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백두산 천지
과학기술
개념
화학적으로는 산소와 수소의 결합물이며, 생물이 생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색 · 냄새 · 맛이 없는 액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물은 화학적으로는 산소와 수소의 결합물이며, 생물이 생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색·냄새·맛이 없는 액체이다. 물은 생물체 중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인간의 신체도 체중의 약 3분의 2가 물로 되어 있다. 물 없는 생물의 생존은 생각할 수 없기에 인류 문명도 하천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지구 표면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물은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었다가 다시 응축·집적되어 지표면에 내리는 순환을 거듭하면서 지구상의 기후변화와 지각 변화의 주요인으로 작용한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비가 많은 지역에 속하며 홍수와 가뭄이 자주 발생한다.

정의
화학적으로는 산소와 수소의 결합물이며, 생물이 생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색 · 냄새 · 맛이 없는 액체.
물의 의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Thales)는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 하여 일원설(一元說)을 주장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만물의 근원은 물 · 불 · 공기 · 흙이라고 하는 4원소설(四元素說)을 주장할 정도로 인류는 물의 존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왔다.

생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물질 중에서도 물은 생물체 중량의 70∼80%를 차지하며, 많은 경우에 95% 정도를 차지하는 것도 물은 생물체에 매우 중요한 성분이다.

인간의 신체도 체중의 약 3분의 2가 물로 되어 있다. 인체 내에서의 물은 물질대사에서 생긴 노폐물을 용해시켜서 체외로 배출시키는 역할뿐 아니라, 체내의 갑작스런 온도를 막아 주는 등 여러 가지 기능을 해주고 있어 인간은 생리적으로 물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인류가 원시적인 농업기술과 산업기술을 바탕으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중요한 장소는 큰 하천 유역이었다. 인류 문명이 큰 하천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된 까닭은 인체가 생리적으로 물을 요구한다는 기본적인 필요성 외에도 농경과 산업활동에서 물이 필수불가결한 물질이기 때문이었다.

물은 바닷물 · 강물 · 지하수 · 빗물 · 온천수 · 눈 · 얼음 · 수증기 · 안개 등의 상태로 존재하며, 지구 표면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어 지각이 형성된 이래 지구 표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즉, 바다와 육지에 있는 물이 증발하여 대기 중의 수증기가 되고, 이 수증기가 응축 · 집적되어 구름 · 안개가 되며, 다시 비 · 눈 · 우박 등의 상태로 지표면에 내리는 물의 순환을 통하여 지구 표면의 육지나 섬의 형태를 끊임없이 변화시켜 왔으며, 지구상의 기후 변화를 좌우해 왔다.

이렇듯 인류의 생활과 물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물을 잘 이용하고자 하는 인류의 노력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으며, 물에 관련된 민속신앙과 설화 · 신화가 많이 나온 것도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물의 성질

18세기에 라부아지에(Lavoisier,A.L.)는 근대적인 연소이론(燃素理論)과 원소 개념을 확립하여 물은 원소가 아니고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임을 밝혔다. 그 뒤 돌턴(Dalton,J.)의 원자설에 의해 물은 수소 2원자와 산소 1원자가 결합된 상태로서 분자식은 H₂O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순수한 H₂O는 실험실에서만 만들 수 있으며, 자연상태에서의 물은 항상 극히 미량의 다른 원소를 함유하게 된다.

순수한 물의 경우 무색투명하고 무미 · 무취하다. 물은 고체와 같이 일정한 체적을 가지나 온도에 따라 수축 · 팽창되며, 점성은 온도의 상승에 따라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의 비중은 4℃에서 최대가 된다. 그러나 탁수(濁水)의 비중은 1.01, 해수의 비중은 1.025로 온도와 성분에 따라 비중이 달라진다.

물은 비열이 높아서 다량의 열을 흡수하더라도 자신의 온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이웃하는 물 분자끼리 수소 결합(hydrogen bonds)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수소결합이 형성되거나 끊어질 때 약간의 열에너지가 저장 또는 방출되기 때문에 나타난다.

물은 액체에서 기체로 될 때 다량의 열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고 열전도율 또한 높다. 이러한 물의 성질 때문에 더운 날씨에 땀이 증발되면 시원한 느낌을 갖게 되고 체내에서는 열이 고르게 분포될 수 있다.

물은 1기압 0℃에서 얼음이 되고 100℃에서는 끓어 수증기가 되는데, 물 속에 함유된 다른 성분들의 양에 따라 빙점(氷點)이 0℃보다 낮아지며, 압력의 변화에 따라 비등점(沸騰點)도 달라지게 된다.

압력에 따라 비등점이 달라지는 현상은 흔히 등산할 때 느낄 수 있는데, 기압이 낮은 고산지대에서 밥을 지을 때는 물이 100℃ 이하에서 끓기 때문에 밥이 설익게 되는 현상을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자연현상

물의 순환과 강수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상의 물은 지표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해수(海水)와 3분의 1을 차지하는 육수(陸水)로 구분된다. 지구상의 물은 증발, 증산(蒸散)되어 대기권으로 올라가 응결된 후 다시 지구상으로 낙하한다. 지표에 낙하한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하천이 되며, 일부는 땅속으로 삼투(渗透)하여 지하수가 된다.

하천수는 지표의 요지(凹地)에 괴어 호수를 이루기도 하며 결국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지하수는 지하에 있는 대수층(帶水層) 내를 흐르고 대수층이 지표로 노출된 샘을 통해 지표에 나와 하천수와 합쳐진다.

또 하천수나 호수, 해수들의 표면에서는 증발이 일어나고 증발된 수증기는 대기권으로 되돌아간다. 이렇듯 물은 증발 · 강수 · 유수(流水) · 삼투로써 한없는 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그림 1].

대기권에 포함되어 있던 수분이 응결되어 비 · 눈 · 우박 · 이슬 · 서리 등 여러 형태로 지상에 떨어지는 현상을 강수라고 하는데, 그 중 대부분은 비나 눈으로 내린다.

