납화가 일반화되면서 조운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법성창은 조선 말기까지 기능이 유지된 전라도 남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수참은 조선시대 한강 수계(水系)의 포구에 위치하여 조창의 기능과 목재 등 각종 물품의 운송, 사객(使客)의 이동 보조 등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인원과 선박 등을 배치한 시설이다. 1390년 정몽주의 건의로 설치되어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운영되었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주변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조창과 조운이었다. 목재 운반이나 일본인들의 이동을 보조하는 역할 등 다른 임무도 수행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 선박에 임대하는 임운이 확대되고, 세곡의 납부가 면포나 동전으로 대체되면서 그 기능과 역할이 축소되었다.
수참 (水站)
수참은 조선시대 한강 수계(水系)의 포구에 위치하여 조창의 기능과 목재 등 각종 물품의 운송, 사객(使客)의 이동 보조 등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인원과 선박 등을 배치한 시설이다. 1390년 정몽주의 건의로 설치되어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운영되었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주변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조창과 조운이었다. 목재 운반이나 일본인들의 이동을 보조하는 역할 등 다른 임무도 수행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 선박에 임대하는 임운이 확대되고, 세곡의 납부가 면포나 동전으로 대체되면서 그 기능과 역할이 축소되었다.
고려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부용창 (芙蓉倉)
고려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삼랑창은 1765년 현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창원 마산창, 진주 가산창과 함께 조선 후기 경상도 남부 지역에 설치된 3조창 중 하나이다. 후조창이라고도 불렀다. 경상도 밀양, 김해 등과 그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운선 15척이 편성되었고 각 선박에는 사공 1명, 격군 15명, 조보 32명씩 배정되었다. 수송하는 세곡이 대부분 대동미에 속하였기 때문에 선혜청에서 관리하였다. 19세기 말이 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였고 현재 삼랑창이 있던 자리에는 민가가 들어서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삼랑창 (三浪倉)
삼랑창은 1765년 현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창원 마산창, 진주 가산창과 함께 조선 후기 경상도 남부 지역에 설치된 3조창 중 하나이다. 후조창이라고도 불렀다. 경상도 밀양, 김해 등과 그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운선 15척이 편성되었고 각 선박에는 사공 1명, 격군 15명, 조보 32명씩 배정되었다. 수송하는 세곡이 대부분 대동미에 속하였기 때문에 선혜청에서 관리하였다. 19세기 말이 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였고 현재 삼랑창이 있던 자리에는 민가가 들어서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고려시대에 현 북한 황해남도 룡연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창(漕倉).
안란창 (安瀾倉)
고려시대에 현 북한 황해남도 룡연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창(漕倉).
석두창은 고려시대에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경상도 합포에 설치되어 동남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석두창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고, 다만 창원시 마산합포구 석전동 일대, 마산합포구 산호동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석두창이 있었던 창원 지역은 일본과 가까운 곳이라 왜적의 침략이 심하던 곳이라 고려 후기 이후 석두창이란 명칭은 찾을 수 없다. 조선 건국 직후에 창원 지역에는 마산창이 존재하였다. 마산창은 1403년에 폐지되었다가 1760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석두창 (石頭倉)
석두창은 고려시대에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경상도 합포에 설치되어 동남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석두창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고, 다만 창원시 마산합포구 석전동 일대, 마산합포구 산호동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석두창이 있었던 창원 지역은 일본과 가까운 곳이라 왜적의 침략이 심하던 곳이라 고려 후기 이후 석두창이란 명칭은 찾을 수 없다. 조선 건국 직후에 창원 지역에는 마산창이 존재하였다. 마산창은 1403년에 폐지되었다가 1760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안흥창은 고려시대에 전라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을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안흥창은 부안의 곰소만 연안에 위치하여 전라도 고부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서해안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1척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을 두었다고 한다. 판관이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는데 녹봉이 20석 지급되었다. 안흥창의 폐쇄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말기로 추정된다.
안흥창 (安興倉)
안흥창은 고려시대에 전라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을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안흥창은 부안의 곰소만 연안에 위치하여 전라도 고부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서해안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1척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을 두었다고 한다. 판관이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는데 녹봉이 20석 지급되었다. 안흥창의 폐쇄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말기로 추정된다.
영산창은 조선 초기 현 전라남도 나주시의 영산강변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조선시대에 전국의 주요 지점에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였다. 영산창은 고려시대에 운영된 해릉창의 역할을 계승하여 나주 등 남부 지역 17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조운선으로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조운선 53척이 배치되었으며 세곡 조운을 감독하는 해운판관이 임명되었다. 1512년 험난한 해로에서 해난 사고가 발생하여 세곡이 손실되는 것을 방비한다는 이유로 폐쇄되었고, 그 기능은 영광 법성포창에 통합되었다.
영산창 (榮山倉)
영산창은 조선 초기 현 전라남도 나주시의 영산강변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조선시대에 전국의 주요 지점에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였다. 영산창은 고려시대에 운영된 해릉창의 역할을 계승하여 나주 등 남부 지역 17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조운선으로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조운선 53척이 배치되었으며 세곡 조운을 감독하는 해운판관이 임명되었다. 1512년 험난한 해로에서 해난 사고가 발생하여 세곡이 손실되는 것을 방비한다는 이유로 폐쇄되었고, 그 기능은 영광 법성포창에 통합되었다.
