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유보(裕甫). 조인생(趙麟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회(趙懷)이고, 아버지는 조경운(趙慶雲)이며, 어머니는 김응무(金應武)의 딸이다. 공조참판 조인득(趙仁得)은 그의 형이며, 우의정 김귀영(金貴榮)은 외삼촌이다.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다음 일찍이 제주판관을 지냈는데 정사를 행한 이후로 여러 해 동안 쌓였던 폐단이 안개 걷히듯 없어졌다는 칭송을 들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체직을 청하였다. 그 뒤 오랫동안 서용되지 않다가 1583년에야 출사를 명받고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1587년 왜구가 침입하자 선유어사(宣諭御史)로 오랫동안 호남지방에 머물면서 전몰자(戰歿者)를 제사지내 주었으며, 생존자를 찾아 위로해 주고 전몰자의 집은 잡역을 면제해 주는 등 위문하고 돌아와 대사간·도승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