강수량의 많고 적음은 기상학적 요인이나 지리적 요인, 또는 지역에 따라 달라서 기온과 더불어 생물, 특히 식물의 생태계에 큰 차이를 보여준다. 따라서 물은 인류의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일찍부터 비에 대한 관측이 시도되었다.

우리나라에서 1441년(세종 23)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비를 관측한 것은 세계 기상관측상 최초의 일이다. 또 수표(水標)를 세워 청계천한강의 수위를 관측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우량 및 수위 관측은 유럽보다 약 200년, 일본보다 약 280년 앞선 일로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진 과학문화의 하나이다.

그 당시 관상감(觀象監)의 관측적도는 『서운관지(書雲觀志)』에 기록되어 남아 있고, 관상감의 천문 · 기상관측에 대한 기록은 『풍운기(風雲記)』 등 많은 사료에 남아 있다. 이들 조선시대의 관측치와 근대 관측치를 연결시키면 서울은 약 200여년 간의 장기 우량 관측기록을 갖게 되어 세계 어느 국가나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연평균 강수량은 500∼1,500㎜ 정도이며, 대부분의 지역이 800∼1,000㎜로 세계의 평균치와 비교해 볼 때 비교적 비가 많은 지역에 속한다. 또 물이 손실되는 삼투와 증발을 고려한 물 수지(water budget)나 건습도(乾濕度)를 보아도 식물 성장에 부족이 없는 습윤한 기후이다. 우리나라 강수의 특색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계절적으로 여름에 많은 비가 온다. 여름 3개월의 강수량은 연강수량의 50∼65%에 달하는데, 그 중 7월 장마철의 강수량이 28%에 달한다. 겨울은 건조한 계절로 비가 적고, 봄 · 가을도 비교적 강수량이 적다. 특히 봄이나 초여름의 강우의 부족은 가뭄현상을 일으켜 농업에 많은 피해를 주고 있다.

② 우리나라의 비는 단시간에 많은 양이 쏟아지는 호우(豪雨)이다. 마치 열대의 스콜과 같은 소나기로 짧은 시간에 집중 호우가 내린다. 1일 강우량 100∼150㎜ 이상이 되기도 하고, 1시간에 100㎜에 가까운 비가 내리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연평균 강수량과 비교해 볼 때 하루나 한 시간에 연강수량의 10% 내외에 해당하는 비가 오는 셈이다.

③ 해마다 강수량이 변화가 심하다. 즉, 연평균 강수량에 대한 매해의 편차가 크다. 서울의 경우 1950∼1980년까지 30년간의 연평균 강수량은 1,364㎜인데, 이 기간 중 최다우년(最多雨年)은 1966년 2,018㎜였고, 최소우년(最少雨年)은 1973년 928㎜였다.

④ 강수량의 지역 차가 심하여 다우지와 소우지를 구별할 수 있다. 다우지는 연강수량 1,300㎜가 넘는 제주도, 남해안 및 섬진강 유역, 임진강, 한강 중상류, 청천강 중상류, 중부동해안, 울릉도 등이고, 최다우지는 서귀포로 연강수량 1,718.2㎜에 달한다. 소우지는 900㎜ 내외의 대구분지 일대, 800㎜ 내외의 대동강 하류, 600㎜ 내외의 개마고원 일대 등이고, 남한의 최소우지는 최근 30년 간의 평균으로 볼 때 26개 측후소 중 1,005.3㎜인 대구로 지적된다. 분실의 관측치를 넣으면 대구보다 더 비가 적은 지역이 대구 주변에 있다.

이와 같은 우리나라 강수의 특색은 가뭄과 홍수를 빈발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어, 하천 관리 · 홍수 조절 · 관개수리(灌漑水利) 등 국토 보존의 과제가 되고 있다.

하천

빗물이 땅에 떨어지면 넓게 포상(布狀)으로 흘러 낮은 곳으로 모인다. 높은 산지를 분수령으로 하여 낮은 곳에 모여 세류(細流)가 되고, 이것들이 합쳐져서 분류(分流)를 이루며, 또 합쳐져서 지류가 되고 마침내는 큰 본류에 흘러들어 하나의 하계(河系) 또는 수계(水系)를 이룬다. 한 하계가 흐르는 범위를 유역이라 하여 하계망(河系網)의 모양은 지형에 따라 여러 가지를 이룬다.

우리나라의 하천은 분수령이 되는 태백산맥과 함경산맥이 동해 쪽으로 치우쳐 있고 서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대부분의 하천이 황해와 남해로 흐른다. 서남사면은 하계망이 발달하여 하천 밀도가 높고 길며, 유역 면적이 넓은 몇 개의 수계가 발달되어 있다. 반면에, 동해사면은 하계망의 발달이 낮고 짧은 하천들이다.

우리나라 하천의 수문학적 특색은 유출량(流出量)과 하상계수(河狀係數)가 큰 점이다. 강수량의 약 55%가 하천에 의해 유출되고, 그 중 37%는 홍수시의 유출량이며, 18%가 평상시의 유출량이다. 이는 지상에 내린 물의 대부분이 홍수 때 하천수로 유출되는 것을 보여준다.

또 최대 유출량과 최소 유출량의 비율인 하상계수는 한강 90, 낙동강 260, 금강 190, 섬진강 270 등으로 라인강(14), 템스강(8), 나일강(30) 등에 비하면 대단히 높은데, 하상계수가 높은 것은 유출량의 변화가 심한 것을 의미한다. 증수기는 홍수위(洪水位)를 나타내고 감수기는 갈수위(渴水位)를 나타낸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하천이 유출률이 크고 하상계수가 큰 원인은 증발 · 강수 등의 기상적 요인에다 삼투성을 지배하는 지질적 요인, 하상(河床)의 경사를 결정하는 지형적 요인, 지표를 덮는 식생(植生), 토지의 이용 등 자연 및 인문적 요인에 의한다.

특히 기상적 요인과 남벌로 인한 삼림 파괴 등이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하곡(河谷)이 넓고 퇴적이 왕성한 노년기 하천의 특색 때문에 점차 하상이 높아져 홍수 때는 쉽게 범람한다.

