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오(李養吾)의 본관은 학성(鶴城), 자는 용호(用浩), 호는 반계(磻溪)이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이겸익(李謙益, 15751645)의 후손으로 울산에서 태어났다. 울산 지역의 건축물과 경승지(景勝地)에 다수의 작품을 남겼으며,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 17481812)를 비롯한 경주 지역의 인사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남경희와 이종상(李鍾祥, 1799~1870)의 교열을 거친 원고를 현손 이석인(李錫仁)이 1907년(광무11)에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정석호(鄭錫祜)와 김유헌(金裕憲)이 1905년(광무9)에 쓴 서문이 있으며, 권말에 이능렬(李能烈)이 1905년에 쓴 발문과 후손 이석선(李錫先)이 1907년에 쓴 후지(後識)가 있다.
권1∼3에는 부(賦) 1편을 비롯해 시(詩) 294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권4에는 전(箋) 1편, 서(書) 40편, 서(序) 9편, 기(記) 7편, 발(跋) 12편, 권5에는 잡저(雜著) 11편, 잠(箴) 2편, 축문(祝文) 7편, 권6에는 제문(祭文) 17편, 뇌(誄) 1편, 상량문(上梁文) 4편, 묘지명(墓誌銘) 1편, 행장(行狀) 4편, 유사(遺事) 2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7은 부록으로 이종상이 쓴 행장(行狀), 허전(許傳)의 묘갈명(墓碣銘), 이만도(李晩燾)의 묘갈후지(墓碣後識)가 수록되어 있다.
시는 자연을 노래한 작품이 대다수이며, 육방옹(陸放翁)· 신유한(申維翰)· 이제현(李齊賢) 등 역대 인물의 시에 차운(次韻)한 작품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감회십칠수(感懷十七首)」는 당대 학술과 문학의 폐해, 조세·환곡·도량형·형법·과거·향교·서원의 폐단, 군사 시설과 장비의 소홀한 관리, 불공정한 과거(科擧) 운영 등 당대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잡저의 「기삼백장보주(朞三百章補註)」는 『서경(書經)』 「요전(堯典)」의 ‘기삼백’에 대해 저자가 보충 설명한 글이다. 「인심순요설(人心淳澆說)」은 인심(人心)이 박하고 넉넉함은 백성들의 생활이 얼마나 풍족한가에 달려 있으므로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과 관청에 소요되는 경비를 줄이고 탐관오리들을 처벌하며, 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귀농(歸農)하도록 하고 문무(文武)를 양성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 글은 「최식정론변(崔寔政論辯)」과 함께 당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를 지적한 글이다.
이밖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석가모니의 두개골을 통도사(通度寺)에 안치했다는 설을 논변한 「불골변(佛骨辯)」과 사친(事親)에서 안빈(安貧)에 이르는 내용을 경계한 「거가십잠(居家十箴)」 등의 작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