월경지는 군현 등 지방 행정 단위의 소속 영역 중 다른 지방 행정 단위의 영역을 넘어 들어가 위치한 지역이다. 월입지(越入地), 비입지(飛入地), 비월지(飛越地), 비지(飛地)라고도 한다. 후삼국시대부터 나타나 조선시대까지 폭넓게 분포하였다. 전국 각지에 100여 곳 이상 존재하던 월경지는 1906년에 지방 행정구역 개편을 통하여 대부분 소멸되었다. 현대에도 지방 행정구역의 개편 및 조정의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때 발생하거나 유지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이서면이나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다사읍과 하빈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월경지 (越境地)
월경지는 군현 등 지방 행정 단위의 소속 영역 중 다른 지방 행정 단위의 영역을 넘어 들어가 위치한 지역이다. 월입지(越入地), 비입지(飛入地), 비월지(飛越地), 비지(飛地)라고도 한다. 후삼국시대부터 나타나 조선시대까지 폭넓게 분포하였다. 전국 각지에 100여 곳 이상 존재하던 월경지는 1906년에 지방 행정구역 개편을 통하여 대부분 소멸되었다. 현대에도 지방 행정구역의 개편 및 조정의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때 발생하거나 유지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이서면이나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다사읍과 하빈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고려시대에 충청도 서산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양광도(楊廣道) 부성(현 서산) · 홍주(현 홍성) 및 그 주변 지역의 세곡(稅穀)을 모아 개경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 초기에 설치한 전국 12조창 중 하나로, 현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지역에 위치하였다. 창개 혹은 창포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으며, 근래까지도 옛 창고와 관련된 유물들이 주변 일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태안반도 지역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충청도 서부 지역에서 산출되었던 세곡의 경창 운송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창이었다.
영풍창 (永豊倉)
고려시대에 충청도 서산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양광도(楊廣道) 부성(현 서산) · 홍주(현 홍성) 및 그 주변 지역의 세곡(稅穀)을 모아 개경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 초기에 설치한 전국 12조창 중 하나로, 현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지역에 위치하였다. 창개 혹은 창포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으며, 근래까지도 옛 창고와 관련된 유물들이 주변 일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태안반도 지역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충청도 서부 지역에서 산출되었던 세곡의 경창 운송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창이었다.
장흥창은 고려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암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에 설치한 전국 13조창 중 하나로, 영암, 장흥 및 그 속군현의 세곡을 모아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전라도 서남부의 세곡을 모아 서해안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운송용 초마선은 6척을 두었는데 1척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다고 한다. 판관이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고,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라 20석이 지급되었다. 장흥창의 폐쇄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 말기에 폐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흥창 (長興倉)
장흥창은 고려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암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에 설치한 전국 13조창 중 하나로, 영암, 장흥 및 그 속군현의 세곡을 모아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전라도 서남부의 세곡을 모아 서해안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운송용 초마선은 6척을 두었는데 1척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다고 한다. 판관이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고,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라 20석이 지급되었다. 장흥창의 폐쇄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 말기에 폐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운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운을 이용하여 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경창으로 운송하는 제도이다. 전근대시기에 각 지방에서는 조세 명목으로 납부하는 곡물을 조창에서 수납한 다음, 선박에 적재하여 수송운송로를 따라 중앙의 경창으로 운송했다. 산지가 많아 육로운송이 어려워 남서해안의 바닷길과 한강·예성강 등의 수계가 주로 조운에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조세를 면포나 동전 등으로 내는 지역이 확대되면서 세곡 운송의 필요성이 감소하고 화폐 유통 활성화에 따른 조세 금납화 현상이 확대되면서 조운제도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어 19세기 말에 소멸하였다.
조운 (漕運)
조운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운을 이용하여 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경창으로 운송하는 제도이다. 전근대시기에 각 지방에서는 조세 명목으로 납부하는 곡물을 조창에서 수납한 다음, 선박에 적재하여 수송운송로를 따라 중앙의 경창으로 운송했다. 산지가 많아 육로운송이 어려워 남서해안의 바닷길과 한강·예성강 등의 수계가 주로 조운에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조세를 면포나 동전 등으로 내는 지역이 확대되면서 세곡 운송의 필요성이 감소하고 화폐 유통 활성화에 따른 조세 금납화 현상이 확대되면서 조운제도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어 19세기 말에 소멸하였다.
조선시대에 현 북한 황해남도 봉천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조읍포창 (助邑浦倉)
조선시대에 현 북한 황해남도 봉천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진성창은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고려시대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조창을 설치하고 각 지방의 세곡을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금강 하구 연안에 위치한 진성창은 전라도 전주와 임피, 진례 등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하는 판관이 임명되었으며, 1척 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을 배치되었다. 1358년 왜구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폐쇄 또는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1390년에 내륙에 가까운 용안에 득성창이 설치되면서 역할이 크게 위축되었다.
진성창 (鎭成倉)
진성창은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고려시대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조창을 설치하고 각 지방의 세곡을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금강 하구 연안에 위치한 진성창은 전라도 전주와 임피, 진례 등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하는 판관이 임명되었으며, 1척 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을 배치되었다. 1358년 왜구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폐쇄 또는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1390년에 내륙에 가까운 용안에 득성창이 설치되면서 역할이 크게 위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