그러나 최근 댐의 건설로 홍수 통제 · 수력발전 · 관개 · 관광 · 수운과 공업 및 생활용수 공급 등 하천의 다목적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극대화된 하천을 이용하는 데서 오는 하천 오염에 대한 환경보호 문제도 새로운 과제로 제시되었다.

유수의 작용

지표면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작용에는 지각운동, 화산작용과 같은 내적 영력과 지구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외적 영력이 있다. 외적 영력에는 대기 · 물 · 얼음 등이 있으나 우리나라와 같이 비가 많아 항상 하천이 흐르고 있는 습윤기후에서는 주로 하천의 작용을 받아 지표면이 변모해 간다.

물은 외적 영력으로 풍화 · 침식 · 퇴적 작용을 한다. 따라서 산화 · 용해 등의 화학적 풍화와 기계적 풍화를 통해 단단한 지표의 암석을 분해 · 붕괴시켜 토양으로 만들어 간다.

우리나라에 넓게 분포하는 화강암은 풍화되어 사질토양이 되고, 변성암류는 풍화되어 붉은 점토성 토양을 만든다. 유수는 지표를 침식하고 침식한 물질을 운반하고 퇴적한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습윤한 기후 아래 유수의 작용을 받아 산지는 깎여서 낮아지고 둥근 구릉과 거의 평야에 가까운 준평원(準平原)이 발달하는 노년기 지형이 태백산맥 서쪽 황해 사면에 전개되고 있다.

하곡은 넓고, 퇴적물이 쌓인 얕은 곳을 하천이 이리저리로 곡류한다. 산록에는 부채꼴 모양의 선상지(扇狀地)가 발달하고, 하천 바닥은 높아져서 천정천(天井川)을 이룬다.

한강과 같이 하류에 퇴적이 심하면 잠실 · 여의도 · 난지도와 같은 모래섬인 하중도(河中島)가 발달하기도 한다. 강안(江岸)에는 유수가 침식하여 절벽을 이루는 공격사면이, 그 반대편에는 넓은 모래가 쌓인 퇴적사면이 발달하며, 낙동강 하구에서와 같이 삼각주가 퇴적되기도 한다.

한반도의 척량산맥인 태백산맥은 동쪽으로 치우쳐 남북으로 뻗어 있어 동북부는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지질시대에 일어난 지각운동은 동북부를 높은 산지로 만들고, 하천의 침식력도 회춘(回春)하여 침식작용에 의한 여러 지형을 형성하였다.

하천 중상류에는 많은 침식분지를 만들어 춘천 · 충주 · 청주 · 남원 · 안동 · 대구와 같은 도시를 발달시켰다. 준평원이 융기하여 높은 곳에 평단면(平壇面)을 이룬 것이 고위평단면인데, 대관령 일대와 같이 고랭지(高冷地)농업 · 목축 · 관광 · 위락산업의 중심이 되고 있다.

동부의 산지나 하천의 상류는 하상 경사가 급하여 주로 침식지형이 발달한다. 험한 산봉과 좁고 깊은 하곡에는 폭포나 급단(急湍) · 구혈(甌穴) 등이 발달하여 맑은 산수와 어울려 경승지를 이룬다. 석회암지대의 물은 지표를 용식하는 동시에 지하에 단양 고수굴, 영월 고씨굴, 울진 성류굴과 같은 석회동(石灰洞)을 만들어 주요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재해

물의 재해는 주로 홍수와 가뭄인데, 우리나라 강수의 특색은 홍수와 가뭄을 자주 발생시키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상 이변은 지구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되풀이되어 왔다.

역사적 기록에 의한 재해의 실태를 보면 삼국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삼국사기』에 보면 홍수를 대수(大水) · 대우(大雨)로 표시하기도 하고, 수일(水溢) · 수닉(水溺) · 수폭(水瀑) 등으로도 기록하고 있다. 눈은 설(雪) · 대설(大雪)로 나누어 구분하고, 이미 이때부터 적설량은 척(尺)으로 나타내고 있다.

『삼국사기』 본기에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준 수해나 설해를 보면 수해가 41회, 설해가 11회이다.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해는 589년(진평왕 11) 관서(關西)의 대우로 가옥 3만360호가 물에 잠겼고, 죽은 사람이 200여 명에 달하였다. 또 652년(진덕왕 6) 봄 대설에는 서울에 큰 눈이 내려 왕궁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던 일도 있었다.

가뭄에 대해서는 한(旱) · 대한(大旱) · 불우(不雨)로 구분했는데 총 109회가 있었다. 그 중 한이 64회, 대한이 28회, 불우 17회로 홍수나 가뭄 뒤에는 기근이 뒤따랐으며, 그 굶주림의 상태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기근의 총 횟수는 63회인데, 그 중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43회, 비로 인한 기근이 12회에 달하였다. 심한 흉년에는 자식을 팔았고, 서로 잡아먹는 일도 있었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고려사』 「오행지(五行志)」, 조선시대『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료에서 재해기록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측우기에 의한 강수량 관측치나 수표에 의한 수위 관측치는 조선시대 후기의 강수나 재해를 더욱 상세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고문헌을 정리한 『조선고대관측조사보고』(조선총독부, 1917)에서는 176회에 걸친 한양의 출수(出水)가 자세하게 보고되어 있다.

현대식 기상관측이 시작된 1904년부터 1985년까지 발생한 한해와 수해를 보면, 가뭄(1개월 이상 무강수)은 53회로 연평균 0.6회이며, 수해는 호우(일강수량 80㎜ 이상)가 348회로 연평균 4.2회이다.

또 수해는 태풍과 수반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기간에 우리나라를 통과 또는 500㎞ 이내로 접근했던 것은 143회로 연평균 발생수는 1.7회이다. 또 폭설(새로 쌓인 눈 10㎝ 이상)은 161회로 연평균 발생수는 2.0회였다.

