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일당 ()

정치
단체
1973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목차
정의
1973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개설

신민당의 반 진산계(反珍山系)인 양일동(梁一東)·김홍일(金弘壹) 등이 중심이 되어 ‘야당의 새로운 진로와 좌표정립’을 표방하고 1973년 1월 27일 창당하여 1980년 10월 해산하였다.

연원 및 변천

신민당의 구주류와 비주류는 1972년 전당대회를 둘러싼 당권경쟁으로 극한적인 대립을 하고 있던 반발한 반 진산연합계는 1973년 1월 창당준비위원회 4인수권위원회를 구성하고 2월에 있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하여 창당하였다.

이렇게 창당된 이 당은 10월유신 이후 새로 창당된 유일한 군소정당이었다. 창당대회에서 양일동을 대표최고위원으로 하고, 최고위원에 윤제술(尹濟述)·정화암(鄭華岩)·김선태(金善太)를 선출하여 집단지도체제를 골간으로 하는 당헌을 채택하였다.

정강정책은, 첫째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여 자유민주주의의 내실을 기한다. 둘째, 자유경제질서를 기조로 하되 빈부의 격차가 빚은 사회 갈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합리적인 경제계획으로 국민생활의 균형있는 발전을 기한다.

셋째, 민족문화의 전통적 가치를 발굴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퇴폐적인 사회풍조 및 부조리를 근절시켜 사회기강을 확립한다.

넷째, 미·소·중·일 등 4대국의 세력균형과 자주국방에 의거한 태평양·아시아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한다는 것 등이다. 창당한 지 불과 1개월 만에 1973년 2월의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 임함으로써 조직·선거자금 등 모든 면에서 곤란을 겪어 선명야당이라는 점을 최대한 부각시키면서 지역구에 57명의 후보자를 내세웠다.

그러나 당수 양일동을 비롯한 당간부들이 대거 낙선되고, 1974년 신민당의 총재 유진산의 사망과 김영삼(金泳三)의 총재 취임을 계기로 신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1976년 1월 통합제의에 대한 김영삼의 거부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듬해 48개 지구당 개편대회를 가지고 제4차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집단지도체제의 당헌을 단일지도체제로 수정하고, 당기구의 개편을 보았다.

1978년 12월의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인원인 20석 확보를 목표로 60명의 지역구후보를 내세웠으나, 양일동·김현수(金顯秀)·김녹영(金祿永) 등 3명만이 당선되었다.

총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민주회복과 평화통일성취 등 2대 목표를 내걸고 김영삼체제의 신민당과 각종 민주회복투쟁대열에 동참하였다.

1979년 8월 YH사태로 농성에 합세한 것을 계기로 하여 신민당과의 무조건 합당을 선언하였으나,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 가처분 제명사태 등으로 정국경색이 장기화되어 감에 따라 양당통합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다음해 2월 부총재 정상구(鄭相九) 등 30여 명이 신민당에 입당하고, 4월양일동이 사망함에 따라 좌초될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0년 5·17조치가 취하여졌고 제5공화국헌법에 따라 1980년 10월 27일 자동 해산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정당사』 2(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1)
집필자
강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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