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9년(선조 12) 생원 · 진사 두 시험에 모두 합격했으며, 1585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정자 · 수찬 · 교리 등을 차례로 지냈다.
1591년 이조정랑으로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유배된 정철(鄭澈)에 연루된 백유함(白惟咸) · 유공진(柳拱辰) 등을 학관(學官)에 천거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추고를 받고 삭직되었다.
이듬해 복관되었고,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였다. 1593년 명나라 장수 총병(總兵) 낙상지(駱尙志) · 유격(遊擊) 오유충(吳惟忠)이 나오자 부교리로서 접반관(接伴官)으로 활약했고, 이듬해 사인을 거쳐 응교로 시강관이 되었다.
이어 직제학 · 동부승지 ·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98년 병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어, 척신(戚臣)의 직을 파할 것과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형조참의 · 예조참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임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았다.
1600년 다시 도승지 · 예조참판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 이미 고인이 된 성혼(成渾)에 대해 왕을 호종하지 않았고 간신들과 한 당이었다고 탄핵해 추삭(追削)하게 하였다.
1602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체직을 원해 이조참판으로 옮겼다. 이후 대사성 · 도승지 · 병조참판을 거쳐, 1604년 공조판서에 올라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충청도관찰사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가 죽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장마로 산릉이 무너지자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