대표적인 수해로서 1919년 9월 기미년 홍수, 1925년 을축년 홍수, 1936년 병자년 홍수는 20세기 초반의 기록적인 대수해였다. 최근 30년 동안 있었던 수해도 대부분이 태풍에 수반된 강풍과 다우에 의한 풍수해가 대부분이었다. 풍수해가 컸던 해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1959년 태풍 사라호(Sarah號)에 의한 풍수해

② 1960년 태풍 카멘호(Carmen號)에 의한 풍수해

③ 1962년 1월 동해안의 해일 및 8월의 저기압에 의한 순천 일대의 집중호우, 태풍 노라호(Nora號)에 의한 풍수해

④ 1963년 태풍 설리호(Shirley號)에 의한 풍수해

⑤ 1964년 태풍 플로시(Flossie) · 헬렌호(Helen號)에 의한 풍수해

⑥ 1967년 집중호우에 의한 중부 수해

⑦ 1968년 폴리호(Polly號) 태풍 및 호우

⑧ 1969년 영동지방 폭설, 여름 전국적 호우

⑨ 1970년 태풍 올가(Olga) · 빌리호(Billie號)에 의한 풍수해

⑩ 1977년 안양 · 시흥지구의 수해

⑪ 1979년 중부지방 호우 및 태풍 어빙(Irving) · 주디호(Judy號)의 풍수해

⑫ 1981년 태풍 애그니스(Agnes), 1982년 태풍 세실호(Cecil號)에 의한 풍수해

⑬ 1984년 9월 전선성(前線性) 강우에 의한 중부지방의 홍수

⑭ 1998년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 및 중부지방의 국지성 호우(게릴라성 호우)에 의한 홍수

⑮ 1999년의 중부지방의 국지성 호우에 의한 홍수

이 중 최근에 가장 컸던 수해로 1984년 9월 1일에 내린 비는 여러 가지 신기록을 남겼다. 특히 수도 서울의 피해가 심했고, 한강수계 홍수 조절에 대한 재검토와 서울의 수방(水防)시설에 대한 재검토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이때 한강 수위는 1925년 을축년에 있었던 홍수 이래 세 번째로 높은 11.03m에 달하여 위험 수위를 넘었다.

또한 1998년 및 1999년의 게릴라성 집중호우에 의한 국지적 대홍수는 홍수 조절 기능이 없는 중소 하천의 홍수 피해와 도시 하천 유역의 홍수 피해가 더욱 증가함을 보여주었으며,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함을 보여주고 있다. 가뭄은 봄과 여름에 많이 발생하고 있으나 관개시설이 발달한 오늘날 어느 정도 그 피해를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뭄 피해가 심각하게 느껴지는 때는 벼농사철인 여름(6∼8월)이다. 지역적으로는 호남 남서해안지방, 대구 · 안동 등 경상북도 내륙지방이 한해가 자주 일어나고 연도별로는 1939년, 1977년, 1982년의 3대 가뭄을 들 수 있다. 이 해 여름 강수량이 평년치의 반이 못 되었다.

이용

우리나라의 수자원

우리나라에는 연중 1,274㎜의 비가 내리고 있으며 월평균 강우량은 96.9㎜이다. 강우량은 주로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간에 집중되고 있어 건기(乾期)와 우기(雨期)가 뚜렷하다. 그러므로 우기는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 피해가 심하고 건기는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매년 겪고 있다[그림 2].

우리나라 수자원 부존량을 살펴보면, 국토 면적 9만9000㎢, 연평균 강우량 1,274㎜로 계산할 때 연간 총 1,267억㎥이다. 이 가운데 45%에 해당되는 570억㎥가 증발로 손실되어 하천 유출은 55%인 697억㎥이며, 총 수유출과 비이용수량을 제외한 실제 이용수량은 301억㎥에 불과하다.

총 하천유출량 697억㎥의 약 67%인 467억㎥가 홍수로 유하(流下)하고 있으며, 평상시 유하량은 33%인 230억㎥에 불과하다. 평상시 유하량 가운데 103억㎥가 댐 등에 의해 이용되고 있으며 172억㎥는 자연상태에서 이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수자원 이용 현황을 도시하면 [그림 3]과 같다. 이들 이용수의 구성을 보면, 하천유지용수 21%, 농업용수 50%, 공업용수 8%, 생활용수 21%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생활용수

생활용수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음료 · 요리 · 세탁 · 목욕 등 가정생활에 이용되는 물로, 수질면에서는 음료 및 요리와 같이 인체에 직접 섭취되는 것과 세탁 · 목욕과 같이 간접적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생활용수는 병원균과 인체에 유독한 성분이 포함되지 않아야 하며, 물리적 성질로는 색 · 냄새 · 맛 등이 불량하여 불쾌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

물은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원이므로, 그 사용량은 문화의 척도라고도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인간은 물을 찾아서 하천 연변에 정착하고 취락을 형성하여 하천이나 호수의 물을 생활용수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문화가 발달하면서 물의 용도는 생활용수에 그치지 않고, 환경정화용수나 소화용수(消火用水) 등으로 인간생활의 많은 분야에서 그 수요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그 수량은 62억㎥로서 총 이용수량의 21%를 차지하고 있다.

농업용수

물과 토지는 인간 생활의 기반임과 동시에 천연의 자원이기도 하다. 토지가 그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만 한다. 그 때문에 수자원의 개발 및 보존과 토지 이용의 개발 및 보존과는 분리될 수 없는 상태로서 물과 토지의 종합적인 개발이 이루어져 왔다.

농업기반조성사업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국토 면적(남한) 9만9000㎢ 가운데서 22%에 해당하는 2만1800㎢가 농경지이고, 66%인 6만5500㎢가 임야이며, 나머지의 12%가 1만1700㎢로서 도로 · 하천 · 택지 등이다.

농경지 가운데 1만3000㎢가 논으로 총 농경지 면적의 59.6%를 차지하고 있으며, 밭이 8,800㎢로 40.4%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농경지에 이용되는 농업용수는 연간 149억㎥로 총 이용수량의 50%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용수는 간척사업으로 인한 농지의 확장과 전작(田作)의 관개화 등으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업용수, 수질오염 및 대책

도시가 발달하고 문화 수준이 향상되면서 주거지역과 공업지역이 분리되고, 공업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생산활동에 필요한 공업용수가 생활용수와는 별개로 취급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1960년대 후반부터 치중하기 시작한 공업화정책으로 전국에 많은 공업단지들을 조성했는데, 그 예로 반월 · 구미 · 울산 · 포항 · 창원 · 마산 등이 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대한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서 전용 용수시설을 건설했거나 계획하고 있으며, 일반 도시에서도 생활용수원과 달리 별도의 공업용수 전용 수도를 건설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공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26억㎥로 총 이용수량의 8% 정도에 불과하나, 우리나라가 계속 공업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어 그 수요는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로 사용된 뒤 하천으로 배수되는 생활하수 및 산업폐수는 공중위생상 위험한 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재사용이 불가능하게 된다.

인구가 밀집한 지역 또는 공업단지에서 배출되고 있는 생활하수와 산업폐수는 하천 오염원으로서 그 대책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물의 이용도가 증가함에 따라 하천의 오탁량(汚濁量)이 증가하게 되고, 하천의 유량은 감소하게 되며, 이로 인하여 하천수질의 오염 농도는 허용 한계 이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오물의 처리와 폐기에 의해서 오염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오물의 처리 및 폐기만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고 허용 기준치 이하로 희석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물을 공급해야 한다.

따라서 수질오염의 방지대책으로 각 공장에 처리시설을 두도록 행정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주요 도시 및 공단 내에는 하수종말처리장을 설치하여 오물 처리와 폐기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갈수시(渴水時)에 하천 유수량이 적을 경우 하천 수질이 악화되어 처리시설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각 주요 하천의 지점마다 수질 기준을 설정하고 이에 대한 감시와 아울러 하천 상류부에 저수지나 댐 등을 이용하여 하천유지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이 하천유지용수는 연간 64억㎥로서 총 이용수량의 21%를 차지하고 있다.

동력원

오늘날 동력원으로는 석탄 · 석유 · 수력 및 원자력을 이용한 에너지원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화력발전은 석탄이나 원유의 공급에 한도가 있고, 원자력발전은 그 시설 단가와 기술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은 실정이다.

또한 태양열 · 조력(潮力) · 지열(地熱) · 풍력(風力)은 그 자원으로서의 가치는 영구적이나, 이것을 실용화하는 것은 장래 문제이다. 따라서 수력을 이용한 동력의 개발은 물의 이용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매우 유리한 동력원이라고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수력을 이용한 최초의 방법은 나무로 만든 수차(水車)를 하천이나 운하의 유수에 의해서 이용해 왔으므로 규모가 적고 수력도 소량이었다. 그러나 철제 수차의 발명과 전력 수송의 장거리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수력은 동력원으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수력 발전은 용수 공급을 위한 댐에서 방류되는 물을 이용하여 발전을 하게 되므로, 자원의 다목적 이용의 효과와 수문 순환 과정에서 오는 수자원의 무한한 재이용 측면에서 다른 동력원에 비해 경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수

지하수는 지표면하의 모든 공극(空隙)에 차 있는 물로서 지층구조에 따라 서로 다르나 대체로 실트(silt)나 점토인 경우 50∼70%, 모래인 경우 30∼40%, 잔 자갈층은 25∼30%, 굵은 자갈층은 20∼25%의 공극을 가지고 있으며, 자갈층보다는 실트나 점토층이 많은 공극을 가지고 있어서 다량의 지하수를 갖게 된다.

그러나 지하수의 대부분은 샘(spring)이나 우물에서 용출해 나오는 가용지하수(可用地下水)가 아니다. 즉, 실트나 점토에서는 그 구성 물질에 부착되어 있는 비가용 지하수가 많다. 이것은 수리학상으로 지하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현실적으로 개발의 대상이 되는 지하수는 아니다.

따라서 가용 지하수는 실트나 점토의 경우 몇 % 정도에 지나지 않거나 거의 없다. 자갈의 경우 20∼25%의 공극 내에 있는 물 중에서 15∼20% 이상이 가용 지하수가 되며, 모래는 그 중간 정도이다.

지하수 개발기술의 발전 및 보급으로 농업용수뿐만 아니라 생활용수나 공업용수까지도 지하수를 개발하여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농업용수에서도 답작(畓作)뿐만 아니라 채소나 과수 등을 재배하기 위한 용수도 지하수를 개발하여 이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지하수 이용량은 약 26억㎥로 총 수자원량의 2%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하수의 이용률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치수사업

물은 인간 생활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홍수재해의 원인으로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치수(治水)와 이수(利水)를 고려한 균형있는 하천관리를 하는 것이 필요하나 현실면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다.

우리나라는 좁은 국토에다 인구 조밀, 68%가 산지로 되어 있어 우리 국민이 영위할 곳은 하천 주변의 충적평야뿐이다. 앞으로도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의 압력을 흡수할 터전 역시 이 충적평야이다. 이와 같은 충적지는 대체로 홍수 범람 예정지이고 그 이용 가치가 높다는 점에서 인구와 자산이 집적되고 있다.

다목적댐이나 대제방(大堤防) · 유수지(遊水池) · 배수펌프장이 건설되면 유역 주민은 안심하고 수해에 대한 걱정을 잊게 마련이다. 따라서 수해 피해를 극소화시키고자 한다면 하천수계 전체로서 댐 상 · 하류, 유역과 하천 사이의 상호 대립이나 모순을 초월해서 각 주체가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는 종합치수체계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문화와 물

인류 문명을 되돌아보면 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명의 발상지가 물의 근원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으며, 고대 도시의 멸망도 물 공급의 중단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력사회로 불려 온 우리나라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다우지역에 속해서 미작농업(米作農業)이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30년(다루왕 3)에 도작(稻作:벼농사)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 “흘해이사금 이십일년 시개벽골지 안장일천팔백보(訖解尼師今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라고 기록된 330년(신라 흘해왕 21)에 축조한 김제(金堤)의 벽골지(碧骨池)는 우리나라 최고의 저수지이다.

이밖에 삼국시대에 축조된 저수지로는 청제(菁堤) · 시제(矢堤) · 의림지(義林池) · 대제지(大堤池) · 수산제(守山堤)공검지(恭儉池) 등이 있다. 그리고 유지(溜池)의 설계법은 그 양식이 일정했고, 월류제(越流堤)나 취수관(取水管) 등이 이때 벌써 보급되었으며, 우리의 농업 토목기술이 백제신라시대 일본에 전래되었다.

광복 이후 물에 대한 문제는 수자원종합개발을 중심으로 1980년대까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왔다. 광복 후 초기는 군정시대6 · 25전쟁으로 별 진전이 없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따라 수자원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됨으로써 이 분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66년부터 1975년까지를 계획기간으로 하는 수자원종합개발10개년계획은 1965년 물을 자원으로 종합적인 개발을 해야 한다는 최초의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서 물은 자유재로부터 경제재의 개념으로 변환되었으며, 현대적인 기법에 의해 우리나라 수자원의 수지(收支, water budget)를 수립하였다.

이 계획과 병행하여 1차로 한강유역합동조사단이 구성되어 1965년 10월부터 본격적인 유역조사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한강유역조사에 미국인 기술자가 직접 참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물에 관한 기술은 외국의 선진기법을 직접 도입하여 일본의 기술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한강유역조사에 힘을 얻은 정부는 국제연합개발계획(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 UNDP) 자금에 의해 낙동강유역조사단을 구성하여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약 8년여에 걸쳐 낙동강유역조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3대 강 중의 하나인 금강 유역에 대해서는 한국수자원개발공사에 의해 1968년부터 1972년에 이르기까지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3대 유역의 조사로써 전 국토의 60% 이상이 조사되었으며, 이 조사사업의 결과로 실질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소양댐 건설이 시작되었다.

또 이의 준공과 더불어 낙동강 유역의 안동댐, 금강 유역의 대청댐, 남한강 유역의 충주댐이 건설되었으며, 이어서 낙동강 유역의 임하댐합천댐, 섬진강 유역의 섬진강댐주암댐, 낙동강 · 금강을 비롯한 하구둑들이 건설되었고, 한강종합개발과 더불어 우리의 문화는 수자원의 개발과 그 이용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다. 즉, 물의 효율적인 관리와 선용이 우리의 문화를 더욱 건실하게 만들 왔다.

오늘날 물은 국가 · 사회 · 문화를 이룩하는 동맥으로서 인간 문명 발상의 근간을 이루어 온 모체이며, 실로 우리나라 문화의 구심체로서 그 기능을 다할 것이다.

설화 · 제례 · 민속신앙 · 문학에서 나타나는 물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적 믿음에서 ‘물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은 물의 물리적 · 지리적 위상(位相)에 관한 물음이 아니고 정신적 · 정서적 위상에 관한 물음이다.

즉, 우리의 정신과 감정 속에서 물이 차지하는 위치 · 기능 · 의미 등에 관한 질문이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갖게 된 물의 원형성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게 될 것이고, 물의 의미를 캐는 일이 때로는 심층심리의 바닥까지 깊이 캐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문학작품을 통한 물의 해석에까지 관여하게 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물의 원형성의 유래

우리는 오랜 농경생활, 특히 수도경작의 비중이 매우 높은 농경생활을 영위해 온 만큼 물이 생활에서 갖는 기능과 가치는 매우 높았다. 그러나 수도경작 위주의 농경생활이 물신앙을 성립시키는 유일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물을 생명력과 풍요의 원리로 여기는 일이 농경생활을 맞아 비로소 생겨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은 농경생활을 넘어선 차원에서도 그 생명력과 풍요의 원리를 향유하고 있었으되, 다만 농경생활의 역사에 의해서 그러한 물의 속성이 더욱 보완되고 증강되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시베리아 원주민과 일본 신화 등 적지 않은 세계 신화들이 물을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들의 첫 모태로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풍요와 생명의 원리로서 물이 갖는 원형성이 농경생활을 넘어서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베포도업침’이라고 일컬어지는 제주도 천지개벽 신화의 첫머리인 “삼경개문도업(三更開門都業) 제일릅긴, 요 하늘엔 하늘로 청이슬 땅으로 흑이슬 중앙 황이슬 나려 합수(合水)될 때, 천지인황(天地人皇) 도업으로 제이르자.”에서 보면, 우주적인 이슬기운이 모여서 된 합수를 개벽의 계기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천지개벽의 계기가 된 물을 ‘원수(源水)’라고 하거니와, 이 원수의 관념을 농경생활에 일방적으로 묶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한국인이 가꾸어 온 물의 원형성은 이와 같은 신화적 원수의 관념과 농경생활에 관련된 풍요 · 생명력의 원리가 상호작용을 끼치면서 복합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신화적 원수와 물의 왕비들

천지개벽, 즉 창세기적인 원수 관념은 후세의 각종 홍수전승 및 부인네들이 꾸는 물의 태몽들에 그 자취를 남겼고, 그 자취는 다시 강이나 바다를 죽음과 재생의 상징으로 형상화하는 시 작품들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고구려 「동명왕신화」에서는 동명왕의 모비인 유화(柳花)가 웅심연이라는 물 출신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신라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閼英)알영정이라는 물 출신인 것과 마찬가지이며, 고려왕조의 여시조인 용녀 또한 개성대정(開城大井)과 맺어진 물의 여인으로 되어 있다. 유화 · 알영 · 용녀는 한결같이 ‘물의 왕비’ 내지 ‘물의 여시조’라는 성격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이들 세 왕비 가운데 유화와 알영을 각기 ‘하늘의 남성’ 또는 ‘하늘의 남신’이었던 해모수 · 박혁거세와 대비시켜 보면, 하늘:물=남성왕(시조):왕비(여시조)라는 등식관계를 설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물이 여성 시조와 맺어질 때 물의 원수성은 매우 뚜렷해진다.

물의 왕비들이 물이 지닌 풍요와 생명의 원리 그 자체의 형상화 내지 인간적 구현이라면 그들을 ‘물할미’, 곧 수고(水姑)들과 같은 선에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른바 ‘약수신앙(藥水信仰)’을 바치던 샘이나 우물의 지배자라고 믿은 물의 여신이 다름아닌 ‘물할미’이거니와, 이 ‘물할미’를 ‘물의 왕비’ 또는 ‘물의 여시조’의 원형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물이 남성으로 표상되는 사례를 민속신앙에서 찾아보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로, 산(山)의 성이 남성과 여성 사이를 넘나드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여산신의 경우는, 가령 가야정견모주(正見母主)나 신라의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의 경우가 그렇듯이, 여산신이 나라의 시조모(始祖母)를 겸하고 있다.

반면에 물할미가 곧 나라의 시조로 관념화된 사례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산모신(山母神), 곧 산할미와 나라의 여시조가 겹쳐지는 사례를 좇아서, 알영 · 유화 · 용녀가 나라의 시조모이자 물할미였을 가능성은 생각해 볼 만한 것이다.

생명의 원리를 간직한 우물로서 신앙화된 사례는 후대의 전승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는데, 광명사정(廣明寺井) · 달애정(炟艾井) · 양릉정(陽陵井)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물의 제례(祭禮)

물이 지닌 풍요와 생명력의 원리가 ‘물의 여시조’, ‘물할미’ 등의 관념을 낳을 수 있다면, 물은 성역(聖域)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고려의 물할미라고 볼 만한 용녀와 관계된 개성대정은 신정(神井)으로 일컬어져 정사(井祠)까지 갖추고 있었다. 강하(江河)나 천정(泉井), 바다 등 물에 바치는 제례에 대한 기록은 적어도 삼국시대에서부터 나타난다.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에 보면, 고구려의 제례로서 “언제나 삼월삼질이면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였으되, 사냥한 사슴과 돼지를 하늘과 산천에 제사 올렸다.”라는 기록이 있고, 신라의 제례로는 “삼산오악(三山五嶽)과 그 밖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나누어서 대중소(大中小)의 제사를 올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로부터 고구려 · 신라에서는 이미 하천제(河川祭)를 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신라의 경우 동해 · 서해 · 남해 · 북해의 사해(四海)와 동독인 토지하(土只河), 남독인 황산하(黃山河), 서독인 웅천하(熊川河), 북독인 한산하(漢山河)의 4독(四瀆), 즉 4강(江)에 중사(中祀)를 올리고 오악과 같은 서열로 중요한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 왔다. 이들에게 바치는 제례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정기적 제례였다.

국가에서 드리는 부정기적인 제례로서 가뭄이 드는 따위의 비상시에 임시로 강하에 바치는 제례의 기우제가 있었는데, 왕이 직접 행하는 기우제는 강하뿐 아니라 연못 따위에서도 행해졌다. 이 밖에도 산과 강에 드리는 제례로는 메뚜기를 물리치기 위한 양황제(禳蝗祭)나 애기빌이 곧 기자(祈子)를 위한 제사가 있었다.

산천에 대하여 국가적 규모로 올리는 제례는 고려시대에 전승된다. 『고려사』 권2 태조 26년 4월의 기록에, “팔관(八關)은 하늘의 신령과 명산대천과 동신을 섬기기 위함이다.”라고 한 바와 같이, 고려에서 행해지던 대규모의 국가적 종교행사인 팔관회가 부분적으로는 하천과 용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도교의 초례(醮禮)를 위해서도 대궐 뜰에서 산과 함께 하천에도 제사를 드렸는데 이 초례는 기우 · 기설(눈밀이) · 기양(祈禳:재변을 물리침) · 기곡(祈穀) · 기복(祈福) 등을 위해서 올려진 만큼 하천은 빈번하게 국가적인 제례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사』에 “해독(海瀆) 산천(山川)의 신들에게 각기 훈호(勳號)를 더하다.”라는 기록이 많이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나 왕이 행차를 해서 특정의 산과 내를 지나갔을 경우에 시행되었던 일로, 산과 하천에 벼슬을 주거나 더하여 하천에 대한 공경심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려에는 이 밖에도 합굴룡사(蛤窟龍祠) · 오룡묘(五龍廟)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기 바다의 바위굴과 섬에 모셔진 용신이었던 만큼 고려시대에 섬긴 용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태종실록』 권28 태종 13년 6월 을묘의 기록에는 “본조(本朝)에서는 전조(前朝)의 제도를 이어받아서 산천에 올리는 제사의 등급을 나누지 않았으니, 나라 안의 명산 · 대천 및 여러 산천을 옛날 제도에 의거해서 등급을 나누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본을 따르면서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산천에 제사를 드리고 제사에 등급을 매기려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 결과 남 · 동 · 서해의 3해와 한강, 경기도의 덕진(德津), 충청도의 웅진(熊津), 경상도의 가야진(伽倻津), 압록강 · 평양강 등 6독에는 중사를 올리고 경기도의 양진(楊津), 황해도의 아사진(阿斯津), 청천강 등에서는 소사(小祀)를 드리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산천단(山川壇) · 산천성황(山川城隍)의 제도가 확립되고, 하천신 가운데 일부는 적어도 호국지신(護國之神)으로 섬겨지기도 하였다.

민속신앙과 물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산과 하천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는 엄격하게 국가관리하에 두어서 대궐 안의 산천단에서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거나 소관 관료를 현지에 파견하여 제사를 권장하게 하였다.

더불어 백성들이 산천의 신에 제례를 올리는 것을 법으로 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물에 관한 민속신앙 전체가 금지된 것은 아니어서, 국가가 제례를 관리하는 바다나 하천에서도 개인적인 ‘용왕먹이기’까지는 실제로 금할 수가 없었다.

민속신앙에서 물은 매우 큰 구실을 하고 있다. 물은 생명력과 풍요의 원리, 정화력(淨化力)으로 섬겨지면서 독특한 종교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물의 생명력이나 풍요의 원리는 용신 또는 용왕이라는 이름 아래서 용으로 표상되기도 했는데, 용신 · 용왕은 용으로 관념화된 수신(水神)이었다. 용신 · 용왕은 풍요의 원리를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농경의 신으로 섬겨지기도 하였다.

오늘날 농부들이 논두렁에서 ‘용왕먹이기’를 하고 있는 것은 수신에게 풍요를 빌기 위해서이다. 물할미의 물로 관념화된 약수도 역시 생명력과 풍요의 원리를 지닌 것으로 섬겨졌다. 이름이 약수인 만큼, 물의 생명력에서 당연히 의술적인 치유력이 유추될 수 있었다.

약수터에서 용왕을 먹일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약수는 수신인 용왕의 물로 관념화되었을 것이다. 가령, 정월 대보름날 밤 우물에 떠 있는 달그림자를 용란(龍卵)이라고 믿고 그것을 떠서 먹는 여인은 포태를 하게 된다고 한 속신(俗信)에서는 물이 달과 어우러져서 생명력의 원천으로 여기는 것이다.

한편, 물은 불과 함께 정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서 부정(不淨)물림이 되었다. 바가지에 담긴 찬물을 세 번 흩뿌리거나 심마니들이 산삼을 캐러 떠나기 전에 목욕재계하는 등의 행위는 대표적인 정화의 주술이었으며, 소반상에 받친 대접 속의 정화수도 모두 부정물림하는 물이었다. 특히 정화수는 맑음 그 자체로서 치성을 드리는 사람의 치성을 표상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는데, 부엌신에게 바치는 조왕 주발은 그 본보기의 하나이다.

물의 종교적인 정화력은 기독교의 세례나 영세, 불교의 관욕 등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물이 지닌 청정력과 생명력이 통합적으로 믿음의 대상이 되면서, 각종 신흥종교들이 물에 대한 신앙을 수용하여 ‘물법신앙’ 또는 ‘찬물신앙’이 형성되었다.

물법신앙은 10개가 넘는 신흥종교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들은 한결같이 물의 치병력(治病力), 물의 사악이나 부정을 물리치는 힘, 물의 천지 조화의 힘, 물의 재생하는 힘 등에 믿음을 바치고 있다.

신흥종교에서 물에 바치는 민속신앙적 믿음이 집대성되어 보편화되기까지는 천도교의 ‘정수치성’이 선구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속칭 ‘찬물교’라고 일컬어지던 봉남교(奉南敎)만 해도 교조가 백일기도 끝에 하늘에서부터 ‘물법’을 받아 지병이던 속앓이를 고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생겨난 신흥종교로, 찬물은 가장 중요한 제수(祭需)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치성 드리고 난 뒤의 음복도 오직 제단에 바쳤던 ‘법수’만으로 치러졌다. 이러한 봉남교의 물법은 천지대안교(天地大安敎)에 이어지고 있다.

이 밖에 비슷한 사례로는 용화삼덕도(龍華三德道) · 대한도교(大韓道敎)에서 발견되며, 대한도교의 경우 특히 찬물을 마시면서 염송하게 되는 『청정경(淸淨經)』이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들 신흥종교에서 믿는 물의 치병력은 ‘물갖이’의 민속신앙에서 그 구체적인 선례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의 문학적 심상(心像)

민속신앙의 품에 안겨서 종교적 상상력을 촉발함으로써, 창세기적 창조력과 영속적인 생명력 및 풍요의 원리, 그리고 청정한 정화력 등으로 형상화된 것이 우리들의 물이다.

그 속에서 바로 우리들의 물이 지녔던 신화적 원형성을 찾을 수도 있다. 그처럼 종교적 상상력의 텃밭일 수 있었던 물이 문화적 상상력을 촉발하면서 갖가지 풍성한 심상을 낳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산 · 수’를 더불어 일컬어 왔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에 대한 대유법에 그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우리들의 윤리관 · 세계관, 그리고 심미감(審美感)마저 담겨 있었다.

고조선「공후인」에서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낸 물은 신라 향가「찬기파랑가」에서 노래되다가, 고려에 이르러서는 「청산별곡」에서 혹은 「서경별곡」에서 또는 「동동」에서 노래불리고 있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른바 ‘강호도가(江湖道歌)’로 묶는 가사작품이나 시조들에서 조선시대 문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와 심상(이미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물은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폭넓고 긴 소재사(素材史)를 형성해 오면서 민속신앙적인 상상력이 가꾼 정신적 · 심리적 원형성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강호도가에서 절정에 이른 물의 심상은 자연과 세계, 그리고 인생의 섭리,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그러면서도 유연한 순리라는 관념을 길러낸 것이다.

이리하여 물은 세계와 삶의 가장 이상적인 이법(理法) 그 자체로 관념화되기도 한 것이니, 선비다운 기품, 유유자적한 관조, 청아한 지조 등으로 이상화되어 수없이 노래불렸다.

“청산도 절로절로/녹수도 절로절로/산(山) 절로절로 수(水)절로절로/산수문(山水門)에 나도 절로절로/그 중에 절로절로/자란 몸이니 늙기도 절로절로 하리라”와 같은 시조를 그 전형으로 지적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물이 언제나 이상화되어 노래불린 것은 아니다. 심리적 원형성이 짙은 심상일수록, 모순등가성(矛盾等價性)이 높아지기는 물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물이 변덕과 삶의 풍파를 상징하기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샘이 깊은 물은/가뭄에 아니 그칠 새/내가 되어 바다에 가나니”라고 『용비어천가』는 노래하고 있다. 그렇듯이 물은 우리 겨레의 종교적 심성을 위한 가장 깊은 샘에서 솟아올라 종교사와 문학사의 커다란 두 물줄기를 따라 변함 없이 유구하게 흘러 마침내 겨레의 가장 속깊은 정신적 · 심리적 원형의 바다를 이룩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증보문헌비고』
『朝鮮古代觀測調査報告』(朝鮮總督府, 1917)
『한국민속과 문학연구』(김렬규, 일조각, 1971)
『자원총람』(과학기술처, 1974)
『한국신화와 무속연구』(김렬규, 일조각, 1977)
『한국지지총론』(국립지리원, 1980)
『한국민속학론고』(이두현, 학연사, 1984)
『기후와 문화』(김련옥, 이화여자대학교, 1985)
『기후편람』(중앙기상대,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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